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의 차례
1. 고구려와 후한(後漢)의 관계 2. 고구려와 후한(後漢)의 관계 기록
1. 고구려와 후한(後漢)의 관계
고구려와 후한은 서로 공격을 주고 받은 관계이다. 요동과 현도를 차지하기 위한 고구려의 공격이 많았다.
특히 고구려는 제5대 모본왕 때 후한의 땅을 깊숙이 쳐들어갔다. 북평(北平: 당산시)·어양(漁陽: 북경시)·상곡(上谷: 창평)·태원(太原: 산서성 태원시)까지 쳤다. 이어서 제6대 태조대왕 3년(서기 55년)에는 요서까지 고구려의 영역으로 확보하고 요서에 10개성을 쌓았다. 그러나 태조대왕 53년(서기 105년)부터는 밀려서 요동과 현도를 차지하려는 싸움을 벌렸다.
서로 공격을 주고받은 관계이니 무슨 책봉이니 이런 것이 없었다. 무슨 광무제가 고구려의 왕호를 회복시켰다는 소리는 그들의 상투적인 수작이다. 그들이 왕호를 쓰라고 해서 왕이라고 한것도 아니고 왕호를 쓰지 말라고 해서 왕이라고 못한 것도 아니다. 고구려 스스로 왕이라고 칭한 것이지 그들과는 아무상관이 없는것이다. 그러한 말은 그들이 스스로 천하의 주인인 양 착각하고 아무한테나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있다는 망상에 빠져 제멋대로 지껄인 것에 불과하다. 천하의 주인은 자기네들이 아니라 힘있는 자가 주인이다. 광무제가 고구려를 힘으로 꺾은 일도 없는데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젖먹이 아기들에서 보이는 자기 중심적 사고에서 나온 것이지 별 다른 것이 아니다. 그런 착각을 하다가 송나라는 황제라는 자가 둘씩이니 금나라에 끌려가 개죽음을 당하였고 황후와 처첩들은 무자비한 강간을 당한 것이다. 원나라 때는 송나라의 황제라는 작자들은 물론 일반 백성까지 초야권을 몽골족에게 바쳐야 했다. 뭐 청나라에게 당한 것, 요나라에게 당한 것, 흉노에게 당한 것 등등 이루 헤아릴수 없이 중국인(한족)이 처참하게 당한 것은 바로 위와같은 착각에서 비롯되었고, 돼먹지 않은 태도에 기인한 것이며 그들의 고통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또한번 못박아 말한다면 종속이니 지방정권이니 하는 말은 그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
2. 고구려와 후한(後漢)의 관계 기록
< 삼국사기 고구려 제3대 대무신왕 본기 >
11 년 (AD 28) : 7월에 한나라의 요동 태수가 쳐들어 왔다. [번역문]11년(서기 28) 가을 7월에 한나라의 요동(遼東) 태수(太守)가 군사를 거느리고 쳐들어 왔다. 왕은 여러 신하를 모아 싸우거나 지키는 계책을 물었다.
우보 송옥구가 말하였다. “신이 듣기를, 덕을 믿는 자는 번창하고, 힘을 믿는 자는 망한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중국이 흉년이 들어서 도적이 벌같이 일어나는데 명분없이 군대를 출동시켰습니다. 이것은 임금과 신하들이 결정한 책략이 아니라, 필시 변방 장수가 이익을 노려 멋대로 우리나라를 침략하는 것일 것입니다. 하늘을 거역하고 인심에 어긋나므로 그 군대는 반드시 성공할 수 없을 것입니다. 험한 곳을 의지하여 기발한 계책을 내면 반드시 깰 수 있습니다.”
좌보 을두지가 말하였다. “작은 적은 강해도, 큰 적에게 잡히는 법입니다. 신은 대왕의 군사와 한나라의 군사를 비교하여 어느 쪽이 더 많을지 생각해 봅니다. [그들을] 꾀로는 칠 수 있지만 힘으로는 이길 수 없습니다.”
왕은 “꾀로 친다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인가?”고 물었다. [을두지가] 대답하였다. “지금 한나라의 군사들이 멀리 와서 싸우므로 그 예봉을 당할 수 없습니다. 대왕께서는 성을 닫고 굳게 지키다가 그 군사들이 피로해지기를 기다려, 나가서 공격하면 될 것입니다.”
왕은 그렇게 여기고 위나암성으로 들어가 수십일 동안 굳게 지켰다. 한나라 군사들이 포위하여 풀어주지 않았다. 왕은 힘이 다하고 병사들이 피로하므로 을두지에게 “형편이 지킬 수 없게 되어가니 어찌하면 좋은가?” 하고 물었다. [을]두지가 대답하였다. “한나라 사람들은 우리 땅이 돌로 되어서 물나는 샘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 때문에 오래 포위하고 우리가 곤핍해지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연못의 잉어를 잡아 수초에 싸서 맛있는 술 약간과 함께 한나라 군사들에게 보내 먹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왕은 그 말을 따라 하면서 글을 보내었다. “과인이 우매하여서 상국에 죄를 얻어, 장군으로 하여금 백만 군대를 거느리고 우리 국경에서 이슬을 맞게 하였습니다. 후의를 감당할 길 없어서 보잘 것 없는 물건을 부하들에게 제공하려고 합니다.”
