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례
1. 고조(高肇)에 대한 간단한 소개 2. 육보(六輔)의 등장 3. 풍후의 죽음 4. 고조(高肇)의 등장 5. 육보(六輔)의 전횡 6. 육보(六輔)의 반란과 몰락 7. 고조(高肇)의 권력쟁취와 집권후의 행적 8. 고조(高肇)의 몰락
< 아래에 쓴 글은 자치통감(번역본) 제기3 무제 영명 8년(490년)부터 양기4 무제 천감 17년(518년)까지의 기사를 간추려 쓴 것이며 위서, 고조 열전도 참조하여 쓴 글임. >
☆ 자치통감 번역본 출판사: 도서출판 삼화, 권중달 옮김, 2007년 12월 27일 발행
1. 고조(高肇)에 대한 간단한 소개
고조는 고구려 사람으로서 문소황태후(북위 7대 선무제 세종의 어머니)의 오빠이다. 고조의 5대조인 고고(高顧)가 진(晉)나라 영가(永嘉) 연간(307년 ~ 312년)에 난리를 피하여 고구려로 들어갔다.
그 후, 고조의 아버지인 고양(高颺)은 북위의 고조(高祖) 초(471년~473년?)에 일가를 거느리고 북위에 들어가 여위장군(厲威將軍)이 되었다. 고양의 딸을 황실(皇室)로 들였는데, 이 사람이 바로 문소황후로, 세종(世宗: 선무제)을 낳았다.
고조의 형제들으로서는 고곤(高琨), 고언(高偃), 고조(高肇), 고현(高顯)이며 여형제는 3명인데 그중의 하나가 문소황후이다.
큰 형 고곤의 아들은 고맹인데, 고맹은 세종의 친 여동생에게 장가를 들어 부마도위(駙馬都尉)가 되고, 권력의 핵심인 상서령을 역임하였으며, 그 뒤로는 옹주자사, 전중상서가 된 사람이다.
둘째 형 고언의 딸이 세종의 황후가 된 선무황후이고,
고조(高肇)의 아들은 고식(高植)인데, 고식(高植)은 선무제(세종)가 중서시랑(中書侍郞)에서 승진시켜 제주자사(濟州刺史)로 삼았으며 뒤이어 청、상、삭、항, 사주자사四洲刺史)를 역임한 후 세상을 떠난 사람이다.
고조(高肇)가 집권하게 된 배경에는 황제의 외척(외삼촌)이라는 것 외에 육보(六輔)의 등장과 전횡, 반란 그리고 몰락과 함께 후궁으로 물러난 풍윤의 죽음과 함께 막을 내린 풍씨의 몰락이 있었다.
고조(高肇)가 죽고 고조(高肇) 일가가 몰락한 것은 세종(북위 7대 선무제)의 죽음과 일치한다.
2. 육보(六輔)의 등장
북위 6대 효문제(고조)는 죽기 직전에 어린 아들이 걱정되어 6명의 권력 핵심자에게 아들을 부탁한다. 이른바 6보(六輔)이다. <499년 3월 경자일(24일) >
그 사람들의 면면과 직책을 보면...
