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의 차례
1. 북위의 선무제를 고구려 여인이 낳았다는 근거 2. 선무제의 즉위 과정
1. 북위의 선무제를 고구려 여인이 낳았다는 근거
북위의 제7대 선무제는 문소황태후가 낳은 아들이다. 문소황태후가 바로 고구려 여인이다. 따라서 선무제(세종)는 고구려 여인이 낳은 북위 황제가 된다. (출처: 위서 문소황후 열전, 자치통감, 위서 고조高肇 열전)
2. 선무제의 즉위 과정
선무제(7대 세종)가 제위에 오른 것과 어머니의 핏줄을 만나는 것은 한편의 드라마 같다. 이제부터 그것을 보자(출처: 자치통감 번역본)
선무제는 황태자에서 곧장 황제로 등극한 게 아니다. 선무제 이전에 황태자가 있었다. 바로 탁발순이다.
483년 윤5월 5일에 후궁 임씨가 아들 탁발순을 낳았다. 이때에 그 유명한 풍태후가 탁발순을 태자로 삼고 임씨에게 죽음을 내려서 스스로 탁발순을 기른다.
풍태후는 멀쩡한 황제도 내쫒고 어린애를 황제로 갈아치우는 사람이며, 마음에 안들면 황제도 죽이는 사람이다. 자기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이다.
그 밑에 있는 신하들이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그때 북위는 모든 것이 풍태후의 손아귀에 있었다.
또한, 풍태후는 이미 두명의 태자를 길러 황제로 만든 사람이다. 풍태후의 천하이며 따라서 당연히 풍태후가 기른 사람이 황제가 되는 세상이다.
풍태후가 탁발순을 기른 다는 것은 풍태후의 입장에서 보면 또한번 권력을 연장시키겠다는 뜻이고 탁발순의 입장에서 보면 황제가 되는 보증수표를 받았다는 말이다.
그런데 뜻밖에 490년 9월 풍태후가 49세의 나이로 죽는다 선무제의 입장에서 보면 철벽이 없어진 것이다.
그러나 절대권력을 가진 풍씨들의 세력은 하루아침에 무너지지 않는 법이다.
493년 4월 14일에 종친과 대신 등이 중궁(황후)을 세우기를 청하니 그달 18일에 효문제(선무제의 아버지, 고조)는 황후로 풍씨(풍청)를 세웠다.(생모와는 관계없이 황후가 태자의 어머니가 됨) 그리고 그해 가을 7월 5일에 북위에서 (정식으로) 황제의 아들 탁발순을 세워 태자로 삼는다.
그 다음에, 효문제(선무제의 아버지)는 그해(493년) 9월에 낙양 천도를 선언한다. 낙양 천도가 완성된 것은 495년 9월 4일이다. 이때에 북위의 육궁(황후와 후궁들이 거주하는 궁궐), 문무 관료들이 모두 낙양으로 옮겼다.
그런데 496년 7월에 황후 풍씨(풍청)를 폐출 사건이 벌어진다. 배다른 자매인 풍윤이 그녀를 참소하여 그녀를 쫒아낸 것이다
그리고 다음 달에 또하나의 사건이 벌어지는데, 태자폐출 사건이다.
태자 원순은 몸이 원래 비대하여 하남지역(낙양)의 더위를 고생스럽게 생각하여 항상 북방으로 돌아가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해(496년) 8월 7일에 효문제가 숭고(중악인 숭산으로 하남성 등봉현 북방에 있다)에 가자 원순은 좌우의 시종들과 함께 몰래 모의하여 사육하고 있던 말을 불러서 경무장한 말을 타고 평성(옛 북위의 수도)으로 달아났는데 궁궐 안에서 고도열을 직접 죽였다.
이 사건은 효문제(6대 고조)에게 아비를 거역하고 반란을 일으킨 것이 되어 그해 윤 12월 8일에 원순을 태자에서 폐출하는 사건이 벌어진다.(태자가 없어짐) 낙양 천도가 그 원인인 것이다. 이로써 또하나의 철벽이 없어졌다.
이래서 497년 1월 8일에 문소황후가 낳은 아들, 원각(선무제)이 태자가 된다. 그리고, 원순은 497년 4월 15일 반역 도모에 연루되었다고해서 죽게 된다.
그렇지만 그해 7월에 효문제는 또한번 풍씨 가문의 여자를 황후로 세운다. 즉 후궁으로 있던 풍윤을 황후로 삼은 것이다. 그리하여 황후가 어머니로써 태자 원각을 양육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우연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같은 때에(497년 7월) 원각의 어머니 고씨(高氏: 뒷 날의 문소황태후)가 대(옛 도읍지인 평성)에서 낙양으로 오다가 공현(하남성 위현시)에서 갑자기 죽었다. 다시한번 모든 것이 풍씨에게로 돌아가려는 상황이 된 것이다.
그러나 상황이 또한번 급반전하는데 그 일은 499년 2월에 벌어진다.
효문제가 연속해서 몇 년을 외지에서 있었는데 풍후(풍윤)가 환자 고보살과 사사롭게 통정하였다. 황제가 현호(하남성 여남현)에서 병환이 위독하게 되자 풍후는 더욱 방자하여 거리낄 것이 없었고 중상시 쌍몽 등은 그를 위하여 심복이 되었다.
이것이 팽성공주 사건이 발단이 되어 발각이 된다. 이 일로 효문제는 풍윤을 후궁으로 퇴출시킨다. 황후의 자리에서 쫒겨난 것이다. 이때에 효문제는 태자 원각에게 풍윤을 다시 찾아보지 말 것을 명령한다. 네 어머니가 아니니 모자관계를 끊으라는 말이다.
그리고 희안하게 그 4년 전인 495년에 풍윤의 오빠들인 풍탄과 풍수가 서로 고자질과 독살 시도 발각 등으로 싸워 그해 2월 22일에 풍탄이 먼저 죽고 3월 19일에 풍희도 죽었다. 다시말해서 풍씨 가문이 저절로 무너진 것이다.
드디어 499년 4월 1일 남쪽으로 정벌 나갔던 효문제가 병 때문에 돌아오는 도중 죽자, 그달 12일에 선무제가 등극하고 그날 고조(효문제)의 유조(遺詔)를 가지고서 풍후(풍윤)에게 죽음이 내려짐으로써 풍씨 가문은 막을 내린다.
이렇게 해서 모든 것이 제거되고 선무제(7대 세종, 원각)는 등극 후 2개월만인 499년 6월 24일, 자기 어머니를 문소황태후로 추존하고 어머니의 핏줄들을 만난다. 외삼촌인 고조와 고현, 외사촌인 고맹을 만난 것이다. 이 자리에서 작고한 외할아버지 고양을 발해공으로 임명하고 그 작위를 외사촌 고맹에게 세습하게 하는 한편, 외삼촌 고조는 평원공으로 고현은 징성공으로 책봉한다.
이로써 한편의 드라마가 여기서 일단 매듭이 지어지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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