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

동북아에 드리운 세 개의 그림자

상 상 2012. 9. 13. 18:18

 

출처: 매일경제, 기사입력 2012.09.12 17:40:58 | 최종수정 2012.09.12 19:20:33

 

해마다 닥치는 태풍처럼 한ㆍ일 관계도 주기적으로 요동쳐 왔다. 그러고는 시간과 함께 잦아들 것이라고 뒷짐을 지곤 한다. 새 대통령이 선출되면 또다시 "과거보다는 미래로 가자"고 선언할 욕구를 느낄 것이다. 그래도 될까?

 

전쟁 책임을 지고 죄과를 치러야 했던 나치와 그들을 처벌하고 재발 방지를 보장한 전후 독일은 완전히 구별됐다. 천황제의 일본과 공화제의 일본으로 단절이 되었다면 동북아 질서가 지금보다는 조화로웠을 것이다.

 

전후 일본의 재벌, 군벌, 관료 조직들은 전범 해당자의 폭을 축소하고 처벌 수위를 낮추기 위한 방편으로 미국에 천황제 존속을 설득했다. 소련 공산주의 팽창을 저지하는 보루로서 일본의 안정도 필요했다. 전쟁 최고사령관이던 일왕에게 면죄부가 주어진 배경이다. 결과적으로 일본은 전쟁의 죄과에 대해 진정으로 `죄의식이 스며든 외교`를 할 수 없는 정치ㆍ사회적 구조로 굳어졌다. 절대 신권으로 받드는 일왕에게 죄를 묻지 못하기 때문이다.

 

일본은 그 대가로 먼 장래에까지 도덕적 열등감에 시달려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일본이 과거의 감옥에 갇혀 있는 것이 우리 미래에 대한 해답이 될 수는 없다. 일본의 퇴행적 역사 인식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일본을 아태지역의 가장 핵심적 동맹으로 삼으면서 아시아 전략의 전면에 한국이 일본과 함께 서 주기를 요청하는 것이 현실이다.

 

지금 동북아에는 역사상 수많은 비극의 단초가 되어온 세 개의 그림자, 즉 민족주의, 군사우선주의, 영토분쟁몰입이 결합되고 있다. 중국의 군사비가 급증하는 가운데 미국의 아시아 정책은 군사력 보강으로 나타나고 있다. 일본의 군국주의 부활이 공공연히 거론되고 있고, 푸틴의 `강한 러시아`도 파장을 일으킬 수 있다. 전 세계 군사비 중 약 60%를 차지하는 국가들이 벌이고 있는 이 군비 경쟁은 민족주의 바람을 타고 동아시아 도서분쟁들에 언제든 점화할 위험을 안고 있다.

 

더욱이 동아시아에는 기존 세력 미국과 굴기 세력 중국 간의 긴장이 상승곡선을 그리고 있다. 고대 그리스 역사가의 분석에 따른 가설 `투키디데스 함정`에 의하면 기존 세력과 신흥 세력 간 긴장과 대립은 전쟁으로 치달은 경우가 훨씬 많다. 동북아에서는 한반도가 그런 전쟁의 시발지이거나 현장이 되어 왔다.

 

우리는 이런 정세 추이를 직시하면서 일본이 과거를 각성하도록 긴 호흡으로 조여 나가는 한편 동북아가 투키디데스 함정에 빠지지 않게 하는 장치를 만드는 데 앞장서야 한다. 당장의 방안은 동북아 다자안보 대화기구와 한ㆍ중ㆍ일 자유무역체제를 수립하는 것이다.

 

동북아 구성원의 절대 다수가 일본의 청산되지 않은 과거에 불만을 갖고 있다. 다자대화의 일원으로서 일본은 과거로의 회귀를 자제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또 일본의 미래세대로 하여금 지역협력체의 온전한 일원이 되기 위해서는 어떤 역사 인식이 필요한지를 알게 하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

 

동북아 다자안보 대화기구는 6자회담에 실무위원회가 설치돼 있으므로 이를 격상, 발전시켜 나가면 된다. 9ㆍ19 공동성명의 핵심요소인 북핵 폐기, 한반도 평화체제, 다자안보대화는 모두 직ㆍ간접적 상관관계에 있는 만큼 한국이 6자회담 복원을 위한 구심력을 발휘해야 할 것이다. 한ㆍ중ㆍ일 자유무역협정(FTA)을 포함한 지역 경제공동체도 역내 갈등 완화 효과를 고려해 각국의 미시적 손익계산보다 거시 정치ㆍ경제적 시각에서 발전되도록 해야 한다. 강대국 간 대화와 협상은 서로 거북스러운 속성이 있으므로 이들 간의 조화를 촉진시키는 역할은 한국의 적절한 몫이다.

 

동북아에 드리운 어두운 세 그림자의 결합을 끊고, 공동의 평화와 번영을 구축할 외교를 작동시켜야 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집단적 감성이 아니라 결집된 이성이다.

 

※ 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송민순 전 외교통상부 장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