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낙랑(樂浪)을 뺌이니,
낙랑은 조선사상 가장 장황하고 어지럽고 소란한(張皇紛擾-장황분요한) 큰(大)문제다.
그 상세한 논의(詳論-상론)는 다른 날(他日-타일)로 미루(讓-양)거니와,
이제 간략히 설명(略說-약설)하건대
낙랑은 평양이요 평양은 펴라의 번역(譯-역)이니,
한무제(漢武帝)가 위만을 멸하고 낙랑을 주, 군(州郡)의 제일로 정하니,
그 위치가 지금 해성(海城) 등지요,
최씨란 자(者)가 대동강 연안에서 우뚝 서(굴기-崛起하여) 낙랑국이라 칭하다가
마지막 왕 최리가(末王 崔里-말왕 최리)가 고구려에게 망하니
이는 곧 대무신왕 20년이요,
그 뒤에 낙랑속국이 고구려에게 불복하여 한나라 군대(漢兵-한병)을 영입하여
고구려에게 반항하니 이는 대무신왕 말년이라.
나제(羅濟: 신라 백제) 양국이 처음에 낙랑의 침구(침략)로 말미암아 안정한 날이 없다가
대무신왕 이후부터 그 침구(침략)가 끊어짐(絶跡-절적)은 최씨 왕국이 멸망한 까닭이라.
한 광무 이후의 낙랑이 비록 한(漢)에 굴복(服-복)하였으나
그 인민의 자치와 각 소국의 주권은 의구히 조선인이 주관(主-주)하였으니,
소위 낙랑태수는 요동에 임시로 머물러 산(僑寓-교우한) 자(者)요,
태조대왕 때에는 요동의 낙랑까지 고구려의 소유가 되었으므로
당 가탐(賈耽)의 사이술 자서(四夷述自序)에
“요동낙랑은 한 건안 때(서기 196~219)에 함락되었다(遼東樂浪陷於漢建安之際)”라고 함이요,
동천왕 때에 이르러(至-지 하여) 대동강의 낙랑은 고구려에 여전히 속하였으므로(仍屬-잉속)
동천왕이 환도(丸都)를 관구검의 유린에 버리고(棄-기하여)
종묘 사직(廟社-묘사)과 인민을 평양에 옮겼으나(移-이함이나),
요동의 낙랑은 위(魏)에 빼앗겼으므로(見失 -견실하였으므로)
관구검이 군사를 되돌릴(還軍환군) 제(際: 때)에 낙랑을 따라 나감(從-종함)이요,
미천왕 때에는 요동의 낙랑이나 대동강의 낙랑이 다 고구려에 들어 왔으므로(入하였으므로)
연나라 모용외가 영평부(永平部)의 유성(柳城)에 낙랑을 옮겨 세웠음(移設-이설함)이며,
광개토왕 장수왕 이후에는 유성(柳城)의 낙랑이 고구려의 침입 핌박(침핍)을 당하다가
백제의 병(兵)이 바다(海)를 건너(渡하여) 쳐서 점거(침거)하여
위제(魏帝: 拓跋氏 -척발씨)가 상곡(上谷: 지금 大同府-대동부)내에 낙랑을 옮겨 세웠음(移設-이설 함)이니,
이상은 사책(史冊)에 증명된 것이다(者-자 라).
요동낙랑은 비록 조선의 소유된 때가 있으나
그 인민과 지리가 당시 중국사의 범위에 들었던(入-입한) 것이며(者-자이며),
대동강의 낙랑은 비록 한족(漢族)의 정복을 당한(被-피) 적이 있으나
항상 조선에 속한 것 이어늘
삼국지가 한서 지리지의 남겨진 규칙(遺規-유규)을 답습(襲-습)하여
낙랑을 조선열전 중에 빼었으므로
그 지리가 빠진 한(缺憾-결감)은 고사하고
첫번째는 고구려와 낙랑의 언어 풍속 등 같고 다름(同異-동이)의 관계를 말하지 아니하며,
두번째는 낙랑과 삼한의 언어 풍속 등 같고 다름(同異)의 관계를 말하지 아니하며,
세번째는 따라서 고구려 부여 등 북방제국과 삼한 등 남방 제국과의 연락이 단절하여
본지(삼국지) 동이열전의 비상한 결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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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 설 >
1. 오늘 본문에 낙랑에 대한 간단하고 명료한 낙랑의 역사가 있습니다.
