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북위에서 활약한 또하나의 고구려인, 고숭(高崇)

상 상 2012. 5. 8. 18:44

 

고숭(高崇) 열전(위서 권77, 열전 제65).

 

차례

 

1. 고숭(高崇) 열전

2. 고숭(高崇) 열전 원문

3. 여태까지 소개한 북위에서 활약한 고구려 사람

4. 고숭(高崇) 열전 원문(전문)

 

 

1. 고숭(高崇) 열전

 

고숭(高崇)의 자는 적선인데 발해 수(현) 사람이다.

※참고

 

그런데 이러한 표현은 고조(高肇)와 마찬가지이다.

고조(高肇)역시 자기 스스로 발해 수(현) 사람이라고 하였지만

(고조, 열전 원문: 自云本勃海蓨人)

 

자치통감을 보면 고구려 사람이라고 명확하게 적시하고 있다.

중국 사서에서 발해 사람(발해인)이라거나 발해 수(현) 사람이라는 표현은

십중팔구, 고구려 사람을 뜻한다.

 

 

(고숭의) 4대조 (고)무(撫)가 진나라 영가 연간(307년 ~ 312년)에

형 (고)고(顧)와 함께 난리를 피하여 고구려로 달아났다.

※ 참고

 

여기에 나오는 고고(高顧)는 고조(高肇) 열전에 나오는

『고조(高肇) 5대조인 고고(高顧)가 진(晉)나라 영가(永嘉) 연간(307년 ~ 312년)에

난리를 피하여 고구려로 들어갔다.(원문: 五世祖顧,晉永嘉中避亂入高麗。)』는

바로 그 사람이다.

 

즉, 고숭(高崇)의 4대조 고무(高撫)는 고조(高肇)의 5대조 고고(高顧)의 동생이다.

따라서 고조(高肇)가 고구려 사람이므로 고숭(高崇) 역시 고구려 사람이다.

 

또한, 고숭(高崇)의 4대조 고무(高撫)와 그의 형이자

고조(高肇) 5대조인 고고(高顧)는 함께, 같이, 동시에 고구려에 들어왔음을 알수 있다. 

 

 

고숭(高崇)의 아버지 (고)잠(潛)은 현조(顯祖: 북위 5대 헌문제) 초(465~467년?)에 북위로 들어가,

개양남(開陽男)의 작위를 받고 요동에 살았다.

조서로 저거목건(沮渠牧犍)의 딸을 고잠(高潛)의 처로 주고, (딸을) 무의공주로 봉하며

(고잠에게) 부마도위를 배수하고 영원장군을 더하였다. 죽었다.

 

※ 참고

 

고조(高肇)의 아버지 고양(高颺)이 고조(高祖: 6대 효문제) 초(471년~473년?)에 북위에 들어

갔으므로 고숭(高崇) 일가는 고조(高肇) 일가보다 약 6년 정도 빨리 북위에 들어갔음을 알 수 있음.

 

즉, 고구려에 들어올 때는 같이 동시에 들어왔지만 북위로 갈때는 고숭 일가가 먼저 북위로 갔음을 알 수 있다.  

 

 

 

 

(고)숭은 어릴때 총명했고 단정 근실함으로 이름이 났다.

(고숭의) 됨됨이가 중산(벼슬 이름)이 되고 벼슬이 차츰차츰 상서삼공랑으로 올라갔다.

집안 재산이 넉넉하여 부유하고 동복(어린 종)이 천여 명이었지만,

(고)숭의 의지는 늘 검소하여 수레와 말 기물과 옷을 직분에 맞는 것에 그쳤다.

스스로 깨끗이하고 탐욕하지 않았다.

 

애초에 (고)숭의 외가가 사건에 연좌되어 주살되니,

(고숭의 어머니인) 공주가 친정의 자손이 끊어짐을 괴로워하여

마침내 (고)숭이 목건(牧犍)의 뒤를 잇고 성을 저거(沮渠)로 고쳤다.

 

경명 연간에(500년~503년) 본래의 성을 회복하고,

(아버지의) 작위를 이어받아 영 군장사 복파장군 낙양령(領軍長史 伏波將軍 洛陽令)이 되었다.

