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년 (AD 677) : [황제가] 항복한 왕을 요동주도독으로
[번역문]
의봉(儀鳳) 2년 정축년(677) 봄 2월에 [황제가] 항복한 왕을 요동주도독으로 삼고 조선왕으로 봉하여 요동으로 돌려보내어
나머지 무리들을 안무하게 하였는데,
동쪽나라 사람으로서 먼저 여러 주에 와 있던 자들도 모두 왕과 함께 돌아가게 하고 안동도호부를 신성으로 옮겨 통치하게 하였다.
7 년 (AD 681) : 왕은 요동에 이르러 배반할 것을 꾀하여...
[번역문]
왕은 요동에 이르러 배반할 것을 꾀하여 몰래 말갈과 통했으므로,
[황제가] 개요(開耀) 원년(681)에 공주(邛州)로 소환하였다.
8 년 (AD 682) : [왕이] 영순 초년에 위위경을 추증
[번역문]
[왕이] 영순(永淳) 초년(682)에 죽으니 [황제는 왕에게] 위위경(衛尉卿)을 추증하고,
명령을 내려 [당나라] 수도로 옮겨 힐리(頡利)의 무덤 왼쪽에 장사지내고 무덤 앞에 비를 세웠다.
그 백성들은 하남(河南)·농우(隴右)의 여러 주로 흩어서 나누어 옮기고,
가난한 사람들은 안동성(安東城) 옆의 옛 성에 남겨 두었는데, 간혹 신라로 도망하는 자들이 있었다.
나머지 무리들은 흩어져 말갈과 돌궐로 들어가 고씨 임금은 마침내 끊어졌다.
9 년 (AD 686) : 황제가 항복한 왕의 손자 보원을 조선군왕으로
[번역문]
수공(垂拱) 2년(686)에 [황제가] 항복한 왕의 손자 보원(寶元)을 조선군왕(朝鮮郡王)으로 삼고,
성력(聖曆) 초년(698)에 이르러 좌응양위(左鷹揚衛) 대장군으로 올렸다가
다시 충성국왕(忠誠國王)으로 봉하고, 안동의 옛 부를 통치하게 하였으나 [그는] 가지 않았다.
이듬해에 항복한 왕의 아들 덕무(德武)를 안동도독으로 삼았는데, 후에 점차 나라를 이루었다.
원화(元和) 13년(818)에 이르러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악공(樂工)을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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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삼국사기 원본 출처: http://koreandb.nate.com/history/saki/
2. 해설 및 분석:
1) 보장왕(항복한 왕)을 조선왕으로 봉하여 요동으로 돌려보내 고구려 유민을 달래려고 합니다.
이것은 건모잠이 중심이 되어 고구려 부흥운동을 일으켰을 때 4년 만에 겨우 이를 진압했기 때문입니다.
이때에 당은 견디다 못해 안동도호부를 평양에서 요동으로 옮깁니다.
이래서 항복한 고구려 왕을 또다시 고구려 왕이라고는 못하고
고구려의 전 이름인 조선 왕이라고 하여 고구려 땅에 보내어 고구려 유민을 달래게 한 것입니다.
여기서 또 한번 안동도호부를 신성으로 옮깁니다.
※ 안동도호부의 이전
① 평양(668년)→ ② 요동주(671년)→ ③ 신성(677년)
⇒ 고구려 유민들의 투쟁의 결과 안동도호부가 북쪽으로 차례로 옮겨짐
2) 보장왕을 도로 보낼 때,
고구려가 망한 다음해인 669년 여름 4월에 당고종이 당나라로 옮겼던
고구려 백성 3만 8천3백 호를 다시 보장왕과 함께 고구려로 돌려보냅니다.
3) 보장왕이 당과 결별 할 것 같으므로 개요(開耀) 원년(681년)에 공주(邛州)로 소환합니다.
4) 보장왕이 영순(永淳) 초년(682년)에 죽으니 당나라 수도 장안에 묘를 씁니다.
이때 ‘그 백성들은 하남(河南)·농우(隴右)의 여러 주로 흩어서 나누어 옮기고,
가난한 사람들은 안동성(安東城) 옆의 옛 성에 남겨 두었는데, 간혹 신라로 도망하는 자들이 있었다.
나머지 무리들은 흩어져 말갈과 돌궐로 들어가 고씨 임금은 마침내 끊어졌다.’
이렇게 삼국사기에는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의 원본이라고 할 수 있는 구당서는 다르게 씌여 있습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상략).....
일이 [사전에] 발각되자, 소환하여 공주(邛州)로 유배(流配)시켰다.
나머지 사람들은 하남(河南)]·농우(隴右)의 여러 주(州) 분산하여 옮겼는데,
그 가운데 빈한(貧弱)한 자는 안동성(安東城) 부근에 머물러 살게 하였다.
..........(중략).......
[성력(聖曆)] 2년(A.D.699)에는 또 고장(高藏)의 아들 덕무(德武)를
안동도독(安東都督)에 제수하여 본번(本蕃)을 통솔하게 하였다.
이로부터 안동(安東)에 있는 고[구]려(高[句]麗)의 구호(舊戶)가 점차 줄어들어
돌궐(突厥)·말갈(靺鞨) 등에게로 흩어지자, 고씨(高氏)의 군장(君長)은 마침내 끊기고 말았다.
⇒①‘보장왕은 공주에 유배시키고 보장왕 나머지 사람 즉, 안동도호부에 있었던 보장왕을 제외한 사람들은
하남 농주등으로 분산 시키고 그 가운데 가난한 사람들은 안동성 부근에 머물러 살게 하였다’는 것.
②돌궐 말갈등으로 흩어진 사람들은 안동(안동도호부, 신성에 있었음)에 있었던
고구려의 구호(舊戶) 즉 옛 사람들, 다시 말해서 고구려 유민입니다.
