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여러 가지 대단히 복잡하고 난해한 문제들의 가닥이 잡혔다. 단재선생께서 주신 해답을 바탕으로 삼국지부터 하나씩 검토해 보자.
1. 삼국지의 검토
1) 첫 번째 문장
『왕망(王莽)의 초(初)에 고구려의 군사를 징발하여 호(胡:흉노,匈奴)를 정벌하게 하였으나, [고구려가 호(胡)를 정벌하러] 가지 않으려 하여 강압적으로 보냈더니, 모두 도망하여 국경을 넘은 뒤 [중국의 군현을] 노략질하였다.』 라고 한 대목에서
① 왕망이 호(胡:흉노,匈奴)를 정벌하게 된 원인과 ② 강압적으로 보낼수 있었던 까닭은 단재선생께서 주신 해답에 의해 풀렸다.(전편 참조)
2) 그 다음 문장
『요서(遼西)[군(郡)]의 대윤(大伊) 전담(田譚)이 그들을 추격하다가 [도리어 그들에게] 살해되었다. [이에 중국의] 주(州)·군(郡)·현(縣)이 그 책임을 [고(高)]구려후 추 (句麗侯 騊)에게 전가시키었다. 엄우(嚴尤)는,“맥인(貊人)이 법(法)을 어긴 것은 그 죄가 추(騊)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므로, 그를 안심시키고 위로해야 함이 마땅합니다. 지금 잘못하여 큰 죄(罪)를 씌우게 되면 그들이 마침내 반란을 일으킬까 걱정됩니다.” 라고 아뢰었다. 그러나 왕망(王莽)은 그 말을 듣지 않고 우(尤)에게 [고구려를] 치도록 명하였다. 우(尤)는 [고(高)]구려후 추(句麗侯 騊)를 만나자고 유인하여 그가 도착하자 목을 베어 그 머리를 장안(長安)에 보내었다. 왕망(王莽)은 크게 기뻐하면서 천하(天下)에 포고하여 고구려(高句麗)란 국호(國號)를 바꾸어 하구려(下句麗)라 부르게 하였다.』 라고 한 대목을 보면
① 처음부터 구려후(句麗侯)가 있었음을 알수 있다.
다시 말해서 후한서가 말하는 「구려후(句驪侯) 추(騶)를 꼬여 국경 안으로 들어오게」했다던가 구려후(句驪侯) 추(騶)의 목을 벤 다음 「고구려왕(高句驪王)의 칭호를 고쳐서 하구려후(下句驪侯)라 부르게 하였다.」는 것은 후한서를 쓴 범엽이 삼국지를 베끼는 과정에서 제멋대로 고쳐 쓴 것임을 알수 있다.
② 위 문장 중, 마지막에 있는 「고구려(高句麗)란 국호(國號)를 바꾸어 하구려(下句麗)라 부르게 하였다」는 문장은 번역을 한 국사편찬위원회의 창작이며 거짓말이고 사기이다.
원문을 보면 「更名高句麗爲下句麗.」이렇게 되어 있으니 「고구려의 이름을 고쳐 하구려로 하였다.」이다.
여기에 어디도 「국호」라는 것이 없다 그냥 고구려를 하구려로 바꾸어 부르게 한 것이다.
왕망 때에는 아직 한나라의 제도가 살아있는 때이기 때문에 여기서 말하는‘고구려’란 한서 지리지에 나오는‘고구려현’이다.
위에서 말하는‘고구려’가‘고구려현’이라는 또하나의 증거:
윗 문장을 보면‘구려후(句麗侯)’가 나오고 위에 제시된 문장 다음에 『이 때에 [고구려는] 후국(侯國)이 되었는데』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것이 위에서 말하는 '고구려'는 '고구려현'이라는 증거이다.
그 이유는 아래와 같다.
한나라 때에는 군국제(郡國制)를 실시하였는데, 군국제란 다음과 같은 것이다.
한(漢) 고조(高祖) 유방은 항우를 물리치고 전국을 통일하는 데 공을 세운 7명을 왕으로 봉해 각지의 제후 왕국들의 전재를 승인하였다.(왕국-王國)
그리고 거병(擧兵)이래 공을 세운 공신들은 열후(列侯)로 봉하고 1개 현(縣)을 단위로 한 봉읍(封邑)을 지급해 그곳에서 징수된 조세가 그들의 수입이 되도록 하였다.(후국-侯國)
그리고 이러한 왕국(王國)와 후국(侯國)을 제외한 지역에서는 진(秦)의 군현제(郡縣制)를 채택했는데, 이렇게 봉건제(封建制)와 군현제(郡縣制)를 병용한 한(漢)의 지방 행정 제도를 군국제(郡國制)라 한다.
한(漢) 초기에는 103개의 군국(郡國)이 존재했는데, 한(漢) 왕실이 직접 장악했던 것은 15개 군(郡)에 지나지 않았으며 왕후들이 차지한 왕국들이 한 전체 영토의 2/3를 차지했다.
