3) 북위의 혼인동맹 제의와 고구려의 거절(ⅱ)
북위의 혼인동맹 제의와 고구려의 거절 모습을 모면 다음과 같다.
북위의 풍태후가 국혼을 청하면서 고구려에 딸을 보내달라고 청하였는데 고구려의 장수왕은“딸은 못보낸다, 조카를 보내겠다”고 하였다. 그런데도 풍태후는 이에 응하였고 북위에서 예를 다해 폐백을 국경까지 보냈다. 그러나 고구려의 장수왕은 북위를 의심하여 조카마저 보내지 않겠다고 하였다. 그런데도 북위에서는 사신 정준(程駿)을 보내 종친의 딸이라도 보내 달라고 하였다. 이때에도 고구려는 종친의 딸마저 보내지 않고 있었는데 476년 6월 혼인 상대인 헌문제를 풍태후가 죽임(독살)으로써 고구려는 끝내 혼담을 거절한 상태에서 혼담 문제가 없어지게 되었다.
이런 모습을 보면 고구려가 위에 있고 북위가 아래에 있음을 느낄수 있다. 또한, 장수왕은 풍태후의 친할아버지를 죽인 사람이고 풍태후는 북위의 모든 권력을 한손에 움켜쥐고 자기 말을 안들으면 고관대작은 물론 황제까지도 죽이는 잔인한 사람이다.
그런데 장수왕은 풍태후의 체면을 고려하지 않고 국혼을 여지없이 깨버렸다. 이런때 풍태후는 어떻게 행동 하였는가?
뜻밖에도 북위는 고구려에 대해서 군사적 공격을 한번도 못하였다. 만약 장수왕의 고구려가 하위국가나 종속국가였다면, 아니 약한 나라였기만 했더라도 풍태후는 무자비한 군사적 공격을 퍼부어 장수왕을 죽여 원수를 갚고, 분풀이를 하면서 고구려를 멸망시켰을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고구려가 북위의 하위정권이나 종속정권, 지방정권, 약한 나라가 아님을 웅변하고 있다. 최소한 고구려는 북위가 감히 넘볼 수 없는 강력한 나라라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또한, 북연이 북위에게 딸을 후궁으로 바치겠다고 빌었던 것과 비교할 때 고구려의 지위가 하늘과 땅의 차이만큼 컸음을 알수 있다.
이 사건을 봐도 고구려의 지위가 매우 높았다는 사실임을 알 수 있고 따라서, 고구려가 북위에게 조공이나 바치고 책봉을 받았다는 얘기는 터무니 없는 말임을 알수 있다. 즉, 고구려에게 종속이니 지방정권이니 하는 것은 끼어들 여지조차 없는 상황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 관련사서 기록: 위서 열전 고구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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