정치를 깨끗하고 결단있게 하여 백성으로 하여금 그 위풍에 경외심을 갖게 하고

매사에 시작하면 끝을 맺음(발적:發摘)이 있어 피하지 않고 강하게 대처하여 현내(縣內)가 고요하고 엄숙해졌다

조정에 자리가 있어 임명받아 옮겼는데 회병(會病)으로 죽으니 나이 37세였다.

어양태수를 추증하였다.

영안 3년(530년) 정로장군 창주자사로 덧붙여 추증하였으며 시호를 일성이라고 하였다.

 

.........(이하의 글, 생략)...................

 

※ 참고

 

고숭의 아들이 겸지(謙之) 공지(恭之) 근지(謹之) 신지(愼之)가 있는데

 

겸지(謙之): 겸지의 자는 도양(謙之字道讓)

공지(恭之):겸지의 아우는 공지인데 자는 도목(謙之弟恭之,字道穆)

근지(謹之): 도목의 아우는 근지(道穆弟謹之)

신지(慎之): 근지의 아우는 신지인데 자는 도밀(謹之弟慎之,字道密。)

 

이중에서 둘째 아들 공지(恭之)가 유명하여 공지(恭之)의 자(字)인 도목(道穆)으로

북사 권 제50, 열전 제38에 고도목(高道穆) 열전이 또 있음.

 

(볼 수 있는 곳: http://zh.wikisource.org/wiki/%E5%8C%97%E5%8F%B2 )

 

 

 

 

2. 고숭 열전 원문

 

출처:http://zh.wikisource.org/w/index.php?title=魏書/卷77&oldid=37140

 

魏書/卷77

列傳第六十五, 宋翻 辛雄 羊深 楊機 高崇

 

高崇,字積善,勃海蓨人。四世祖撫,晉永嘉中與兄顧避難奔於高麗。父潛,顯祖初歸國,

賜爵開陽男,居遼東,詔以沮渠牧犍女賜潛為妻,封武威公主。拜駙馬都尉,加寧遠將軍,卒。

崇少聰敏,以端謹見稱。徵為中散,稍遷尚書三公郎。家資富厚,僮僕千餘,而崇志尚儉素,車馬器服,充事而已。

自修潔,與物無競。初崇舅氏坐事誅,公主痛本生絕胤,遂以崇繼牧犍後,改姓沮渠。

景明中,啟復本姓,襲爵,遷領軍長史、伏波將軍、洛陽令。

為政清斷,吏民畏其威風,每有發摘,不避強禦,縣內肅然。朝廷方有遷授,會病卒,年三十七。贈漁陽太守。

永安二年,復贈征虜將軍、滄州刺史,諡曰成。

.............(이하의 글, 생략)................

 

 

 

3. 여태까지 소개한 북위에서 활약한 고구려 사람

 

1) 문소황태후: 북위 7대 선무제(세종)의 어머니, 고조(高肇)의 여동생

2) 고조(高肇): 북위 선무제 때의 핵심 권력자, 상서령과 신하로써 최고의 직위, 삼공(三公) 중의 하나인 사도를 지냄.

               문소황태후의 셋째 오빠

3) 고양(高颺): 고조(高肇)의 아버지, 여위장군(厲威將軍) 역임. 자녀가 4남 3녀임

               아들을 차례대로 열거하면 고곤(高琨), 고언(高偃), 고조(高肇), 고현(高顯)이며 딸 중에 한 명이 문소황태후 임.

4) 고승신(高乘信): 고양(高颺)의 동생, 명위장군(明威將軍) 역임.

5) 고곤(高琨): 고조의 큰 형, 일찍 죽었음.

6) 고언(高偃): 고조의 둘째 형, 딸이 선무황후임. 자가 중유(仲游)이며, 태화(太和) 10년(486)에 죽었음.

               시호를 장후(莊侯)라고 하였음.

7) 고현(高顯): 고조의 막내동생. 시중 고려국대중정(侍中高麗國大中正)이 되었으며, 일찍 죽었음.

8) 선무황후: 북위 선무제의 황후(아내). 고언(고조의 둘째 형)의 딸. 고조의 여조카. 문소황태후의 여조카이며 며느리.