『시중이며 호군장군인 북해왕 원상을 사공으로 삼고, 진남장군 왕숙을 상서령으로 삼고, 진남대장군인 광양왕 원가를 좌복야로 삼고, 상서 송변을 이부상서로 삼으며 시중인 태위 원희(함양왕), 상서우복야 원징과 더불어 6명이 정사를 보좌하게 하였다.』 < 499년 3월 경자일(24일) 기사 >
그러니까 사람으로서는 북해왕 원상, 진남장군 왕숙, 광양왕 원가, 상서 송변, 함양왕 원희, 상서 우복야 원징 등 6사람이고 (이중에서 함양왕 원희와 북해왕 원상이 실세중의 실세임)
직책으로는 사공, 상서령, 상서 좌복야, 이부상서, 태위, 상서 우복야가 6개의 핵심 권력기관임을 알 수 있다. (이중에서 상서령이 핵심중의 핵심 직위임)
같은 날 효문제는 자기가 죽거든 후궁으로 물러난 풍윤(풍태후의 조카)도 죽이라고 명령한다.< 499년 3월 경자일(24일) 기사 >
3. 풍후의 죽음
『499년 4월 초하루, 효문제가 죽고 4월 정사일(12일)에 선무제(7대 세종)이 즉위하자, 바로 그날 원협(6보중의 한명) 등은 고조(6대 효문제)의 유조(遺詔)를 가지고서 풍후(이름: 풍윤)에게 죽음을 내렸다.』 < 499년 4월 정사일(12일) 기사 >
이것을 마지막으로 그렇게 무시무시했던 풍씨 일가는 북위에서 막을 내렸다
4. 고조(高肇)의 등장
「선무제가 즉위한 후 2개월이 지난 499년 6월 무진일(24일)에 선무제는 자기 어머니를 문소황후로 추존하고 외할아버지 고양(高颺)을 발해공(渤海公)으로 추사(追賜)하고 그것을 고양의 손자 고맹(高猛)에게 세습하게 하며 , 외삼촌 고조(高肇)를 평원공(平原公)에 책봉하고 고조의 동생 고현(高顯)을 징성공(澄城公)으로 책봉하여 세사람을 같은 날에 책봉하였다.」< 499년 6월 무진일(24일) 기사 요약 >
이때에 처음 고조(高肇)가 등장하며, 선무제(7대, 세종)도 외가 사람들을 처음 본 것이다.
5. 육보(六輔)의 전횡
육보(六輔)란 말이 정사의 보좌관이지 실제는 어린 황제를 대신하여 권력을 잡고 국가를 통치한 것이다. 그 6명 중에서도 어린 선무제(즉위 당시 13살)의 숙부, 즉 가장 가까운 황족(皇族) 친왕인 함양왕 원희, 북해왕 원상, 이 둘이 어린 황제를 대신하여 북위를 위임통치 하였다.
이 둘 중에서도 함양왕 원희(탁발희)가 가장 전횡이 심하였는데, 어느 정도였는가 하면,
『북위에서는 함양왕 원희를 상상(上相)으로 삼았다. 원희는 노복(늙은 종)을 시켜 우림 호분(황제 직속, 황제의 경호와 의전을 담당하는 군대)을 요구하고 들고 날 때 의장대를 데리고 다녔다.』< 501년 정월(봄) 을사일(10일) 기사 >
즉, 모든 재상들의 윗 재상이며 아예 황제 행세를 하고 다녔다는 말이다. 함양왕 원희가 이렇게까지 행동하는 것에는 그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다음 두기사가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
『애초에 태후(풍태후)는 황제(효문제)가 영민한 것을 꺼렸고 자기에게 불리할까 두려워하여서 그를 폐위시키려고 하였으며 한참 추울때 빈방에 가두고서 3일간 먹을 것을 끊었고 함양왕 탁발희를 불러서 그를 (황제에)세우려고 하였다.』 < 490년 10월 경진일(16일) 기사 >(※ 북위는 나중에 탁발씨를 원씨로 고쳤음.)
또한 효문제(6대 고조)는 죽기 전에 『일찍이 함양왕 원희 등에게 조용히 말하였다. “내가 죽은 후에 자손들 가운데 불초할 사람을 만나면 너희들은 관망하다가 보좌할 만하면 그들을 보좌하고 보좌할 수 없으면 그것을 빼앗아서 다른 사람의 소유가 되지 않게 하라.”』 이렇게 말했다. < 499년 4월 초하루 병오일 기사 >
이렇게 함양왕 원희는 원래 황제가 될 위치에 있었고, 어린 선무제가 빌빌거리면 니가 황제를 하라고 효무제에게 직접 명령을 받았다.
이렇기 때문에 함양왕 원희는 사실상 황제노릇을 하고 다닌 것이다.