이리하여 한나라 장수는 성 안에 물이 있으므로 단번에 함락시킬 수 없다고 생각하고 대답하였다. “우리 황제께서는 신을 둔하다고 하지 않고 군대를 출동하도록 영을 내려 대왕의 죄를 물었습니다. 국경에 다다른 지 열흘이 지났으나 요령을 얻지 못하였는데, 이제 [보내]온 [글의] 뜻을 들으니, 말씨가 공순하므로 어찌 이대로 황제께 아뢰지 않겠습니까?” 마침내 군사를 이끌고 물러갔다.
15년(서기 32)12월에 사신을 한(漢)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광무제(光武帝)가 고구려의 왕호를 회복시켰다. 이 때가 건무(建武) 8년이었다.
27년(서기 44) 가을 9월에 한나라 광무제가 군대를 보내 바다를 건너 낙랑을 정벌하고, 그 땅을 빼앗아 군현으로 삼았으므로, 살수(薩水) 이남이 한나라에 속하게 되었다.
< 삼국사기 고구려 제4대 민중왕 본기 >
4년(서기 47) 겨울 10월에 잠지락부(蠶支落部)의 대가(大家) 대승(戴升) 등 1만여 가(家)가 낙랑으로 가서 한나라에 투항하였다. <후한서(後漢書)에는 『대가(大加) 대승(戴升) 등 만여 구(口)』라고 하였다.>
<삼국사기 고구려 제5대 모본왕 본기 >
2년(서기 49) 봄에 장수를 보내 한나라의 북평(北平)·어양(漁陽)·상곡(上谷)·태원(太原)을 쳤으나, 요동태수 제융(祭肜)이 은혜와 신뢰로 대우하였으므로 다시 화친하였다.
< 삼국사기 고구려 제6대 태조대왕 본기 >
3년(서기 55) 봄 2월에 요서(遼西)에 10성을 쌓아 한나라 군사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53년(105) 왕은 장수를 보내 한나라의 요동에 들어가 여섯 현을 약탈하였다. 태수 경기(耿夔)가 군사를 내어 막으니, 우리 군사가 크게 패하였다. 가을 9월에 경기가 맥인(貊人)을 격파하였다.
57년(109) 봄 정월에 사신을 한나라에 보내 안제(安帝)가 원복(元服)을 입은 것을 축하하였다.
59년(111) 사신을 한나라에 보내 토산물을 바치고 현도(玄菟)에 복속하기를 구하였다. <통감(通鑑)에 이르기를 『이해 3월에 고구려 왕이 예맥과 함께 현도를 쳤다.』고 하였으므로, 혹 속하기를 구하였는지 또는 침략했는지 알 수 없다. 하나는 잘못일 것이다.>
66년(118) 봄 2월에 지진이 일어났다. 여름 6월에 왕은 예맥과 함께 한나라의 현도를 치고 화려성(華麗城)을 공격하였다.
69년(121) 봄에 한나라의 유주(幽州) 자사(刺史) 풍환(馮煥), 현도태수 요광(姚光), 요동태수 채풍(蔡諷)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침략해 와서 예맥의 우두머리를 쳐서 죽이고 병마와 재물을 모두 빼앗아 갔다. 왕은 이에 아우 수성(遂成)을 보내 군사 2천여 명을 거느리고 풍환, 요광 등을 역습하게 하였다. 수성은 사신을 보내 거짓 항복하였는데 풍환 등이 이것을 믿었다. 수성은 그에 따라 험한 곳에 자리잡고 대군을 막으면서, 몰래 3천 명을 보내, 현도·요동 두 군을 공격하여 성곽을 불사르고 2천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여름 4월에 왕은 선비 8천 명과 함께 가서 요대현(遼隊縣)을 쳤다. 요동태수 채풍이 군사를 거느리고 신창(新昌)으로 나와 싸우다가 죽었다. 공조연(功曹掾) 용단(龍端), 병마연(兵馬掾) 공손포(公孫酺)가 몸으로 채풍을 [보호하여] 막았으나 모두 진영에서 죽었으며, [이때] 죽은 자가 100여 명이었다.
12월에 왕은 마한(馬韓), 예맥의 1만여 기병을 거느리고 나아가 현도성을 포위하였다. 부여왕이 아들 위구태(尉仇台)를 보내 군사 2만 명을 거느리고 와서, 한나라 군사와 힘을 합쳐 싸웠으므로 우리 군대가 크게 패하였다.
70년(122)에 왕은 마한, 예맥과 함께 요동을 쳤다. 부여왕이 군사를 보내 [요동을] 구하고 [우리를] 깨뜨렸다.
72년(124) 겨울 10월에 사신을 한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94년(서기 146년) 가을 8월에 왕은 장수를 보내 한나라 요동의 서안평현(西安平縣)을 쳐서, 대방령(帶方令)을 죽이고 낙랑태수의 처자를 사로잡았다.