9) 고맹(高猛): 고곤(고조의 큰 형)의 아들. 선무제의 친 여동생 장락공주(長樂公主)에게 장가들어 부마도위가 되고

               권력의 핵심인 상서령을 역임하였으며, 외직으로 나가서 옹주자사, 내직으로 들어와서는 전중상서가 되었음.

10) 고식(高植): 고조의 아들. 중서시랑(中書侍郞)에서 승진하여 제주 자사(濟州刺史)가 됨.

                이어서 청、상、삭、항, 사주(四洲) 자사를 역임.

 

 

 

4. 원문(전문)

 

< 원 문 >

출처:http://zh.wikisource.org/w/index.php?title=魏書/卷77&oldid=37140

 

魏書/卷77

열전 제65(列傳第六十五) 宋翻 辛雄 羊深 楊機 高崇

 

高崇,字積善,勃海蓨人。四世祖撫,晉永嘉中與兄顧避難奔於高麗。父潛,顯祖初歸國,

賜爵開陽男,居遼東,詔以沮渠牧犍女賜潛為妻,封武威公主。拜駙馬都尉,加寧遠將軍,卒。

崇少聰敏,以端謹見稱。徵為中散,稍遷尚書三公郎。家資富厚,僮僕千餘,而崇志尚儉素,

車馬器服,充事而已。自修潔,與物無競。初崇舅氏坐事誅,公主痛本生絕胤,遂以崇繼牧犍後,改姓沮渠。景明中,啟復本姓,襲爵,遷領軍長史、伏波將軍、洛陽令。為政清斷,吏民畏其威風,每有發摘,不避強禦,縣內肅然。朝廷方有遷授,會病卒,年三十七。贈漁陽太守。永安二年,復贈征虜將軍、滄州刺史,諡曰成。初崇謂友人曰:「仲尼四科,德行為首。人能立身約己,不忘典訓,斯亦足矣。故吾諸子。闕」

 

  子謙之,。少事後母李以孝聞,李亦撫育過於己生,人莫能辨其兄弟所出同異。論者兩重之。及長,屏絕人事,專意經史,天文算曆、圖緯之書,多所該涉,日誦數千言,好文章,留意老易。襲爵,釋褐奉朝請,加宣威將軍,轉奉車都尉、廷尉丞。

 

  正光中,尚書左丞元孚慰勞蠕蠕,反被拘留。及蠕蠕大掠而還,置孚歸國。事下廷尉,卿及監以下謂孚無坐,惟謙之以孚辱命,□以流罪。尚書同卿執,詔可謙之奏。

 

  孝昌初,行河陰縣令。先是,有人囊盛瓦礫,指作錢物,詐市人馬,因逃去。詔令追捕,必得以聞。謙之乃偽枷一囚立於馬市,宣言是前詐市馬賊,今欲刑之。密遣腹心察市中私議者。有二人相見忻然曰:「無復憂矣。」執送按問,具伏盜馬,徒黨悉獲。并出前後盜竊之處,資貨甚多,遠年失物之家,各來得其本物。具以狀奏。尋詔除寧遠將軍,正河陰令。在縣二年,損益治體,多為故事。弟道穆為御史,在公亦有能名,世美其父子兄弟並著當官之稱。

 

  舊制,二縣令得面陳得失,時佞幸之輩惡其有所發聞,遂共奏罷。謙之乃上疏曰:「臣以無庸,謬宰神邑,實思奉法不撓,稱是官方,酬朝廷無貲之恩,盡人臣守器之節。但豪家支屬,戚里親媾,縲紲所及,舉目多是,皆有盜憎之色,咸起怨上之心。縣令輕弱,何能克濟。先帝昔發明詔,得使面陳所懷。臣亡父先臣崇之為洛陽令,常得入奏是非,所以朝貴斂手,無敢干政。近日以來,此制遂寢,致使神宰威輕,下情不達。今二聖遠遵堯舜,憲章高祖。愚臣望策其駑蹇,少立功名。乞新舊典,更明往制。庶姦豪知禁,頗自屏心。」詔曰:「此啟深會朕意,付外量聞。」

 

  謙之又上疏曰:

 

    臣聞夏德中微,少康成克復之主;周道將廢,宣王立中興之功。則知國無常安,世無恒弊,唯在明主所以變之有方,化之有道耳。

 

