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252,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96, 5. 토번의 침공-48)

상 상 2016. 7. 13. 17:44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252,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96, 5. 토번의 침공-48)

 

차례

 

. 관련 사료

1. 구당서 토번전()

2. 구당서 토번전()

3. 신당서 토번전

4. 구당서 돌궐전

5. 신당서 돌궐전

6. 구당서 측천본기

7. 신당서 측천본기

8. 구당서 거란전

9. 신당서 거란전

10. 구당서 발해전

11. 신당서 발해전

12. 구당서 숙종본기

13. 구당서 회홀전

14. 신당서 회골전

15. 구당서 남조전

16. 신당서 남조전

17. 구당서 신라전

18. 신당서 신라전

19. 삼국사기 신라본기

 

.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

1. 이진충의 난 이전

2. 이진충의 난

3. 돌궐족 묵철의 침공

4. 안사의 난

5. 토번의 침공

6. 토번의 침공 이후

7. 민란의 발생과 남조의 침공

8. 황소의 난

9. 절도사의 시대

10. 당의 멸망

 

. 통일신라와 당

1. 통일신라 이후의 당나라 약사

2. 신구당서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3.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4. 사료를 통합해서 본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

 

 

.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

5. 토번의 침공

1) 연표

2) 토번의 침공 해설

(1) 76310: 토번의 장안 점령

(2) 7831: 청수회맹

(3) 787515: 평량회맹

(4) 8211010: 장안회맹(장경회맹)

 

 

(3) 787515: 평량회맹-1

 

회맹 장소가 평량(平涼)인데 이곳은 현재 감숙성 평량현으로 장안 서북쪽 243km에 있다

이는 청수회맹 때보다 당나라쪽으로 약 20km 더 들어간 곳이다.

다시말해서 청수회맹 때보다 토번이 당나라의 영토를 더 잠식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이 회맹 때 토번이 무력 사용하여 당의 고관 60여 명을 체포하고, 죽인 병사가 5, 포로로 잡은 병사가 천여 명이었다. 이러한 사건은 당나라가 토번에게 번번히 거짓말을 하고, 굳게 맺은 약속도 져버리며,

약속한 사항도 제멋대로 번복하는 등의 행위를 토번이 힘으로 응징한 것이다. 그리고

 

6월 토번은 전염병이 크게 돌자 염주와 하주에서 성문과 건물을 불지르고 성벽을 훼손한 뒤 버리고 돌아갔다. 이는 평량회맹을 하기 전에 당이 부탁한 사항을 들어주기로 한 약속을 토번이 지킨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는 큰 실수였다. 그렇게 군사적 경제적으로 중요한 두 개의 주()를 당이 공짜로 접수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8월에는 회흘의 가한이 사신을 보내 다시 화친을 청한다.

그 달(8)에 토번이 강(), 토욕혼()의 무리를 반구(潘口)에 주둔, 병사를 3등분하여 농주와 견양 사이로 나아갔다. 이에 장안의 사람들이 떨며 두려워하여 사인(士人)과 백성들이 분주히 달아났다.

 

9월에는 당이 군사 3천으로 무공을 지키게 하고, 당량신을 불러 백리성을 지키게 하였는데

토번이 점령한 곳에서 수많은 백성을 끌고 갔다.

 

10월에 토번이 장무성에 다시 이르자, 이 이후로 적의 기병이 수시로 경주(), 빈주() 사이를 왕래하고

토번이 옛 원주성을 수리하여 많은 군사를 주둔시켰다.

 

788

5월 토번의 3만여 기병이 경주(), 빈주(), 녕주(), 경주(), 인주() 등으로 들어와서 팽원현의 관청을 불태우고 수만 명을 포로로 잡아갔다.

 

이때, 토번과 당의 관계에 대한 매우 중요한 기록이 있으니 바로 이것이다

앞서 토번은 대개 가을과 겨울에 쳐들어 왔다가, 봄이 되어 질병이 많이 돌면 퇴각했다.

이번 침범은 바로 한여름이었으나 전염병이 없었다.

그 까닭은 중국 사람으로 포로가 된 사람들에게 재물을 두터이 주고, 그들의 처자를 인질로 삼아,

토번 장수의 수하가 되게 하여 쳐들어왔기 때문이었다.


9월에 토번이 또 영주(寧州)에 쳐들어왔다. 이렇게 되자,

 

10월 당 덕종이 자신의 딸인 함안공주를 회흘 가한에게 시집보낸다. 회홀이 자신의 공을 믿고 장안에서 그렇게 난동을 부리고 횡포를 부려서 그들을 내보내며 관계를 끊어 놓고도 토번의 공격에 견디다 못해 차라리 횡포를 부리는 회홀과 손을 잡는게 당나라의 안전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여 당나라가 회홀과 또다시 혼인동맹을 맺은 것이다.

 

789

10: 위고가 검남의 병사를 이끌고 대등에서 싸워 오랑캐의 장수를 죽이니, 서남 지역이 조금 안정을 되찾았다

 

790

토번이 마침내 북정도호부를 함락하였다. 이것은 주차의 난 때 당이 토번에게 주기로 한 북정도호부를 토번 자신이 힘으로 빼앗은 것이다. 또한 이는 토번이 당나라와 회홀의 동맹을 힘으로 응징한 것이다.

 

당나라 내부에서는, 성덕절도사 왕무준이 자신을 배반한 체주(棣州)를 공격했다가 패하고 패주(貝州)를 공격하여 마침내 체주 돌려받는다. 공격과 영토의 반환을 자기들끼리 하고 당은 아무런 관여를 못하고 있다.

 

791

가을, 회홀이 당나라 북정 절도사 양습고와 연합하여 북정도호부를 회복하려 했으나 토번, 갈록 등에게 크게 패하여 절반 이상이 죽었다. 이 싸움으로 회홀은 드디어 크게 흔들려 내분으로 이어지고 마침내 멸망의 길로 간다.

 

792

4월 토번이 영주(靈州)를 습격하고, 수구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으며,

6월에 토번이 또 경주(涇州)를 침범하여, 당의 수착사 당조신이 싸웠으나 이기지 못했다.

9월에는 서천절도사 위고가 토번의 유주를 공격하여, 대장 논찬열과 수령을 잡아다가

장안에 바쳤다.

11월에는 산남서도절도 엄진이 토번을 방주 및 흑수보에서 격파하였다고 되어 있으니

이때 사천지방에서는 전과를 부풀려 보고하는 것이 관행이었다.

 

한편 이해에 당의 내부를 보면

선무절도사 유현좌가 사망하자 무리들이 그의 아들 유사녕을 세우니 당 덕종은 유사녕을 선무절도사로 삼았다

또한 평로절도사 이납이 사망하자, 무리들이 그의 아들 이사고를 지유후로 세우니 당은 이사고를 평로절도사로 삼는다. 역시 권력을 자기들 마음대로 결정하고 세습하고 있으며 당은 아무런 권한도 없이 결과만을 받아들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