<후한서에 이렇게 쓰여 있다. 『안제(安帝) 건광(建光) 원년(121)에 고구려 왕 궁이 죽어 아들인 수성이 왕위에 올랐다. 현도태수 요광이 아뢰기를 ‘그들이 상(喪) 당한 것을 타서 군사를 내어 공격하려고 합니다.’고 하니, 의논하던 자들이 모두 허락할 만하다고 여겼다.
상서(尙書) 진충(陳忠)이 말하였다. ‘궁이 전날에 교활하게 굴 때에는 [요]광이 토벌하지 못하다가 죽은 다음에 공격하는 것은 의가 아닙니다. 마땅히 사람을 보내 조문하고 이전의 죄를 책망하되 용서하여 죽이지 말고 뒤에 잘되는 쪽을 택하여야 할 것입니다.’
안제가 그 말을 따랐다. 다음 해에 수성은 한나라의 산 포로를 돌려보냈다.』
< 삼국사기 고구려 제8대 신대왕 본기 >
4년(168)에 한나라 현도태수 경림(耿臨)이 침략해 와서 우리 군사 수백 명을 죽였다. 왕은 스스로 항복하여 현도에 복속되기를 빌었다.
5년(169) 왕은 대가 우거(優居), 주부(主簿) 연인(然人) 등을 보내 군사를 거느리고, 현도태수 공손도(公孫度)를 도와 부산적(富山賊)을 토벌하였다.
8 년 (AD 172) : 한나라가 군사를 거느리고 쳐들어 왔다. [번역문] 8년(서기 172년) 겨울 11월에 한나라가 많은 군사를 거느리고 우리나라로 쳐들어 왔다. 왕은 여러 신하들에게 싸우는 것과 지키는 것 중 어느 쪽이 나은지를 물으니, 모두 의논하여 말하였다.
“한나라 군대가 수가 많은 것을 믿고 우리를 가볍게 여길 것이니, 만약 나아가 싸우지 않으면 그들은 우리를 비겁하다고 여겨서 자주 올 것입니다. 또 우리 나라는 산이 험하고 길이 좁아, 이것은 소위 「한 사람이 관(關)을 지키면 만 사람이 당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한나라 군사가 비록 수가 많으나 우리를 어떻게 할 수 없을 것이니, 군대를 내어서 막기를 청합니다.”
[명림]답부가 대답하였다. “그렇지 않습니다. 한나라는 나라가 크고 백성이 많은데 지금 강병을 거느리고 멀리 와서 싸우려고 하므로 그 기세를 당할 수 없습니다. 또 군사가 많은 자는 의당 싸워야 하고, 군사가 적은 자는 의당 지켜야 하는 것이 병가의 상식입니다. 지금 한나라 사람들이 군량을 천 리나 옮겼기 때문에 오래 견딜 수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도랑을 깊이 파고 보루를 높이며 들을 비워서 대비하면, 그들은 반드시 만 한 달을 넘기지 못하고 굶주리고 곤핍해져서 돌아갈 것입니다. [그때] 우리가 날랜 군사로 치면 뜻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왕은 그렇다고 생각해서 성을 닫고 굳게 지켰다. 한나라 사람들이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사졸들이 굶주리므로 이끌고 돌아갔다.
[명림]답부는 수천의 기병을 거느리고 뒤쫓아 가서 좌원(坐原)에서 싸웠는데, 한나라 군대가 크게 패하여 한 필의 말도 돌아가지 못하였다. 왕은 크게 기뻐하고 [명림]답부에게 좌원과 질산을 식읍으로 주었다.
< 삼국사기 고구려 제9대 고국천왕 본기 >
0 년 (AD 179) : 고국천왕이 왕위에 올랐다. [번역문] 고국천왕(故國川王), <혹은 국양- 國襄 이라고도 한다>의 이름은 남무(男武)이다. <혹은 이이모(伊夷謨)라고도 하였다.> 신대왕 백고의 둘째 아들이다. 백고가 죽자, 나라 사람들은 맏아들 발기(拔奇)가 불초하였으므로 함께 이이모를 세워 왕으로 삼았다.
한나라 헌제(獻帝) 건안(建安) 초에 발기가 형으로서 왕이 되지 못한 것을 원망하여 소노가(消奴加)와 함께 각각 하호(下戶) 3만여 명을 거느리고 공손강(公孫康)에게 가서 항복하고, 돌아와 비류수 가에 머물렀다.
6년(서기 184년) 한나라 요동태수가 군대를 일으켜 우리를 쳤다. 왕은 왕자 계수(罽須)를 보내 막았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왕은 친히 날랜 기병을 거느리고 가서 한나라 군대와 좌원에서 싸워서 이겨 벤 머리가 산처럼 쌓였다.
19년(서기 197년)에 중국에서 큰 난리가 일어나 한나라 사람들이 난리를 피하여 투항해 오는 자가 심히 많았다. 이 때가 한나라 헌제 건안 2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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