    自正光已來,邊城屢擾,命將出師,相繼於路,軍費戎資,委輸不絕。至如弓格賞募,咸有出身;槊刺斬首,又蒙階級。故四方壯士,願征者多,各各為己,公私兩利。若使軍帥必得其人,賞勳不失其實,則何賊不平,何征不捷也!諸守帥或非其才,多遣親者妄稱入募,別倩他人引弓格,虛受征官。身不赴陳,惟遣奴客充數而已,對寇臨敵,曾不彎弓。則是王爵虛加,征夫多闕,賊虜何可殄除,忠貞何以勸誡也?且近習、侍臣、戚屬、朝士,請託官曹,擅作威福。如有清貞奉法不為回者,咸共譖毀,橫受罪罰。在朝顧望,誰肯申聞?蔽上擁下,虧風壞政。使讒諂甘心,忠讜息義。

 

    況且頻年以來,多有徵發,民不堪命,動致流離,苟保妻子,競逃王役,不復顧其桑井,憚比刑書。〔八〕正由還有必困之理,歸無自安之路。若聽歸其本業,徭役微甄,則還者必眾,墾田增闢,數年之後,大獲課民。今不務以理還之,但欲嚴符切勒,恐數年之後,走者更多,安業無幾。

 

    故有國有家者,不患民不我歸,唯患政之不立,不恃敵不我攻,唯恃吾不可侮。此乃千載共遵,百王一致。且琴瑟不韻,知音改弦更張;騑驂未調,善御執轡成組。諺云:「迷而知反,得道不遠。」此言雖小,可以諭大。陛下一日萬機,事難周覽,元、凱結舌,莫肯明言。臣雖庸短,世受榮祿,竊慕前賢匪躬之義,不避斧鉞之誅,以希一言之益。伏願少垂覽察,略加推採,使朝章重舉,軍威更振,海內起惟新之歌,天下見復禹之績,則臣奏之後,笑入下泉。

 

靈太后得其疏,以責左右近侍。諸寵要者由是疾之,乃啟太后云:「 謙之有學藝,宜在國學,以訓胄子。」詔從之,除國子博士。

 

  謙之與袁翻、常景、酈道元、溫子昇之徒,咸申款舊。好於贍恤,言諾無虧。居家僮隸,對其兒不撻其父母,生三子便免其一,世無髡黥奴婢,常稱俱稟人體,如何殘害。以父舅氏沮渠蒙遜曾據涼土,國書漏闕,謙之乃修涼書十卷,行於世。涼國盛事佛道,為論貶之,因稱佛是九流之一家。當世名士,競以佛理來難,謙之還以佛義對之,竟不能屈。以時所行歷,多未盡善,乃更改元修撰,為一家之法,雖未行於世,議者歎其多能。

 

  於時朝議鑄錢,以謙之為鑄錢都將長史。乃上表求鑄三銖錢曰:

 

    蓋錢貨之立,本以通有無,便交易。故錢之輕重,世代不同。太公為周置九府圜法,至景王時更鑄大錢。秦兼海內,錢重半兩。漢興,以秦錢重,改鑄榆莢錢。至文帝五年,復為四銖。孝武時,悉復銷壞,更鑄三銖,至元狩中,變為五銖。又造赤仄之錢,以一當五。王莽攝政,錢有六等,大錢重十二銖,次九銖,次七銖,次五銖,次三銖,次一銖。魏文帝罷五銖錢,至明帝復立。孫權江左,鑄大錢,一當五百。權赤烏年,復鑄大錢,一當千。輕重大小,莫不隨時而變。

 

    竊以食貨之要,八政為首;聚財之貴,詒訓典文。是以昔之帝王,乘天地之饒,御海內之富,莫不腐紅粟於太倉,藏朽貫於泉府,儲畜既盈,民無困敝,可以寧謐四極,如身使臂者矣。昔漢之孝武,地廣財豐,外事四戎,遂虛國用。於是草萊之臣,出財助國;興利之計,納稅廟堂。市列榷酒之官,邑有告緡之令。鹽鐵既興,錢幣屢改,少府遂豐,上林饒積。外闢百蠻,內不增賦者,皆計利之由也。今群妖未息,四郊多壘,徵稅既煩,千金日費,資儲漸耗,財用將竭,誠楊氏獻說之秋,桑、兒言利之日。夫以西京之盛,錢猶屢改,並行小大,子母相權,況今寇難未除,州郡淪敗,民物凋零,軍國用少,別鑄小錢,可以富益,何損於政,何妨於人也?且政興不以錢大,政衰不以錢小,惟貴公私得所,政化無虧,既行之於古,亦宜效之於今矣。昔禹遭大水,以歷山之金鑄錢,救民之困。湯遭大旱,以莊山之金鑄錢,贖民之賣子者。今百姓窮悴,甚於曩日,欽明之主豈得垂拱而觀之哉?