이때에 원희의 전횡에 맞선 사람이 우열인데 원희는 우열을 그 직책인 영군(황제 경호책임 장군)에서 쫒아내고 항주 자사로 삼았다. 그러나 우열은 병을 핑계로 나가지 않았다. < 501년 정월 을사일(10일) 기사 요약 >
「이렇게 함양왕 원희의 전횡이 심해지자, 보다 못한 선무제를 모시는 측근 충신인 우열이 그의 아들 우충으로 하여금 선무제에게 주청하게 하고, 북해왕 원상도 비밀리에 원희의 허물과 악행을 황제에게 말함과 동시에 팽성왕 원협도 사람들의 마음을 크게 얻고 있어서 오랫동안 정치를 보좌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고 말하자, 선무제(7대 세종)는 숙부들의 명목상 지위를 올리고 선무제를 보좌할 신하들을 임명한 다음에 친정(親政)을 선언한다.」< 501년 정월 을사일(10일)에서부터 경술일(15일)까지의 기사 요약>
그리고, 「선무제는 즉위 당시 나이가 16세여서 스스로 여러 가지 일을 결정할 수 없어서 이를 좌우에 있는 사람들에게 위임하였다. 여기에 임명된 사람이 여호, 왕중흥, 구맹, 조수, 조옹과 외척 고조(高肇) 등」이다. < 501년 정월 경술일(15일) 기사 >
고조(高肇)가 처음으로 등용되는 순간이다.
이와 동시에 우열을 다시 영군으로 삼고 이어서 거기대장군을 더하여 주면서 우열은 이때부터 오랫동안 궁중 안에서 근무를 하면서 군대와 나라의 큰 일에 모두 참여하게 되었다. < 501년 정월 경술일(15일) 기사 >
6. 육보(六輔)의 반란과 몰락
이보다 먼저, 선무제가 친정을 시작하기 전 해에 자기 아버지, 효무제가 죽을 때 정성을 다했던 팽성왕 원협을 등용했다. 「유조(유언장)에 반하여 대사마로 삼고 사도의 업무를 관장하게 하였다.」<500년 6월 병자일(8일) 기사 >
그런데 선무제가 친정을 시작하자 「원협(팽성왕)을 왕으로서 집에 돌아가도록 하고,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원희(함양왕)를 태보로 자리를 올리고, 원상(북해왕)을 대장군 녹상서사로 삼는」 모양새를 갖춘다. < 501년 정월 경술일(15일) 기사 >
이런 식으로 선무제의 친정이 시작되자 선무제의 좌우의 사람들이 원희(함양왕)를 주살 하여야 한다고 하자, 원희가 반란을 도모하였다. < 501년 5월 임자일(19일) 기사 요약>
501년 5월 19일 이후 어느날 선무제가 북망산으로 사냥을 나가자 함양왕 원희와 그 무리들이 선무제를 습격하려고 모의하였으나 뜻이 하나로 결집되지 않자 누설하지 않기로 하고 헤어졌다. 그러나 그것을 결국 누설되어 선무제에게 알려졌는데 이때 선무제의 주변에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모두 사방으로 흩어져서 짐승을 쫒아가 당직 시위는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무제는 갑자기 해야 할 바를 몰랐다. 이때에 우충이 자기 아버지 우열이 계책이 준비 되어 있을 것이라고 말하자 선무제가 우충을 파견하여 살펴보도록 한 결과, 우열이 이미 병사를 나누어 삼엄하게 대비하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선무제는 무사히 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선무제가 궁에 돌아오게 되자 우열은 부하를 시켜 원희를 체포하였고 선무제는 함양왕 원희를 죽였다.(자살케 함, 501년 5월 29일)
여기서 결정적인 공을 세운 우열은 최측근이 되어 선무제는 우열의 동생인 우경의 딸을 첫 황후로 삼는다. (이 사람이 우황후이며, 황후로 세운 때는 4개월 뒤인 501년 9월 6일)
7. 고조(高肇)의 권력쟁취와 집권 후의 행적
선무제는 육보(六補)를 내치고 함양왕 원희를 주살하고 나자 정사는 오로지 고조(高肇)에게 맡겼다. 그러나 고조는 기존의 여러 세력과 부딪치게 된다.
1) 북위 황제의 친족(친왕)들과 부딪친다.
① 함양왕 원희 다음에 권력가로 나타난 사람이 북해왕 원상이다. 고조(高肇)는 북해왕 원상이 자기보다 위에 있으므로 504년 5월에 죄를 씌워 죽이고 황제에게 유세하여 여러 친왕을 거의 유폐시켜 가두었다.
② 그 후에 팽성왕 원협은 고조의 조카가 황후(선무황후)에 오르는데 반대했기 때문에 고조가 508년 9월 18일에 참살(譖殺)한다.
