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고구려와 중국의 관계-5(선비족)

상 상 2012. 10. 2. 17:54

 

글의 순서

 

1. 고구려와 선비(鮮卑)의 관계

2. 고구려와 선비(鮮卑)의 관계 기록

 

 

1. 고구려와 선비(鮮卑)의 관계

 

※ 선비족은 원래 중국민족이 아니다.

 

1) 고구려는 일찍부터 선비(鮮卑)를 속국으로 삼았다.

그리고 그 후 종 노릇을 하던 선비를 데리고 전쟁에 나섰다.

(아래 삼국사기 기록 참조)

 

선비족은 하나의 부족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여러 부족이 있다.

대표적인 것이 모용부, 탁발부, 우문부, 걸복부, 독발부. 단부 등이다.

모용부는 전연 후연 남연 북연을 세웠고,

탁발부는 북위, 우문부는 서위 북주,

걸복부는 서진, 독발부는 남량을 세웠다.

 

이중에서 고구려에게 속국이 된 부족은 모용부로 생각된다.

왜냐하면 선비 모용부의 초기역사를 잘 알수 있는 진서 재기8 모용외전의 다음과 같은 기록 때문이다.

 

『증조 막호발은 위나라 초 그 여러 부락을 이끌고 요서에 들어가 거주하였고, 선제를 따라 공손씨를 정벌하여 공이 있었으니,

솔의왕으로 임명되고 비로소 극성의 북쪽에 나라를 세웠다.

(원문:曾祖莫護跋,魏初率其諸部入居遼西,從宣帝伐公孫氏有功,拜率義王,始建國於棘城之北。』

 

※ 증조 막호발 이전의 이야기는 막연한 이야기뿐임.

 

여기서 시기를 알수 있는 기록이 「선제를 따라 공손씨를 정벌」했다는 기록이다.

여기서 선제란 사마의를 말하고 있고, 사마의가 공손씨를 정벌한 때는 진서 선제기와 삼국지 위서 공손도전을 보면 238년 6월이다.

 

그때는 산상왕이 내분을 일으켜 받아들였던 호(胡)가 고구려를 배반하고 떠났다는 209년 10월 경으로부터 30년이 지난 시기이기

때문에 시기적으로도 잘 맞고,

처음 정착한 지역도 고구려와 지역적으로 제일 가까운 요서이기 때문에 지리적으로도 잘 맞으며,

가장 어려웠을 때인 북연때도 고구려와 가장 우호적이었고, 결국 다시 돌아온 곳도 바로 고구려이기 때문이다.

 

2) 고구려에서 종 노릇을 하던 모용 선비는 산상왕이 내분을 일으킨 209년 10월경에

고구려를 탈출, 요서지역에서 모용외가 두각을 나타내고, 모용황 때 전연을 세우며 세력을 떨치더니 드디어 고구려의 서울인 환도성을 함락시키고 돌아갔으며, 그후 중국으로 방향을 돌려 화북지방을 정복하고 계성(지금의 북경)으로 수도를 옮긴다.

그러나 전진의 부견에게 대패하여 전연은 망하고, 전진이 동진을 정벌하려다가 대패하여

전진이 망하게 되자 모용수가 후연을 세운다. 후연은 자기들이 키워주었던 북위에게 대패하자 수도를 용성(지금의 조양)으로 옮긴다. 이후 후연은 내분에 휩싸여 망하고 북연이 이를 잇게되는데 북연은 북위에게 밀리자 고구려로 투항하게 된다.

결국 돌고돌아 고구려로 돌아온 것이다.

 

3) 한편 또다른 선비족인 탁발씨는 북위를 세워 후연을 대파하고 화북지방을 통일하면서

북중국의 강대국이 된다. 북위는 수도를 평성(현 산서성 대동시)에서 남쪽 낙양으로 옮기면서 약화되기 시작하더니 6진의 난과

이주영에게 결정적 타격을 입는다. 이후 이주영의 세력을 몰아낸 고환과 또다른 선비족인 우문태가 각각 동위와 서위로 독립하고

그것은 북제와 북주로 이어졌으며 북주가 북제를 이기고 북주에서 양견이 나타나 북주를 차지하면서

수나라를 세운다. 이 사람이 수문제이다. 수문제 역시 선비족이다.

수나라는 남조 진나라를 멸망시키고 중국을 통일한다

 

4) 수나라는 그후 수양제가 고구려를 침략하다가 대패하여 망하게 되자 이틈을 타서 당고조 이연이 각 세력을 평정하고

 당나라를 건국한다.