 

    臣今此鑄,以濟交乏,五銖之錢,任使並用,行之無損,國得其益,穆公之言於斯驗矣。臣雖術愧計然,識非心算,暫充錢官,頗睹其理。苟有所益,不得不言。脫以為疑,求下公卿博議。如謂為允,即乞施行。

 

詔將從之,事未就,會卒。

 

  初,謙之弟道穆,正光中為御史,糾相州刺史李世哲事,大相挫辱,其家恒以為憾。至是,世哲弟神軌為靈太后深所寵任,直謙之家僮訴良,神軌左右之,入諷尚書,判禁謙之於廷尉。時將赦,神軌乃啟靈太后發詔,於獄賜死,時年四十二。朝士莫不哀之。所著文章百餘篇,別有集錄。永安中,贈征虜將軍、營州刺史,諡曰康,又除一子出身,以明冤屈。謙之妻中山張氏,明識婦人也。教勸諸子,從師受業。常誡之曰:「自我為汝家婦,未見汝父一日不讀書。汝等宜各修勤,勿替先業。」

 

  謙之長子子儒,字孝禮。元顥入洛,其叔道穆從駕北巡,子儒後踰河至行宮,莊帝見之,具訪洛中事意,子儒備陳元顥敗在旦夕。帝謂道穆曰:「卿初來日,何故不與子儒俱行?」對曰:「臣家百口在洛,須其經營。且欲其今日之來,知京師後事。」帝曰:「子儒非直合卿本懷,亦大慰朕意。」仍授祕書郎中,轉通直郎。後除安東將軍、光祿大夫、司徒中兵參軍、兼祭酒。襲爵。興和初,除兼殿中侍御史。時四方多有流民,子儒為梁州、北豫、西兗三州檢戶使,所獲甚多。後以公事去官。武定六年卒,時年四十一。

 

  子儒弟緒,字叔宗,明悟好學。謙之常謂人曰:「興吾門者,當是此兒。」及長,涉獵書傳,好文詠。司空行參軍,轉長流參軍。除鎮遠將軍、冀州儀同府中兵參軍,為府主封隆之所賞。隆之行梁州、濟州,引自隨,恒令總攝數郡。武定三年卒,年三十二。

 

  緒弟孝貞,武定中,司徒士曹參軍。

 

  孝貞弟孝幹,司空東閤祭酒。

 

  謙之弟恭之,字道穆,行字於世。學涉經史,非名流俊士,不與交結。幼孤,事兄如父母。每謂人曰:「人生厲心立行,貴於見知,當使夕脫羊裘,朝佩珠玉者。若時不我知,便須退跡江海,自求其志。」

 

  御史中尉元匡高選御史,道穆奏記於匡曰:「道穆生自蓬簷,長於陋巷。頗獵群書,無純碩之德;尚好章詠,乏彫掞之工。雖欲廁影髦徒,班名俊伍,其可得哉?然凝明獨斷之主,雄才不世之君,無藉朽株之資,求人屠釣之下,不牽闇投之誚,取士商歌之中。是以聞英風而慷慨,望雲路而低佪者,天下皆是也。若得身隸繡衣,名充直指,雖謝周生騎上之敏,實有茅氏就鑊之心。」匡大喜曰:「吾久知其人,適欲召之。」遂引為御史。其所糾摘,不避權豪,臺中事物,多為匡所顧問。道穆曾進說於匡曰:「古人有言,罰一人當取千萬人懼,豺狼當道,不問狐狸。明公荷國重寄,宜使天下知法。」匡深然之。

 

