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책봉의 진실(17)

상 상 2016. 11. 30. 21:02

책봉의 진실(17)

 

 

7) 회홀의 10대 가한인 보의가한의 책명

 

그 다음, 회홀의 10대 가한의 책봉에 대해 알아보자.

 

역시 구당서 회홀전에는 책명 기록이 없다.

그러나 신당서 회홀전에는

[원화] 3(808) [회골 사신이] 와서 함안공주의 사망 소식을 알렸다. [함안공]주는 네 명의 가한을 거쳐 회골에 대략 21년간 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가한이 또한 죽자 헌종(憲宗:11대 군주)이 종정소경 이효성을 시켜 애등리라골밀시합비가보의가한 이라고 책봉했다.(三年來告咸安公主喪主歷四可汗居回鶻凡二十一歲無幾可汗亦死憲宗使宗正少卿李孝誠冊拜愛登里羅汨蜜施合毗伽保義可汗)

라고 되어 있어 책명(책배) 기록이 있고

 

자치통감에는

당 헌종 원화3(808) 2월 무인일(26) 함안대장공주가 회홀에서 죽었다.

3월에 회홀의 등리(騰里)가한(9대 가한)이 죽었다.

5월 병오일(25), 회홀의 새 가한을 책명하여 애등리라골밀시합비가보의가한(10대 가한)이라고 하였다.(丙午冊回鶻新可汗為愛登裡囉汨密施合毘伽保義可汗)

라고 되어 있어 함안공주가 죽은 것은 8082월이고

회홀의 9대 가한인 등리가한이 죽은 때는 그해 3월이며

책명은 그해 525일 임을 알려주고 있다.

 

그러면 80511월과 8085월 사이에는 무슨 일이 있었는가?

연표로 살펴보자.

내 용

806

원화 원년(806) 정월에 복건도에서 토번의 백성 17명을 보내왔는데, 조서를 내려 이들에게 역마를 주어 토번에 돌려보내도록 했다. 6월에 [토번이] 사신 논발장을 보내 입조했다.<구당서 토번전>

 

헌종(憲宗, 재위 806~820) 초에 사신을 보내 화의를 맺고 포로를 돌려보냈다. 또한 순종(順宗)의 죽음을 알리니 토번 역시 논발장을 보내왔다. 그 후로 매년 내조했다. 그러나 5만의 기병으로 진무(振武)의 불제천(拂鵜泉: 몽골 초원 카라코름 부근에 위치)을 침입하고, 만 기로 풍주(豐州: 오르도스 일대로 황하의 남안에 해당)의 대석곡(大石穀)에 이르러, 회골(回鶻)이 귀국하는 것을 약탈했다.

<신당서 토번전>

 

원화(元和)년간 초기(806)[회골 사신이] 다시 조정에 와서 [토산품을] 바쳤는데, [이 때] 비로소 마니(摩尼: 마니교도 또는 마니승)가 왔다. 그들의 계율은 일몰시기에 식사를 하고 물을 마시고 채식을 하며 유제품을 먹지 않았는데, 가한과 늘 나라 일을 같이 처리했다. 마니가 경사(장안)에 오면 매년 서시(西市)에 왕래했는데, 장사꾼들이 그들과 거래를 하면 간악하게 굴었다.<신당서 회홀전>

808

[원화] 3(808) [회골 사신이] 와서 함안공주의 사망 소식을 알렸다. [함안공]주는 네 명의 가한을 거쳐 회골에 대략 21년간 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가한이 또한 죽자 헌종(憲宗:11대 군주)이 종정소경 이효성을 시켜 애등리라골밀시합비가보의가한 이라고 책봉했다.<신당서 회홀전>

 

위의 연표를 살펴보면 당과 토번의 관계는 화평관계이니 전과 별 다름이 없었다.

따라서 이때 역시 회홀과의 동맹은 그 중요성이 떨어지게 되었고

그래서 구당서 회홀전에는 회홀의 비가보의 가한(10대 가한)을 책명했다는 기록이 없고

신당서 회홀전과 자치통감에는 그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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