 

당고조 이연은 수문제 양견의 아내인 독고황후가 이모이다.

즉, 당고조 이연의 어머니는 독고신의 4번째 딸이며

수문제 양견의 아내, 독고황후(수양제의 어머니)는 독고신의 7번째 딸이다.

 

다시말해서 당고조 이연과 수양제 양광은 이종사촌 지간이며

당고조 이연이나 수문제 양견 모두 모두가 서위의 8주국 12대장군 집안출신의 이른바 관농집단(關籠集團)의 후손들이며

이들은 북위 6진의 하나인 무천진 출신로써 다같은 선비족이다.

이로써 선비족은 중국 역사의 한 줄기가 되었다.

 

5) 여기서는 고구려 초기 때, 고구려와 선비의 일만 다룬다.

 

 

2. 고구려와 선비족의 관계 기록

 

< 삼국사기 고구려 제2대 유리명왕 본기 >

 

11년(서기전 9) 여름 4월에 왕은 여러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선비(鮮卑)는 [지세가] 험한 것을 믿고 우리와 화친하지 않으면서,

이로우면 나와서 노략질하고 불리하면 들어가 지키니 나라의 근심거리가 된다.

만약 이들을 굴복시킬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장차 그에게 후한 상을 줄 것이다.”

 

부분노(扶芬奴)가 나와서 아뢰었다.

“선비는 [지세가] 험하고 굳은 나라이고 사람들이 용감하나 어리석으므로,

힘으로 싸우기는 어렵고 꾀로 굴복시키기는 쉽습니다.”

왕은 “그러면 어찌하면 좋은가?”고 물었다.

 

[부분노가] 대답하였다.

“사람을 시켜 배반한 것처럼 해서 저들에게 들어가 거짓으로

‘우리나라는 작고 군대가 약하고 겁이 많아서 움직이기 어렵다.’고 말하게 하십시오.

그러면 선비는 필시 우리를 업신여기고 대비하지 않을 것입니다.

 

신은 그 틈이 생기는 것을 기다렸다가 정예 군사를 이끌고

사잇길로 가서 수풀에서 그 성을 엿보겠습니다.

 

왕께서 약한 군사를 시켜 그 성 남쪽으로 나가게 하면

그들이 반드시 성을 비우고 멀리 쫓아올 것입니다.

 

[그때] 신이 정예 군사로 그 성으로 달려 들어가고

왕께서 친히 용맹스런 기병을 거느리고 협공을 하면 이길 수 있습니다.”

 

왕은 그 말에 따랐다. 선비(鮮卑)가 과연 문을 열고 군대를 내어 뒤쫓았다.

부분노는 군사를 거느리고 그 성으로 들어가니 선비가 그것을 보고 크게 놀라

되돌아 달려왔다.

 

부분노는 관문을 지키며 막아 싸워 매우 많은 [적을] 목베어 죽였다.

왕은 깃발을 세우고 북을 울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선비가 앞뒤로 적을 맞이하게 되자 계책이 다하고 힘이 꺾였으므로

항복하여 속국이 되었다.

 

왕은 부분노의 공을 생각하여 식읍(食邑)을 상으로 주었으나,

[부분노는] 사양하면서 말하기를

“이것은 왕의 덕입니다. 신에게 무슨 공이 있습니까?”라고 하고는 결국 받지 않았다.

그래서 왕은 황금 30근과 좋은 말 10필을 내려주었다.

 

위 기록에 관하여

 

내용으로 보아 우리측 사료인 구삼국사 또는 해동고기 등에서 가져온 내용이므로

중국측 사료에는 그 내용이 없다.

 

 

< 삼국사기 고구려 제6대 태조대왕 본기 >

 

69년(121) 여름 4월에 왕은 선비 8천 명과 함께 가서 요대현(遼隊縣)을 쳤다.

 

이 기록은 아래에서 보는 바와 같이 후한서 동이열전 고구려편을 추려 (편집하여)

삼국사기에 쓴 것이다.

 

 

< 후한서 동이열전 고구려전 >

 

건광(建光) 원년(元年)(121년)

여름에 (태조대왕이) 다시 요동(遼東)의 선비(鮮卑)[족(族)] 8천여명과 함께

요대(遼隊)[현(縣)]을 침공하여 관리와 민간인을 죽이고 약탈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