  正光中,出使相州。刺史李世哲即尚書令崇之子,〔九〕貴盛一時,多有非法,逼買民宅,廣興屋宇,皆置鴟尾,又於馬埒堠上為木人執節。道穆繩糾,悉毀去之,并發其贓貨,具以表聞。又尒朱榮討蠕蠕,道穆監其軍事,榮甚憚之。還,除奉朝請,俄除太尉鎧曹參軍。

 

  蕭寶夤西征,以道穆為行臺郎中,軍機之事,多以委之。大都督崔延伯敗後,賊勢轉強,屢請益兵,朝廷不許。寶夤謂道穆曰:「非卿一行,兵無益理。」遂令乘傳赴洛。靈太后親問賊勢,道穆具以狀對。太后怒曰:「比來使人皆言賊弱,卿何獨云其強也!」道穆曰:「前使不實者,當是冀陛下恩顏,望霑爵賞。臣既忝使人,不敢虛妄。願令近臣親檢,足知虛實。」事訖當反,遇病不行。

 

  後屬兄謙之被害,情不自安,遂託身於莊帝。帝時為侍中,特相欽重,引居第中,深相保護。俄而,帝以兄事見出。道穆懼禍,乃攜家趣濟陰,變易姓名,往來於東平畢氏,以避時難。

 

  莊帝即位,徵為尚書三公郎中,加寧朔將軍。尋兼吏部郎中,與薛曇尚書使晉陽,〔一0〕授尒朱榮職,賜爵龍城侯。九月,除太尉長史,領中書舍人。遭母憂去職,帝令中書舍人溫子昇就宅弔慰,詔攝本任,表辭不許。三年,加前軍將軍。

 

  及元顥逼虎牢城,或勸帝赴關西者,帝以問道穆,道穆對曰:「 關中今日殘荒,何由可往。臣謂元顥兵眾不多,乘虛深入者,由國家將帥征捍不得其人耳。陛下若親率宿衛,高募重賞,背城一戰,臣等竭其股肱之力,破顥孤軍,必不疑矣。如恐成敗難測,非萬乘所履,便宜車駕北渡,循河東下。徵大將軍天穆合於滎陽,向虎牢;別徵尒朱王軍,令赴河內以掎角之。旬月之間,何往不克。臣竊謂萬全之計,不過於此。」帝曰:「高舍人語是。」其夜到河內郡北,未有城守可依,帝命道穆秉燭作詔書數十紙,布告遠近,於是四方知乘輿所在。除中軍將軍、給事黃門侍郎、安喜縣開國公,食邑千戶。於時尒朱榮欲回師待秋,道穆謂榮曰:「元顥以蕞爾輕兵,奄據京洛,使乘輿飄露,人神恨憤,主憂臣辱,良在於今。大王擁百萬之眾,輔天子而令諸侯,自可分兵河畔,縛筏造船,處處遣渡,徑擒群賊,復主宮闕,此桓文之舉也。且一日縱敵,數世之患,今若還師,令顥重完守具,徵兵天下,所謂養虺成蛇,悔無及矣。」榮深然之,曰:「楊黃門侃已陳此計,當更議決耳。」

 

  及莊帝反政,因宴次謂尒朱榮曰:「前若不用高黃門計,則社稷不安。可為朕勸其酒令醉。」榮對曰:「臣本北征蠕蠕,高黃門與臣作監軍,臨事能決,實可任用。」除征南將軍、金紫光祿大夫、兼御史中尉。尋即真,仍兼黃門。道穆外秉直繩,內參機密,凡是益國利民之事,必以奏聞。諫諍極言,無所顧憚。選用御史,皆當世名輩,李希宗、李繪、陽休之、陽斐、封君義、邢子明、蘇淑、宋世良等四十人。

 

  於時用錢稍薄,道穆表曰:「四民之業,錢貨為本,救弊改鑄,王政所先。自頃以私鑄薄濫,官司糾繩,挂網非一。在市銅價,八十一文得銅一斤,私造薄錢,斤餘二百。既示之以深利,又隨之以重刑,罹罪者雖多,姦鑄者彌眾。今錢徒有五銖之文,而無二銖之實,薄甚榆莢,上貫便破,置之水上,殆欲不沉。此乃因循有漸,科防不切,朝廷之愆,彼復何罪。昔漢文帝以五分錢小,改鑄四銖,至武帝復改三銖為半兩。此皆以大易小,以重代輕也。論今據古,宜改鑄大錢,文載年號,以記其始,則一斤所成止七十六文。銅價至賤五十有餘,其中人功、食料、錫炭、鉛沙,縱復私營,不能自潤。直置無利,自應息心,況復嚴刑廣設也。以臣測之,必當錢貨永通,公私獲允。」後遂用楊侃計,鑄永安五銖錢。