이렇게 되자「조정에 있는 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이나 모두 기가 꺾이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508년 9월 18일 기사> 고조의 세력이 얼마나 강대했는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③ 경조왕 원유도 사실은 선무제가 우황후의 누이동생을 받아들이라는 사건 때문에 기주에 나가 황제를 칭하는 반역을 하였으나고조가 원유의 형제들을 자주 참소하고 ‘고조가 황제를 죽이고 반역하였다.’ 는 유언비어도 반역의 핑계 거리가 되었다. 결국 경조왕 원유가 사로잡혀서 낙양으로 호송하게 되는데 이 도중에 원유를 죽인 사람이 바로 고조이다. (경조왕 원유가 기주에서 황제를 칭한 때가 508년 7월 12일이고 경조왕 원유가 죽은 것은 508년 9월 계묘일-23일 임)
2) 선무제의 최측근, 우씨들과 부딪친다.
507년 윤10월 정묘일(12일)에 선무제의 황후인 우씨가 갑자기 죽었다. 그 다음 508년 3월 무자일(5일)에 우황후가 낳은 아들 원창이 죽었다. 이 두사건 모두 고조의 세력이 안팎을 기울어뜨릴 때 이러한 사건이 일어났으므로 고조와 관련되었다고 우씨들을 비롯한 세상 사람들은 생각하였다.
3) 고귀빈(高貴賓: 고조의 조카)이 황후(선무황후)가 되자 고조는 더욱 세도를 부렸다.
508년 가을 7월 갑오일(13일)에 위에서는 고귀빈(高貴賓)을 세워서 황후로 삼았다. 상서령 고조(高肇)는 더욱 귀하게 되고 중용되어 용사(세도를 부림)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니 여러 신하들과 종실(황족, 친왕)에서는 모두 몸을 낮추어 그의 밑에 있었다.< 508년 가을 7월 갑오일(13일) 기사 >
이 무렵에 고조(高肇)의 아들 고식(高植)이 중서시랑(中書侍郞)에서 승진하여 제주자사(濟州刺史)가 되어 경조왕 원유를 토벌, 격파하는 공을 세웠고, 뒤이어 청、상、삭、항, 사주(四洲) 자사를 역임하고 죽었다.< 고조(高肇) 열전 > (경조왕 원유가 기주에서 황제를 칭한 때가 508년 7월 12일이고 경조왕 원유가 죽은 것은 508년 9월 계묘일-23일 임)
또하나, 이때 볼수 있는 현상은 북위의 황족인 친왕들이나 권문세가들이 너나없이 고조 가문과 넓게는 고구려 여인들과 혼인을 맺으려고 하는 모습이 보인다. 이는 대략 다음 다섯가지 원인이 있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① 고조의 조카가 현재 황후이고, 고조의 여동생이 황태후로 추존되었다.(황후 및 황태후 가문) ② 고조가 그 당시 황제의 숙부도 죽이는 엄청난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새로운 세도 가문) ③ 고조는 고구려 사람이라 붕당을 결성하려고 했는데 혼맥을 이용하여 세력 강화를 꾀하려 고조의 생각이 있었다. ④ 실력자 고조와 손을 잡으려는 황제의 친족들(친왕)과 권문세가 등 구세력의 생각이 있었다.(신 세력인 고조가문과 구세력의 결합) ⑤ 고조 가문의 여인들이나 고구려 여인들이 아름다웠다. 수많은 아름다운 궁녀를 보았을 풍태후가 문소황태후를 13살 때 보았을때 빼어났다고 할 만큼, 그래서 후궁으로 들여 보냈을 만큼 고조 가문의 여인들과 고구려 여인들이 아름다웠다, 그래서 수많은 친왕들과 한다하는 권문세가의 구세력들이 너도나도 고조 가문의 여인들 내지 고구려 여인들과 혼인을 맺으려고 한 것으로 보인다.
4) 공신들과 부딪친다.
