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와 왕망의 신나라와의 관계에 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 삼국지 동이전 고구려편 >
왕망(王莽)의 초(初)에 고구려의 군사를 징발하여 호(胡:흉노,匈奴)를 정벌하게 하였으나, [고구려가 호(胡)를 정벌하러] 가지 않으려 하여 강압적으로 보냈더니, 모두 도망하여 국경을 넘은 뒤 [중국의 군현을] 노략질하였다.
요서(遼西)[군(郡)]의 대윤(大伊) 전담(田譚)이 그들을 추격하다가 [도리어 그들에게] 살해되었다. [이에 중국의] 주(州)·군(郡)·현(縣)이 그 책임을 [고(高)]구려후 추 (句麗侯 騊)에게 전가시키었다.
엄우(嚴尤)는,“맥인(貊人)이 법(法)을 어긴 것은 그 죄가 추(騊)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므로, 그를 안심시키고 위로해야 함이 마땅합니다. 지금 잘못하여 큰 죄(罪)를 씌우게 되면 그들이 마침내 반란을 일으킬까 걱정됩니다.” 라고 아뢰었다. 그러나 왕망(王莽)은 그 말을 듣지 않고 우(尤)에게 [고구려를] 치도록 명하였다.
우(尤)는 [고(高)]구려후 추(句麗侯 騊)를 만나자고 유인하여 그가 도착하자 목을 베어 그 머리를 장안(長安)에 보내었다. 왕망(王莽)은 크게 기뻐하면서 천하(天下)에 포고하여 고구려(高句麗)란 국호(國號)를 바꾸어 하구려(下句麗)라 부르게 하였다.
이 때에 [고구려는] 후국(侯國)이 되었는데 [후(後)]한(漢) 광무제(光武帝) 8년(A.D.32)에 고구려왕(高句麗王)이 사신을 보내어 조공(朝貢)하면서 비로소 왕(王)의 칭호를 사용하게 되었다
(원문: 王莽初發高句麗兵以伐胡 不欲行, 彊迫遣之, 皆亡出塞爲寇盜. 遼西大尹 田譚追擊之, 爲所殺. 州郡縣歸咎于句麗侯騊 嚴尤奏言: 「貊人犯法, 罪不起于騊, 且宜安慰. 今猥被之大罪 恐其遂反.」莽不聽, 詔尤擊之. 尤誘期句麗侯騊至而斬之, 傳送其首詣長安. 莽大悅, 布告天下, 更名高句麗爲下句麗. 當此時爲侯國, 漢 光武帝八年, 高句麗王遣使朝貢, 始見稱王)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 후한서 동이열전 고구려전 >
왕망(王莽) 초(初)에 구려(句驪)의 군사를 징발하여서 흉노(匈奴)를 정벌하게 하였으나 그들이 [흉노를 정벌하러] 가지 않으려 하여 강압적으로 보냈더니, 모두 국경 너머로 도망한 뒤 [중국의 군현을] 노략질하였다.
요서대윤(遼西大尹) 전담(田譚)이 그들을 추격하다가 전사하자, 왕망(王莽)이 장수 엄우(嚴尤)를 시켜 치게 하였다. [엄우(嚴尤)는] 구려후(句驪侯) 추(騶)를 꼬여 국경 안으로 들어오게 한 뒤 목을 베어 그 머리를 장안(長安)에 보내었다. 왕망(王莽)은 크게 기뻐하면서, 고구려왕(高句驪王)의 칭호를 고쳐서 하구려후(下句驪侯)라 부르게 하였다. 이에 맥인(貊人)이 변방을 노략질하는 일은 더욱 심하여졌다.
○ 건무(建武) 8년(A.D.32)에 고구려(高句驪)가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므로, 광무제(光武帝)가 그 왕호(王號)를 회복해 주었다.
(원문: 王莽初, 發句驪兵以伐匈奴, 其人不欲行, 彊迫遣之, 皆亡出塞爲寇盜. 遼西大尹田譚追擊, 戰死. 莽令其將嚴尤擊之, 誘句驪侯 騶入塞, 斬之, 傳首長安. 莽大說, 更名高句驪王爲下句驪侯, 於是貊人寇邊愈甚) ○建武八年(32), 高句驪遣使朝貢, 光武復其王號.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 삼국사기 고구려 제2대 유리명왕 본기 >
31년(서기 12) 한(漢)나라의 왕망(王莽)이 우리 군사를 징발하여 호(胡)를 정벌하려고 하였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려고 하지 않자 [왕망이] 강제로 보내었더니 모두 새외(塞外)로 도망쳤다. 그래서 법을 어겨 도적이 되었다. 요서(遼西) 대윤(大尹) 전담(田譚)이 추격하였으나 죽임을 당하자 [한나라] 주군(州郡)에서는 허물을 우리에게 돌렸다.
엄우(嚴尤)가 아뢰었다. “맥인(貊人)이 법을 어겼으나 마땅히 주군에 명해서 위안하여야 합니다. 지금 함부로 큰 죄를 씌우면 마침내 반란을 일으킬까 두렵습니다. 부여의 무리 중에 반드시 따라 응하는 자들이 있을 것인데, 흉노(匈奴)를 아직 누르지 못한 터에 부여와 예맥(獩貊)이 다시 일어난다면 이것은 큰 걱정거리입니다.” 왕망이 듣지 않고 엄우에게 명하여 공격하였다.
엄우가 우리 장수 연비(延丕)를 유인하여 머리를 베어서 수도로 보냈다. <양한서(兩漢書)와 남북사(南北史)에서는 모두 『구려후(句麗侯) 추(騶)를 유인하여 베었다.』고 하였다.> 왕망이 기뻐하고 우리 왕을 하구려후(下句麗侯)라고 고쳐 부르고, 천하에 포고하여 모두 알게 하였다. 이래서 [고구려는] 한나라 변경 지방을 더욱 심하게 침범하였다.
(원문: 三十一年 漢王莽發我兵伐胡 吾人不欲行 强迫遣之 皆亡出塞 因犯法爲寇 遼西大尹田譚追擊之 爲所殺 州郡歸咎於我 嚴尤奏言 “貊人犯法 宜令州郡 且慰安之 今猥被以大罪 恐其遂叛 扶餘之屬 必有和者 匈奴未克 扶餘·獩貊復起 此大憂也” 王莽不聽 詔尤擊之 尤誘我將延丕斬之 傳首京師 兩漢書及南北史皆云 『誘句麗侯騶 斬之』 莽悅之 更名吾王爲下句麗侯 布告天下 令咸知焉 於是 寇漢邊地愈甚) <출처: 네이트, 한국학, 삼국사기 http://koreandb.nate.com/history/sak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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