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고구려와 선비(鮮卑)의 관계

상 상 2012. 6. 16. 18:14

 

글의 순서

 

1. 고구려와 선비(鮮卑)의 관계

2. 고구려와 선비(鮮卑)의 관계 기록

 

 

1. 고구려와 선비(鮮卑)의 관계

 

고구려는 일찍부터 선비(鮮卑)를 속국으로 삼았다.(유리왕 때)

그리고 그 후 고구려는 종노릇을 하는 선비를 동원하여 전쟁에 나섰다.

 

선비는 원래 중국 종족이 아니다.

그러나 나중에 선비족은 전연을 세워 중원에 진출하고 후연이 또한번 중원을 확보했으며

북위를 세워 화북을 통일하고 서위 북주를 세워 또한번 화북을 통일하더니 

수나라를 세워 드디어 중국을 통일한다. 그 뒤를이어 당나라를 세워 중국을 호령한다.

이로써 중국의 주인이 된 종족이다.  

 

선비(鮮卑)의 정체는 정확하지 않다.

삼국지를 쓴 진수가 「옛날에 오환과 선비는 동호라고 불렀다.」라고 하는 바람에

사기 흉노 열전에 있는 동호가 묵둘 선우에게 패한 일을 연결시켰고

그래서 동호의 일종인 선비는 묵돌 선우에게 패하여 선비산으로 달아나 종족을 보전했다고 해서 선비족으로 불렀다고 하는데

내가 보기에는 이는 정확한 이야기가 아닌 것 같다.

 

진수가 삼국지를 쓴 것은 265년~297년 사이이고 동호가 묵돌 선우에게서 패한 것은 서기전 210년 경이다.

사기집해의 주에 의하면 묵돌 선우가 즉위한 해가 서기전 210년 이다.

즉, 진수가 약 500년 전의 일을 어떻게 알고 오환과 선비가 동호라고 단정했는지 알수 없고

동호가 오환 선비인지 그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진수는 그가 살기 전 부터 오환 선비가 흉노의 동쪽에 살았기 때문에 동호라고 그냥 부른 것 으로 보인다.

 

그러나 호(胡)란 사마천이 쓴 사기에 많이 등장하는 명칭인데 보통 흉노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리고 동호(東胡)란 흉노의 동쪽에 거주하는 종족을 가리키는 말로써

한나라 초기 흉노의 동쪽에 있었던 종족은 고조선이기 때문에 단재선생께서는 동호를 고조선이라고 하셨다.

 

결국 묵돌 선우에게 패한 동호가 오환 선비라는 증거는 없다.

즉 오환 선비가 언제부터 흉노의 동쪽에 살았는지는 명확하지가 않다.

 

선비족은 하나의 부족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여러 부족이 있다.

대표적인 것이 모용부, 탁발부, 우문부, 걸복부, 독발부. 단부 등이다.

모용부는 전연 후연 남연 북연을 세웠고, 탁발부는 북위, 우문부는 서위 북주, 걸복부는 서진, 독발부는 남량을 세웠다.

 

이중에서 고구려에게 속국이 된 부족은 모용부로 생각된다.

왜냐하면 선비 모용부는 활동을 시작한 기록이 238년 6월부터 나오는데 그때는 산상왕이 내분을 일으켜

받아들였던 호(胡)가 고구려를 배반하고 떠났다는 209년 10월 경으로부터 불과 30년이 지난 시기이기 때문이며,

처음 정착한 지역도 고구려와 지역적으로 제일 가까운 요서이기 때문이고,

가장 어려웠을 때인 북연때를 보면 고구려에게 도움을 요청하였고 결국 다시 돌아온 곳도 바로 고구려이기 때문이다

 

 

2. 고구려와 선비족의 관계 기록

 

< 삼국사기 고구려 제2대 유리명왕 본기 >

 

11년(서기전 9) 여름 4월에 왕은 여러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선비(鮮卑)는 [지세가] 험한 것을 믿고 우리와 화친하지 않으면서,

이로우면 나와서 노략질하고 불리하면 들어가 지키니 나라의 근심거리가 된다.

만약 이들을 굴복시킬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장차 그에게 후한 상을 줄 것이다.”

 

부분노(扶芬奴)가 나와서 아뢰었다.

“선비는 [지세가] 험하고 굳은 나라이고 사람들이 용감하나 어리석으므로,

힘으로 싸우기는 어렵고 꾀로 굴복시키기는 쉽습니다.”

왕은 “그러면 어찌하면 좋은가?”고 물었다.

 

[부분노가] 대답하였다.

“사람을 시켜 배반한 것처럼 해서 저들에게 들어가 거짓으로

‘우리나라는 작고 군대가 약하고 겁이 많아서 움직이기 어렵다.’고 말하게 하십시오.

그러면 선비는 필시 우리를 업신여기고 대비하지 않을 것입니다.

 

신은 그 틈이 생기는 것을 기다렸다가 정예 군사를 이끌고

사잇길로 가서 수풀에서 그 성을 엿보겠습니다.

 

왕께서 약한 군사를 시켜 그 성 남쪽으로 나가게 하면

그들이 반드시 성을 비우고 멀리 쫓아올 것입니다.

 

[그때] 신이 정예 군사로 그 성으로 달려 들어가고

왕께서 친히 용맹스런 기병을 거느리고 협공을 하면 이길 수 있습니다.”

 

왕은 그 말에 따랐다. 선비(鮮卑)가 과연 문을 열고 군대를 내어 뒤쫓았다.

부분노는 군사를 거느리고 그 성으로 들어가니 선비가 그것을 보고 크게 놀라

되돌아 달려왔다.

 

부분노는 관문을 지키며 막아 싸워 매우 많은 [적을] 목베어 죽였다.

왕은 깃발을 세우고 북을 울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선비가 앞뒤로 적을 맞이하게 되자 계책이 다하고 힘이 꺾였으므로

항복하여 속국이 되었다.

 

왕은 부분노의 공을 생각하여 식읍(食邑)을 상으로 주었으나,

[부분노는] 사양하면서 말하기를

“이것은 왕의 덕입니다. 신에게 무슨 공이 있습니까?”라고 하고는 결국 받지 않았다.

그래서 왕은 황금 30근과 좋은 말 10필을 내려주었다.

위 기록에 관하여

 

내용으로 보아 우리측 사료인 구삼국사 또는 해동고기 등에서 가져온 내용이므로

중국측 사료에는 그 내용이 없었을 것이다.

 

 

< 삼국사기 고구려 제6대 태조대왕 본기 >

 

69년(121) 여름 4월에 왕은 선비 8천 명과 함께 가서 요대현(遼隊縣)을 쳤다.

 

위 기록에 관하여

 

< 후한서 동이열전 고구려전 >

건광(建光) 원년(元年: 121년)

여름에 (태조대왕이) 다시 요동(遼東)의 선비(鮮卑)[족(族)] 8천여명과 함께

요대(遼隊)[현(縣)]을 침공하여 관리와 민간인을 죽이고 약탈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