고조가 정권을 잡게 되자 고조(高肇)는 「이전 조정의 옛 제도를 많이 바꾸고 봉지와 녹질을 줄이며 공신들을 억누르고 쫒아내니, 이로 말미암아서 원망하는 소리가 길에 가득찼다.」< 508년 가을 7월 갑오일(13일) 기사>
이렇게 황제의 친족(친왕)들을 죽이고 핍박하니 살아있는 친왕들에게 미움과 반감을 사고 황제의 최측근 인사들과도 척을 지며, 공신들도 적대세력이 되어버리니 천하의 세력가, 고조라고는 하지만 배겨낼 방법이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드디어 512년 봄 정월 병진일(25일)에 선무제는 고조를 사도(司徒)로 삼고 청하왕 원역을 사공으로 삼으며 광평왕 원희를 표기대장군으로 승진시키는 인사를 단행한다
겉으로 보기에는 황제의 친족인 친왕들과 동일한 대우를 하며 승진시켜 준 것이지만 사실은 권력의 핵심인 상서령에서 배제시킨 것이다. 이로부터 고조는 권력의 핵심에서부터 멀어지기 시작하였고 이후부터 고조는 모함을 받기 시작한다. 그러나 선무제는 죽을때까지 고조를 해치지 않았다.
이러는 와중에 510년 3월 병술일(14일)에 선무제의 아들 원후가 태어났다. 원후의 어머니는 호충화인데 후에 영태후가 되는 사람이다.
그해 겨울 10월 을해일(18일)에 선무제는 아들 원후를 세워서 태지로 삼았는데 북위 역사상 처음으로 그 생모(호충화)를 죽이지 않았다. (북위는 후궁에서 태어난 자식이 황태자가 되면 생모를 죽임: 모사자귀-母死子貴 제도)
이것이 고조 일가가 기울게 되는 원인이 된다. 생모를 죽이면 황후였던 선무황후가 황태자의 어머니가 되어, 어린 황태자가 황제가 될 때 황제를 대신하여 국가 권력을 장악하였을 것이고, 이게 북위의 법이었기 때문에 고조 일가는 당연히 대를 이어 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다. 그러나 생모를 죽이지 않았기 때문에 생모인 호충화가 황제의 어머니, 태후(영태후)가 되어 국가 권력을 잡고 선무황후를 죽임으로써 고조 일가는 막을 내린다.
생모인 호충화를 죽이지 않은 단 하나의 예외가 생긴 것은 고조 일가에 대한 반감 때문이며 견제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고조에 대한 선무제의 신뢰는 지속되어 514년 10월 신해일에 선무제는 익주를 차지할 좋은 기회가 생기자 고조를 대장군 평촉대도독(大將軍 平蜀大都督)으로 삼아서 보병과 기병 15만명을 거느리고 익주를 정벌하게 한다.
8. 고조(高肇)의 몰락
515년 봄 정월 갑신일(10일)에 선무제(세종)가 병이 나서 정사일(13일)에 식건전에서 죽었다. 즉시 태자가 즉위한다.
이때에 선무황후(고조의 조카)는 태자의 생모인 호귀빈(영태후)을 죽이려고 하였는데, 우충이 호귀빈을 다른 곳에 빼돌려서 살았다. 고씨 일가가 두 번째 기회를 놓치는 안타까운 순간이다.
이러한 일이 생긴 원인은 선무황후가 우황후의 죽음에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는 우충이 우황후의 원수를 갚고, 고조 가문에 대한 반감으로 선무황후의 집권을 가로막고자 호귀빈(영태후)을 빼돌린 것임에 틀림없을 것이다.(우충과 우황후는 사촌지간임)
을해일(26일)에 호귀빈을 높여서 황태비로 삼았다. 호태후 즉 영태후에게 권력이 넘어가고 있는 순간이다.
2월 경진일(7일)에 북위의 효명제(8대 숙종)은 이름을 부르며 편지를 써서 고조에게 애사를 알리고 또 그에게 돌아오라고 불렀다.
그리고는 신사일(8일)에 고조(高肇)가 궁궐에 들어오자 고양왕 원옹과 우충이 중심이 되어 고조(高肇)를 죽였다. 다시말해서 선무제의 친족세력인 친왕세력과 최측근 세력인 우씨에 의해 죽음을 당한 것이다.
이를 계기로 고조(高肇) 일가는 몰락한다.
515년 8월 병자일(6일)에 황태후가 된 호태후(시호가 ‘영 ’ 이어서 영태후로 부름)는 518년 9월 무신일(26일)에 선무황후(고조의 조카)를 죽임으로써 고조(高肇) 일가는 파란만장한 막을 내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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