결론적으로 안동 도호부에 있었던 부유한 사람들은 중국 하남 농우로 이주 시켰고,
가난한 사람들은 안동성(안동도호부) 부근에 머물러 살게 하였으며,
보장왕의 아들 고덕무로 하여금 안동도독을 삼아 통솔하게 하자
안동(安東)에 있는 고[구]려(高[句]麗)의 옛 백성들이 점차 줄어들어 돌궐(突厥)·말갈(靺鞨) 등에게로 흩어졌고,
이로써 고씨(高氏)의 군장(君長)은 마침내 끊기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즉, 꼭두각시 고구려의 서울에, 꼭두각시 군장을 세우자, 고구려 백성이 흩어져서
다스릴 백성이 없어졌으니 고씨가 군장(君長)을 하는 것이 끊어졌다는 말입니다
5) 수공(垂拱) 2년(686년)에 보장왕(항복한 왕)의 손자 보원(寶元)을 조선군왕(朝鮮郡王)으로 삼았으나 가지 않았고,
이듬해(687년)에 항복한 왕의 아들 덕무(德武)를 안동도독으로 삼습니다.
그런데 고덕무는 후에 점차 나라를 이루었다고 했는데
그 나라가 어느 나라인지는 모르겠습니다.
6) 이로써 고구려 역사기록은 끝이 납니다.
※ 오늘 본문과 관련된 구당서와 신당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1) 구당서 동이열전
○ 의봉(儀鳳) 연간(A.D.676∼678) 에 고종(高宗)은 고장(高藏, 보장왕)에게
개부의동삼사 요동도독(開府儀同三司 遼東都督)을 제수(除授)하고 조선왕(朝鮮王)에 봉하여,
안동(安東)에서 살며 본번(本蕃, 옛 고구려 땅)을 진무하는 주(主)로 삼았다.
고장(高藏, 보장왕)은 안동(安東)에 이르러서 몰래 말갈(靺鞨)과 서로 통하여 모반을 꾀하였다.
일이 [사전에] 발각되자, 소환하여 공주(邛州)로 유배(流配)시켰다.
나머지 사람들은 하남(河南)]·농우(隴右)의 여러 주(州) 분산하여 옮겼는데,
그 가운데 빈한(貧弱)한 자는 안동성(安東城) 부근에 머물러 살게 하였다.
고장(高藏, 보장왕)이 영순(永淳)(A.D.682) 초에 졸(卒)하자 위위경(衛尉卿)에 추증하였다.
조서(詔書)를 내려 경사(京師)로 운구케 하여 힐리(頡利)의 묘 좌측에 장지(葬地)를 하사하고, 비(碑)도 세워 주었다.
수공(垂拱) 2년(A.D.686)에 또 고장(高藏)의 손자 보원(寶元)을 조선군왕(朝鮮郡王)으로 봉(封)하였다.
○ 성력(聖曆) 원년(A.D.698)에 좌응양위대장군(左鷹揚衛大將軍)에 진수(進授)시키고, 충성국왕(忠誠國王)에 봉(封)하였다.
안동(安東)의 구호(舊戶)를 맡겨 통섭(統攝)시키려 하였으나, 끝내 실행하지 못했다.
[성력(聖曆)] 2년(A.D.699)에는 또 고장(高藏)의 아들 덕무(德武)를 안동도독(安東都督)에 제수하여 본번(本蕃)을 통솔하게 하였다.
이로부터 안동(安東)에 있는 고[구]려(高[句]麗)의 구호(舊戶)가 점차 줄어들어 돌궐(突厥)·말갈(靺鞨) 등에게로 흩어지자,
고씨(高氏)의 군장(君長)은 마침내 끊기고 말았다.
남생(男生)이 의봉(儀鳳)(A.D.676~678) 초에 장안(長安)에서 죽으니, 병주대도독(幷州大都督)에 추증하였다.
아들 헌성(獻誠)을 우위대장군(右衛大將軍)에 제수(除授)하고, 우림위상하(羽林衞上下)를 겸임시켰다.
2) 신당서 동이열전
총장(總章) 2년(A.D.669)에 고[구]려민(高[句]麗民) 3만명을 강회(江淮)와 산남(山南)으로 옮겼다.
고[구]려(高[句]麗)의 대장(大長) 건모잠(鉗牟岑)이 무리를 거느리고 반란을 일으켜
[고(高)]장(藏)의 외손(外孫) 안순(安舜)을 세워 왕(王)으로 삼았다.
고간(高偘)을 동주도행군총관(東州道行軍總管)으로 삼고, 이근행(李謹行)을 연산도행군총관(燕山道行軍總管)으로 삼아 토벌케 하였다.
사평태상백(司平太常伯) 양방(楊昉)을 보내어 도망치고 남은 무리를 불러 들이게 하였다.
[안(安)]순(舜)이 건모잠(鉗牟岑)을 죽이고 신라(新羅)로 달아 났다.
[고(高)]간(偘)은 도호부(都護府)의 치소(治所)를 요동주(遼東州)로 옮기고,
반란군을 안시(安市)[성(城)]에서 격파하고, 또 천산(泉山)에서 쳐부수고 신라(新羅)의 원병(援兵) 2천명을 사로잡았다.
이근행(李謹行)은 그들을 발로하(發盧河)에서 쳐부수고, 다시 싸워서 포로와 참수(斬首)한 수가 1만(萬)에 이르렀다.
이에 평양(平壤)[성(城)]의 패잔병(敗殘兵)들은 다시 군열(軍列)을 정비할 수 없게 되자,
함께 어울려 신라(新羅)로 망명하였다. 그리하여 무려 4년만에 평정되었다.
....(하 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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