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봉의 진실(17) 7) 회홀의 10대 가한인 보의가한의 책명 그 다음, 회홀의 10대 가한의 책봉에 대해 알아보자. 역시 구당서 회홀전에는 책명 기록이 없다. 그러나 신당서 회홀전에는 [원화] 3년(808) [회골 사신이] 와서 함안공주의 사망 소식을 알렸다. [함안공]주는 네 명의 가한을 거쳐 회골에 대략 21년간 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가한이 또한 죽자 헌종(憲宗:11대 군주)이 종정소경 이효성을 시켜 애등리라골밀시합비가보의가한 이라고 책봉했다.(三年,來告咸安公主喪。主歷四可汗,居回鶻凡二十一歲。無幾,可汗亦死,憲宗使宗正少卿李孝誠冊拜愛登里羅汨蜜施合毗伽保義可汗) |
라고 되어 있어 책명(책배) 기록이 있고 자치통감에는 당 헌종 원화3년(808년) 2월 무인일(26일) 함안대장공주가 회홀에서 죽었다. 3월에 회홀의 등리(騰里)가한(9대 가한)이 죽었다. 5월 병오일(25일), 회홀의 새 가한을 책명하여 애등리라골밀시합비가보의가한(10대 가한)이라고 하였다.(丙午,冊回鶻新可汗為愛登裡囉汨密施合毘伽保義可汗) |
라고 되어 있어 함안공주가 죽은 것은 808년 2월이고 회홀의 9대 가한인 등리가한이 죽은 때는 그해 3월이며 책명은 그해 5월25일 임을 알려주고 있다. 그러면 805년 11월과 808년 5월 사이에는 무슨 일이 있었는가? 연표로 살펴보자. 년 | 내 용 | 806 | 원화 원년(806) 정월에 복건도에서 토번의 백성 17명을 보내왔는데, 조서를 내려 이들에게 역마를 주어 토번에 돌려보내도록 했다. 6월에 [토번이] 사신 논발장을 보내 입조했다.<구당서 토번전> 헌종(憲宗, 재위 806~820) 초에 사신을 보내 화의를 맺고 포로를 돌려보냈다. 또한 순종(順宗)의 죽음을 알리니 토번 역시 논발장을 보내왔다. 그 후로 매년 내조했다. 그러나 5만의 기병으로 진무(振武)의 불제천(拂鵜泉: 몽골 초원 카라코름 부근에 위치)을 침입하고, 만 기로 풍주(豐州: 오르도스 일대로 황하의 남안에 해당)의 대석곡(大石穀)에 이르러, 회골(回鶻)이 귀국하는 것을 약탈했다. <신당서 토번전> 원화(元和)년간 초기(806)에 [회골 사신이] 다시 조정에 와서 [토산품을] 바쳤는데, [이 때] 비로소 마니(摩尼: 마니교도 또는 마니승)가 왔다. 그들의 계율은 일몰시기에 식사를 하고 물을 마시고 채식을 하며 유제품을 먹지 않았는데, 가한과 늘 나라 일을 같이 처리했다. 마니가 경사(장안)에 오면 매년 서시(西市)에 왕래했는데, 장사꾼들이 그들과 거래를 하면 간악하게 굴었다.<신당서 회홀전> | 808 | [원화] 3년(808) [회골 사신이] 와서 함안공주의 사망 소식을 알렸다. [함안공]주는 네 명의 가한을 거쳐 회골에 대략 21년간 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가한이 또한 죽자 헌종(憲宗:11대 군주)이 종정소경 이효성을 시켜 애등리라골밀시합비가보의가한 이라고 책봉했다.<신당서 회홀전> |
위의 연표를 살펴보면 당과 토번의 관계는 화평관계이니 전과 별 다름이 없었다. 따라서 이때 역시 회홀과의 동맹은 그 중요성이 떨어지게 되었고 그래서 구당서 회홀전에는 회홀의 비가보의 가한(10대 가한)을 책명했다는 기록이 없고 신당서 회홀전과 자치통감에는 그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