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신라와 당의 관계-350,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195, 8. 황소의 난-21)
차례
가. 관련 사료 1. 구당서 토번전(상) 2. 구당서 토번전(하) 3. 신당서 토번전 4. 구당서 돌궐전 5. 신당서 돌궐전 6. 구당서 측천본기 7. 신당서 측천본기 8. 구당서 거란전 9. 신당서 거란전 10. 구당서 발해전 11. 신당서 발해전 12. 구당서 숙종본기 13. 구당서 회홀전 14. 신당서 회골전 15. 구당서 남조전 16. 신당서 남조전 17. 구당서 신라전 18. 신당서 신라전 19. 삼국사기 신라본기
나.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 1. 이진충의 난 이전 2. 이진충의 난 3. 돌궐족 묵철의 침공 4. 안사의 난 5. 토번의 침공 6. 토번의 침공 이후 7. 민란의 발생과 남조의 침공 8. 황소의 난 9. 절도사의 시대 10. 당의 멸망
다. 통일신라와 당 1. 통일신라 이후의 당나라 약사 2. 신구당서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3.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4. 사료를 통합해서 본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
나.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 8. 황소의 난 1) 연표(자치통감 요약을 기초로 작성) 2) 해설
2) 해설 - 1
< 황소의 난(874년~884년) >
남조의 침공이 대충 마무리되니 당나라는 다시 내란이 찾아온다. 즉 민란이 발생하면서 당의 역사는 국가대 국가의 움직임이 중요했던 시기를 마감하고 개인의 움직임이 중요한 시기를 맞이한다. 막바로 말해서 이 시대부터는 민란을 일으킨 왕선지와 황소의 움직임이 물론 중요하고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이극용, 주전충과 아울러 우리역사와 관계있는 고병의 움직임이 당의 역사에 중요하다. 또한 황제를 제멋대로 결정하는 환관의 시대와 관료들의 당쟁(붕당정치)의 시대가 지속되는 만큼 이들의 움직임도 역시 중요하다. 이러한 당나라 역사의 흐름에 따라 황소의 난을 살펴보도록 하자.
◎ 왕선지의 난(874년 12월~) 당은 관료와 환관이 서로 싸우고 절도사들의 독립시도와 이를 진압하는 전쟁으로 조세를 더 가혹하게 징수하며 해마다 홍수와 가뭄으로 백성들은 떠돌다 굶어도 호소할곳 없어, 서로모여 도적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이때에 복주사람 왕선지가 무리 수천을 모아 장원에서 일어났다(12월)
< 875년 > ◎ 당 희종은 하는 일은 오로지 노는 것(875년 1월?)
당 희종은 이때 나이가 14살이었고 하는 일은 오로지 노는 것이었으며 모든 일은 모두 환관 전령사에게 위임하고 아부(阿父: 의부)라고 불렀다
○ 돌장 해체와 반란(875년 3월)
남조의 침공을 격퇴하여 고병은 양경복의 '돌장(突將)'을 해체하니 돌장들은 모두 화를 내고 원망하였다. 게다가 형벌이 엄격하고 잔혹하니 이로 말마암아 촉인(蜀人)들은 모두 좋아하지 않았다.(3월) 이에 '돌장'들이 반란을 일으켜, 관부로 돌입하니 고병은 달아나 측간에 숨어 살아났다. 감군이 돌장(突將)의 직명과 품급을 회복시켜 준다고 허락하니 마침내 영채로 돌아갔다. 고병이 나와서 돌장들에게 사과하는 방문을 붙이고 직책과 명칭 의복과 양곡을 다 회복시키겠다고 하였다.(4월)
◎ 왕영의 난(875년 4월~) 한편 절서 낭산의 진알사 왕영 등 69명이 처우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켜, 무리 1만을 거두어 소주와 상주를 공격하여 함락시켰고, 장강(양자강)에서 배 띄워 바다로 들어가서 절서와 절동 지역을 약탈하고, 남으로 복건까지 진출하였다.(4월)
○ 돌장 진압(875년 6월20일) 고병이 밤에 '돌장'들의 집을 습격하여 남녀노소 수천 명 전부 도륙하여, 강에 던져버렸다(6월20일)
◎ 황소의 난 발생(875년 6월~) 왕선지와 그의 무리 상군장이 복주와 조주를 함락시키니, 무리가 수만 명에 이르렀는데, 천평절도사 설숭이 이들을 쳤으나 왕선지에게 패배되었다. 원구 사람 황소 역시 수천 명 모아 왕선지에 호응하였다. 이로써 황소의 난이 시작되었다.
왕선지와 황소는 사염업자인데 사염(私鹽)이란 정부의 허가없이 밀매하는 소금이다.
황소는 진사시험 합격 못하자 도둑이 되어, 왕선지와 함께 주현을 공격하고 약탈하면서 산동(山東)을 횡행하니 무거운 수탈로 곤란을 당하는 사람들이 다투어 그들에게 귀부하여 몇 달 사이에 무리가 수만에 이르렀다.
여러 도적들이 점차로 일어나서 10여개 주를 약탈하여, 회남에 도착, 많은 것은 1천여명, 적은 것은 수백 명이었다. 이에 회남, 충무, 선무, 의성, 천평의 다섯군(軍) 절도사에게 토벌을 하게 하였다.(11월)
왕선지가 기주를 침구하니, 평로절도사 송위에게 본군(本軍) 5천과 금병 3천을 주어 토벌케 하였다.(12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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