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북위의 혼인동맹 제의와 고구려의 거절(ⅰ)
북위의 풍태후가 고구려에게 혼담을 요청하였다. 즉, 혼인동맹을 제의한 것이다. 먼저 북위는 어떤 식으로 혼인동맹을 맺었는가를 알아보자.
북위를 세운 탁발규의 할아버지, 탁발십익건부터 풍태후가 나오는 문성제(고종)까지 위서 황후열전에 나오는 북위의 혼인동맹 모습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탁발십익건: 북위를 세운 탁발규의 할아버지, 대왕(代王: 대나라 왕), 탁발십익건은 연(전연)에 혼인을 맺자고 청구하니 연왕(모용황)은 그의 누이동생을 그의 처로 삼게 하였다(339년 5월, 자치통감) 그런데 얼마 않있어 죽자 다시 혼인을 청구하니 모용황이 (이번에는) 그의 딸을 보내 주었다 (위서 황후열전 소성황후모용씨,昭成皇后慕容氏) 모용씨가 탁발식을 낳았다
※이때 탁발십익건은 세력이 약했으며 모용황은 전연을 세우고 한창 세력을 떨치던 때임.
② 탁발식: 탁발규의 아버지, 하란부(선비족) 출신의 하씨와 혼인 하였다. 하씨가 탁발규를 낳았다.
※이때 탁발부는 나라를 잃었던 시기임
③ 탁발규: 북위의 건국자 태조 도무제 탁발규의 황후는 둘인데 모용씨와 유씨이다. 모용씨는 모용보(후연의 2대 황제)의 막내딸이며 유씨는 흉노족 독고부, 유권(劉眷: 유고인의 동생, 자치통감에는 유두권으로 나옴)의 딸이다.(위서 황후열전)
※탁발규는 건국 초기 후연의 많은 도움을 받았는 이때 혼인을 청구 한 것으로 보인다.
유씨는 태종(명원제)을 낳은 사람이고(후궁인데 태종이 황후로 추존: 위서 황후열전) 모용씨가 진짜 황후로써 2대 명원제(태종)를 기른 것으로 보인다.
☆ 북위에서는 후궁이 낳은 아들이 태자가 되면 그 어미를 죽이는 제도가 있음. 이를 모사자귀(母死子貴)제도라고 부르기도 하고, ‘입자살모(立子殺母)’의 규정이라고도 함.
④2대 명원제(태종) 명원제의 황후도 둘인데 요흥의 딸과 북위 내국인 두씨이다.
참고로 요흥(姚興, 366년 ~ 416년, 재위:394년 ~ 416년)은 중국 오호 십육국 시대 후진(後秦)의 제2대 황제이며, 족속은 강족이다.
※695년 8월 참합피 전투 때 요흥이 북위를 도와준 일이 있는데 이 때문에 국혼이 이루어 진 것으로 보인다.
두씨는 세조(태무제)를 낳은 사람이고(후궁인데 세조가 황후로 추존: 위서 황후열전) 요씨가 진짜 황후로 태무제를 기른 것으로 보인다. <모사자귀(母死子貴)제도 혹은 입자살모(立子殺母)의 규정>
⑤ 3대 태무제(세조) 태무제의 황후도 둘인데 혁련굴개의 딸과 북위 사람 하씨이다.(하란부 출신)
참고로 혁련씨의 유래를 보면, 흉노 철불부, 유위진의 아들 유발발이 407년 독립하여 하나라를 세우고 본래의 성인 혁련발발로 고친데서 유래한다.
하씨는 공종(경목제)을 낳은 사람이고(후궁인데 공종이 황후로 추존: 위서 황후열전) 혁련씨가 진짜 황후로써 경목제를 기른 것으로 보인다. <모사자귀(母死子貴)제도 혹은 입자살모(立子殺母)의 규정>
⑥ 4대 문성제(고종) 문성제의 황후 역시 둘인데 풍태후와 북위 사람 이씨이다. 풍태후는 북연의 마지막 왕 풍홍의 손녀이다.(한족)
이씨는 현조 헌문제를 낳은 사람이고(후궁인데 현조가 황후로 추존) 풍태후가 진짜 황후로써 헌문제를 길렀다.(자치통감)
그러니까 진짜 황후를 보면 탁발십익건 때는 전연의 모용씨(선비 모용부), 탁발식 때는 하씨(선비 하란부), 태조 도무제는 후연의 모용씨(선비 모용부), 2대 태종 명원제는 후진의 요씨(강족), 3대 세조 태무제는 하나라의 혁련씨(흉노 철불부), 4대 고종 문성제는 북연의 풍씨(한족)이다.
즉, 진짜 황후는 이웃나라 왕가 출신이며, 북위가 한때 도움을 받았던 나라에서 들어온 사람이다. 다시말해서 한때라도 북위보다 강했던 나라 출신이다.
(탁발식 때는 나라가 망했으니 내국인이고, 4대 문성제 때의 풍태후는 어린 나이에 후궁으로 들어 왔는데 태무제의 제1서열 후궁인 좌소의(左昭儀)이었던 고모의 도움으로 문성제의 황후가 된 사람이다)
다시말해서 북위에서 국혼을 청한 것은 북위에게 도움을 줄만한 나라 즉, 국혼을 청할 당시 북위보다 강한 나라이거나 최소한 국위와 국력이 대등한 나라이다. 이것으로 볼 때 북위에서 고구려에 국혼을 청했다고 하는 것은 고구려는 북위보다 국력이 강했거나 최소한 대등하였음을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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