역사를 공부하는 이에게 많은 지침이 될 것입니다.
1) 낙랑은 평양이요 평양은 펴라의 번역이다.
2) 한무제(漢武帝)가 위만을 멸하고 세운 낙랑군의 위치가 지금 해성(海城:요동) 등지다,
3) 최씨란 자(者)가 대동강 연안에서 우뚝 서서 낙랑국이라 칭하였다.
4) 마지막 왕 최리가 고구려에게 망하니 이는 곧 대무신왕 20년이다.
5) 그 뒤에 낙랑속국이 고구려에게 불복하여 한나라 군대를 영입하여
고구려에게 반항하니 이는 대무신왕 말년이다.
6) 나제(羅濟: 신라 백제) 양국이 처음에 낙랑의 침략(침구)으로 말미암아 안정한 날이 없다가
대무신왕 이후부터 그 침략이 끊어짐은 최씨 왕국이 멸망한 까닭이다.
7) 한나라 광무 이후의 낙랑이 비록 한(漢)에 굴복하였으나
그 인민의 자치와 각 소국의 주권은 여전히 조선인이 주관하였으니,
소위 낙랑태수는 요동에 임시로 머물러 산 자(者)다.
8) 태조대왕 때에는 요동의 낙랑까지 고구려의 소유가 되었으므로
당나라 가탐(賈耽)의 사이술 자서(四夷述自序)에
“요동낙랑은 한 건안 때(서기 196~219)에 함락되었다(遼東樂浪陷於漢建安之際)”라고 함이다.
9) 동천왕 때에 이르러 대동강의 낙랑은 고구려에 여전히 속하였으므로
동천왕이 환도(丸都)를 관구검의 난에 버리고
종묘 사직과 인민을 평양에 옮겼으나,
10) 요동의 낙랑은 위(魏)에 빼앗겼으므로
관구검이 군사를 되돌릴 때에 낙랑 길을 따라 나갔다.
11) 미천왕 때에는 요동의 낙랑이나 대동강의 낙랑이 다 고구려에 들어 왔으므로
연나라 모용외가 영평부(永平部)의 유성(柳城)에 낙랑을 옮겨 세웠다.
12) 광개토왕 장수왕 이후에는 유성(柳城)의 낙랑이 고구려의 침입 핌박을 당하다가
백제의 군대가 바다를 건너 쳐서 점거하여
위제(魏帝: 척발씨)가 상곡(上谷: 지금 대동부)내에 낙랑을 옮겨 세웠다.
※ 요동낙랑은 비록 조선의 소유된 때가 있으나
그 인민과 지리가 당시 중국사의 범위에 들었던 것이며,
대동강의 낙랑은 비록 한족(漢族)의 정복을 당한 적이 있으나
항상 조선에 속한 것이다.
1) 원본출처: 조선사연구초(인터넷 판 - 위키문헌)
http://ko.wikisource.org/wiki/%EC%A1%B0%EC%84%A0%EC%82%AC_%EC%97%B0%EA%B5%AC_%EC%B4%88
2) 참고문헌: 조선상고문화사(외), 비봉출판사, 2008년판
* 조선사 연구 초(朝鮮史硏究草), <저자: 신채호>
가. 고사상(古史上) 이두문 명사 해석법
나. 삼국사기(三國史記) 중 동서(東西) 양자(兩字)의 상환(相換) 고증(考證)
다. 삼국지 동이열전 교정
라. 평양 패수고
마. 전후 삼한고(前後 三韓考)
바. 조선역사상 일(一)천년래 제일 대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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