 

  僕射尒朱世隆當朝權盛,因內見衣冠失儀,道穆便即彈糾。帝姊壽陽公主行犯清路,執赤棒卒呵之不止,道穆令卒棒破其車。公主深以為恨,泣以訴帝。帝謂公主曰:「高中尉清直之人,彼所行者公事,豈可私恨責之也。」道穆後見帝,帝曰:「一日家姊行路相犯,極以為愧。」道穆免冠謝曰:「臣蒙陛下恩,守陛下法,不敢獨於公主虧朝廷典章,以此負陛下。」帝曰:「朕以愧卿,卿反謝朕。」尋敕監儀注。又詔曰:「祕書圖籍所在,內典□書,又加繕寫,緗素委積,蓋有年載。出內繁蕪,多致零落。可令御史中尉、兼給事黃門侍郎道穆總集帳目,并牒儒學之士,編比次第。」

 

  道穆又上疏曰:「臣聞舜命皋陶,姦宄是託;禹泣罪人,堯心為念。所以舉直措枉,事切曩賢;明德慎罰,議存先典。高祖太和之初,置廷尉司直,論刑辟是非,雖事非古始,交濟時要。所謂禮樂互興,不相沿襲者矣。臣以無庸,忝當今任,所思報效,未忘寢興。但識謝知今,業慚稽古,未能進一言以利國,說一策以興邦,索米長安,豈不知愧。至於職司其憂,猶望僶俛。竊見御史出使,悉受風聞,雖時獲罪人,亦不無枉濫。何者?得堯之罰,不能不怨。守令為政,容有愛憎。姦猾之徒,恒思報惡,多有妄造無名,共相誣謗。御史一經檢究,恥於不成,杖木之下,以虛為實,無罪不能自雪者,豈可勝道哉。臣雖愚短,守不假器,繡衣所指,冀以清肅。若仍踵前失,或傷善人,則尸祿之責,無所逃罪。所以夙夜為憂,思有悛革。如臣鄙見,請依太和故事,還置司直十人,名隸廷尉,秩以五品,選歷官有稱,心平性正者為之。御史若出糾劾,即移廷尉,令知人數。廷尉遣司直與御史俱發,所到州郡,分居別館。御史檢了,移付司直覆問,事訖與御史俱還。中尉彈聞,廷尉科按,一如舊式。庶使獄成罪定,無復稽寬;為惡取敗,不得稱枉。若御史、司直糾劾失實,悉依所斷獄罪之。聽以所檢,迭相糾發。如二使阿曲,有不盡理,聽罪家詣門下通訴,別加按檢。如此,則肺石之傍,怨訟可息;叢棘之下,受罪吞聲者矣。」詔從之,復置司直。

 

  及尒朱榮之死也,帝召道穆付赦書,令宣於外。因謂之曰:「自今日後,當得精選御史矣。」先是,榮等常欲以其親黨為御史,故有此詔。及尒朱世隆等率其部類戰於大夏門北,道穆受詔督戰,又贊成太府卿李苗斷橋之計,世隆等於是北遁。加衛將軍、假車騎將軍、大都督、兼尚書右僕射、南道大行臺。又除車騎將軍,餘官如故。時雖外託征蠻,而帝恐北軍不利,欲為南巡之計。未發,會尒朱兆入洛,道穆慮禍及己,託病去官。世隆以道穆忠於前朝,遂害之,時年四十二。太昌中,贈使持節、都督雍秦二州諸軍事、車騎大將軍、儀同三司、雍州刺史。

 

  子士鏡,襲爵。為北豫州刺史。高仲密擁入關。

  道穆弟謹之,繼沮渠氏後。卒於滄州平東府主簿,年三十五。贈通直郎。無子。

  謹之弟慎之,字道密。好學,有諸兄風。年二十三,卒,無子,以兄謙之第二子緒繼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