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입력 2017.12.30 01:49 | 종합 27면 지면보기
트럼프의 새 ‘국가안보 전략’은 미·중·러 간의 냉전 2.0의 의미
동아시아가 핵 확산 지대 되면 지구촌 공동 멸망시킬 수 있다
미·중이 남북한의 체제 안전을 국제협약으로 보장하려 노력해야
. 전쟁의 먹구름이 가시지 않았던 올 한 해, 새해를 며칠 앞두고 또다시 무거운 마음으로 평화의 가능성을 짚어보게 된다. 일제하에서 초등학생으로 제2차 세계대전의 개전에서 히로시마 원자폭탄 투하로 맞은 1945년 종전까지, 그리고 동족상잔의 극한점에 달했던 6·25전쟁의 휴전 반대 시위에 대학생으로 참가했던 기억 등 전쟁의 그림자들은 내게 오래전부터 전쟁을 중심으로 지난날을 회고하는 습관을 남겨주었다.
일단 전쟁이 끝난다는 것은 좋은 소식이었지만 3년에 걸쳐 전 국토를 쑥대밭으로 파괴하고 무수한 인명을 희생시킨 6·25전쟁이 통일은 고사하고 별다른 성과나 승자도 없이 집단적 자해행위로 끝났다는 게 너무나 허무하게 느껴졌다. 그 전쟁을 일으킨 책임자들이 얼마나 역사의 큰 죄인들인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20세기 전반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 끝남으로써 지구촌은 제국주의 시대와 전체주의 시대의 반인륜적 억압과 연쇄적 전쟁의 파괴로부터 해방되는 듯 보였다. 그리고 1945년 역사의 새 출발을 기약하며 국제연합, 즉 유엔이 발족됐다. 그러나 자유주의와 공산주의란 이념으로 무장한 동서 진영이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대결하는 냉전 시대의 출범은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었다. 그로부터 한 세대 후인 80년대 말, 세계는 동서대결의 긴장을 풀고 평화의 새 물결을 받아들이는 꿈 같은 전환기를 경험하게 된다. 88년 서울 올림픽은 동서 진영의 상호 보이콧으로 반쪽 올림픽이 됐던 80년 모스크바, 84년 로스앤젤레스의 악몽을 씻고 냉전의 종식을 전 세계가 함께 축하하는 평화의 제전으로 승화시켰다. 87년 민주화에 성공한 한국에선 2년 후 여야 4당 합의로 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을 내세웠고, 90년 독일 통일이 이뤄지면서 세계는 평화와 번영을 공유하자는 세계화의 시대로 진입했다.
그로부터 또 한 세대, 시장경제와 개방화 정책을 추진한 지역과 국가들은 놀랄 만한 발전을 기록했다. 그러나 역사는 그러한 순조로운 발전과 평화의 진전을 무한정 허용하지는 못하는가 보다. 세계화의 성공이 수반한 부작용과 피로감, 이에 더해 국제주의를 넘어선 새로운 내셔널리즘의 대두가 지난 몇 해 평화를 위협하는 불길한 징조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특히 강대국들이 왕년에 지녔던 제국의 영광에 대한 향수에 빠져들면서 평화보다는 갈등과 전쟁의 가능성이 점차 확대되고 있다. 그레이엄 앨리슨 교수가 제시한 투키디데스의 함정, 즉 신흥 패권지향국인 중국과 기존 패권국 미국이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전쟁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다는 가설은 상당한 설득력을 보여주고 있다. 한편 세계화를 뒷받침한 국제주의에 동참하지 않고 한사코 극단적 예외성을 내세우며 핵무기 개발에 체제의 운명을 건 북한의 모험으로 야기된 핵 확산 위기는 미·중 관계와 얽히면서 동아시아·태평양 지역에 긴장을 급격히 고조시키고 있다.
두 달 전 중국 공산당 19차 대회에서 시진핑 주석은 마르크스·레닌주의로 무장한 중국이 2030년엔 미국과 대등한 경제대국이, 그리고 21세기 중반에는 세계의 패권국가가 되는 중국몽을 실현하겠다고 선언했다. 서구식 개인주의, 분권주의, 자유주의에 대한 시진핑 주석의 단호한 입장을 의식한 듯 2주 전에 발표된 트럼프 정부의 ‘국가안보 전략’ 보고서는 현 국제상황을 중국과 러시아의 미국 리더십에 대한 도전이라고 명확히 규정하며 미국은 정치·군사·경제 모든 영역에서 우위를 확고히 지켜가겠다고 선언함으로써 미·중·러 간에 냉전 2.0이 시작되고 있음을 명시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당면한 과제는 지난날 동서 냉전 1.0이 핵전쟁으로 비화되지 않도록 억제했던 성공적 전례에 뒤지지 않도록, 미·중 간의 냉전 2.0이 그보다 몇 단계 높은 수준의 평화 유지 노력에 공조하도록 국제적 압력을 발동시키는 데 적극 앞장서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냉전 2.0시대의 한반도 평화를 보장하는 지름길이며 기본요건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미국과 중국, 그리고 세계가 직면한 선택은 북한이란 새로운 핵보유국을 인정하느냐가 아니라 동아시아를 핵확산지대로 만들어 지구촌을 핵전쟁에 의한 공동 멸망의 낭떠러지로 떨어지게 방치하느냐의 생사 여부다. 남북한 간이나 국제관계에서 쌓여 왔던 과거의 시비는 일단 접어두고 유엔 회원국인 남북한 두 체제의 안전을 미·중이 앞장서 국제협약으로 보장하려는 노력이 절실히 필요하다. 전쟁을 경험했던 한국인은 전쟁을 두려워하는 것이 사실이다. 북한의 지도자도 평화가 오는 것을 두려워하기보다 이제는 전쟁을 두려워해야 할 때다.
이홍구 전 국무총리·본사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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