이러한 초기 한나라의 전통은 계속되어 한나라 말기에도 큰 지방의 왕국은 왕(王)을 칭하고, 1개 현을 단위로 하는 작은 지방의 후국은 후(侯)를 칭하였다.
따라서, 고구려가 후국(侯國)이었다는 말과 그 수장을 구려후(句麗侯)라고 칭하였다는 것은 위에서 말하는‘고구려’가 현(縣)임을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고구려는] 후국(侯國)』이라는 말은 고구려현을 지칭하는 것이 명명백백하다. 또한 위에 나오는‘고구려’라는 명칭은‘고구려현’임이 명명백백하다.
다시말해서 단재선생께서 말하는 고구려현을 하구려현으로 바꾸어 부르게 했다는 말이 맞다는 말이다. 사실을 알아볼수록, 역사를 공부할수록 단재선생께서 말씀하신 바가 맞다는 것을 또한번 확인할 수 있다.
③ 「국호(國號)」라는 말이 있고, 없고가 왜 중요한가 하면...
위에서 말하는‘고구려’가 ‘고구려국’이 아니고 ‘고구려현’임에도 불구하고
원문에 있지도 않은 「국호(國號)」라는 말을 끼워 넣음으로써 고구려현이 고구려국 이로구나 하는 오해를 할수 있게 하고,
이에따라, 그 위에 있는 문장 「왕망(王莽)의 초(初)에 고구려의 군사를 징발」이라는 문장도 왕망이 고구려국의 군사를 징발할수 있는 권한이 있는 것처럼 오해할수 있게 하고, 그 말은 왕망이 고구려국을 지배했다는 오해를 할수 있게 한다.
이는 또한 「구려후 추 (句麗侯 騊)」를 고구려 국왕을 낮추어 지칭하는 말로 오해할 수 있게 하며, 그 아래 나오는 『[고구려는] 후국(侯國)』이라는 말도 고구려국이 신나라의 후국이라는 말로 오해를 할수 있게끔 한다. 그리고 마지막에 나오는 「고구려왕」이라는 말을 이해할 수 없게 만든다.
④ 원문 그대로, 사실 그대로 기술하면, 「고구려의 이름을 고쳐 하구려로 하였다.(更名高句麗爲下句麗)」이다.
그렇다면, 왕망때는 한나라의 제도가 그대로 살아있는 때이니, 여기서 말하는 고구려란 한서지리지에 나오는 고구려현이고 『[고구려는] 후국(侯國)』이라는 말과 「구려후(句麗侯)」라는 말에서 알수 있듯이 여기서 말하는 '고구려'는 '고구려현'이다.
따라서, 「고구려의 이름을 고쳐 하구려로 하였다」는 「고구려현의 이름을 고쳐 하구려현으로 하였다」이다.
이에 따라서 모든 사실을 사실대로 바르게 알수 있게 한다. 즉, 그 위에 있는 문장 「왕망(王莽)의 초(初)에 고구려의 군사를 징발」이라는 문장도 왕망이 자기 휘하에 있는 현도군 고구려현의 군사를 징발한 것이고,
「구려후 추 (句麗侯 騊)」라는 말이 고구려현이 있음에 따라 그 수장을 지칭한 말이기 때문에 애초부터 나오는구나! 하는 것을 알수 있게 하며, 그 아래 나오는 문장『우(尤)에게 [고구려를] 치도록 명하였다.』라는 것도 「고구려현을 치도록 명하였다」임을 알수있게 한다.
이 뒤에 나오는 『[고구려는] 후국(侯國)』이라는 말도 고구려현이 후국의 위치에 있음 알수 있게 하는 말임에 비하여, 마지막에 나오는 「고구려왕」이라는 말은 고구려국의 왕임을 알수 있게 한다.
⑤ 이렇듯 있지도 않은 거짓말을 끼워 넣음으로써 국사편찬위원회(또는 번역자)는 한문 문장을 모르는 대다수 한국 사람들을 속인 것이다. 우리역사를 속인 것이다. 사기를 친 것이다.
사기가 성립하는 것은 많은 사실들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그럴듯하게 사실을 늘어놓고 핵심적이고 결정적인 순간에 거짓말을 끼워 넣음으로써 사기는 성립하는 것이다.
여기에서도 원문에 있는 사실을 번역하여 나열해 놓은 다음, 원문에 있지도 않은「국호(國號)」라는 핵심적이고 결정적인 말을 슬쩍 끼워 넣음으로써, 그 전후에 있는 모든 사실을 뒤집어 버리는 사기를 친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국사편찬위원회’에서 한 짓이다. 이것으로써 지금도 식민지 사관의 개들과 사대주의, 모화주의에 찌들은 일부 유교도 모리배들이 우리역사를 점령하면서 오도하고 있음을 알수 있다. 이것이 2012년 현재에도 벌어지고 있는 우리의 현실이다. 하루빨리 개들과 모리배들을 몰아내고 뜯어 고쳐서 우리역사를 올바르게 바로 잡아야 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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