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251,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95, 5. 토번의 침공-47)

상 상 2016. 7. 11. 17:07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251,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95, 5. 토번의 침공-47)

 

차례

 

. 관련 사료

1. 구당서 토번전()

2. 구당서 토번전()

3. 신당서 토번전

4. 구당서 돌궐전

5. 신당서 돌궐전

6. 구당서 측천본기

7. 신당서 측천본기

8. 구당서 거란전

9. 신당서 거란전

10. 구당서 발해전

11. 신당서 발해전

12. 구당서 숙종본기

13. 구당서 회홀전

14. 신당서 회골전

15. 구당서 남조전

16. 신당서 남조전

17. 구당서 신라전

18. 신당서 신라전

19. 삼국사기 신라본기

 

.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

1. 이진충의 난 이전

2. 이진충의 난

3. 돌궐족 묵철의 침공

4. 안사의 난

5. 토번의 침공

6. 토번의 침공 이후

7. 민란의 발생과 남조의 침공

8. 황소의 난

9. 절도사의 시대

10. 당의 멸망

 

. 통일신라와 당

1. 통일신라 이후의 당나라 약사

2. 신구당서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3.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4. 사료를 통합해서 본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

 

 

.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

5. 토번의 침공

1) 연표

2) 토번의 침공 해설

(1) 76310: 토번의 장안 점령

(2) 7831: 청수회맹

(3) 787515: 평량회맹

(4) 8211010: 장안회맹(장경회맹)

 

 

(2) 7831: 청수회맹

회맹장소가 청수현(淸水縣)인데 이곳은 현재 감숙성 청수현으로 장안 서쪽 263km이다. 이는 767년 당이 토번과의 경계를 봉림관으로 삼자고 한 것에 비해 당나라쪽으로 약 300km 들어간 곳이다. 그만큼 토번이 당의 영토를 크게 잠식하였던 것이다.

청수회맹에서 약정한 토번과 당의 경계를 보면 대표적인 곳이 바로 청수현이다.

이곳은 장안이 속해있는 섬서성과 경계를 이루고 있을 만큼 장안과 가까운 곳이다.

이는 당나라의 영토가 장안에서 가까운 곳만 당나라 영토이고 오늘날 감숙성, 청해성, 티벳, 신장 등지는 당나라의 영토가 아니었음을 말하고 있다. 그래서 신구당서 지리지를 보면 당의 영토가 한나라에 미치지

못한다고 누누이 강조하고 있다.

 

7월에 다시 장안의 서쪽 교외에서 회맹하는데 이것은 청수회맹 때 국경이 확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의 내부에서는

10월에 경원병변(涇原兵變)이 일어나 경원병사들이 경원절도사 요령언을 억류하고 장안(長安)에 진입하므로

당 덕종이 황급히 도주하여 함양에 도착하니 경원군사들이 백성들과 부고를 약탈하고 장안에 있던 전 경원절도사 주차를 추대하였다. 이에 주차는 장안(長安)에서 진()나라를 세우고 황제를 칭하며 당나라 황족 77명 주살한다(주차의 난)

 

784

2월 토번이 주차(硃泚)의 난을 토벌하는데 도움 주었다,

그 대가로 당은 경주()와 영주() 등 네 개의 주를 토번에 할양하기로 약정해 놓고 막상 주차의 난이

평정되자 당나라는 그것을 주지 않았다.

 

이때 당의 내부를 보면,

주차는 국호를 진()에서 한()으로 바꾸고, 한원천황이라고 칭한다.

또한 회서절도사 이희열 역시 초()나라를 세우고 황제 칭한다.

 

그리고 128일 토번의 재상 상결찬이 구원군을 보내기로 하였다.

위박절도사 전열은 술취해 잠든 틈에, 사촌인 전서에게 피살되고 전서는 무리들을 장악하여 권지군부가 되니

당은 전서를 위박절도사로 삼는다. 역시 권력은 자기들끼리 세습하고 있으며 당은 결과를 인정하고 벼슬을 주는데 그치고 있다.

 

한편 당 덕종은 226일 경기도 봉천(奉天)에서 다시 몽진하여 주질(盩厔), 낙곡(駱谷), 성고(城固)를 거쳐

321일 남정(한중)에 도착한다.

삭방절도사 혼감은 사곡(斜谷)에서 출격하여 경기도 서원(西原)에서 토번의 2만군과 합류하여 무정천(武亭川)에서 주차의 한군(漢軍)을 격파한다.(410)

 

이성이 총공격하여 장안성 밖 미창촌(米倉村)에서 한군(漢軍) 격파하고 다시 장안성 광태문에서 격파하고

궁궐 북쪽 밖 신가촌을 공파하고 백화문을 돌파하니 주차의 1만여 군사는 서쪽으로 도주하여 장안(長安) 탈환

하였다.(527) 이에 당 덕종이 713일 장안에 환궁하였다. 그뒤 당 덕종은 토번에 주기로 했던, 서역의 안서(安西)도호부와 북정(北庭)도호부, 경주()와 영주() 을 주지 않았다(726)

그리고 당 덕종은 환관 두문장과 왕희천에게 금군(禁軍)을 관장케 하여(1030)

이로부터 환관이 군권을 장악하기 시작하였다.

 

785

노룡유후이며 기왕(冀王)인 주도가 병사(病死)하자, 무리들이 전 탁주자사 유평을 지군사로 세우니

당 덕종은 유평을 노룡절도사로 삼는다. 다시 유평 병사(病死)하자, 그 아들 유제를 당이 권지절도사로 삼는다. 역시 자기들끼리 권력을 결정하고 세습하며 당은 결정권 없이 결과만을 받아들이고 있다.

 

786

8월 이렇게 당나라가 주기로 했던 땅을 주지 않자 토번이 경주(), 농주(), 빈주(), 영주()

여러 도()를 침략하였고 이에 장안에 계엄령이 내려졌다.

9월에 토번의 유격대가 호치에 미치자, 당은 군대를 함양에 주둔하게 하여 이를 막고

10월 토번이 봉상을 침범하자, 이성(李晟)이 이를 막았다. 이어서

11월 토번이 염주를 함락하고

12월 토번이 하주를 함락시키고 은주를 공격하였다.

염주와 하주는 당나라의 중요한 군사 방어기지이자 경제적 요충지인데 토번이 빼앗은 것이다.

이렇게 당이 약속을 위반하자 토번이 직접 힘을 사용하여 땅을 빼앗는 것이다.

 

 

한편 당나라 내부를 보면,

이해 1월 지방의 조세와 부세를 모두 관찰사와 주()의 자사에 위임시켰고

초나라 황제를 칭하던 이희열이 대장 진선기에 독살되고 진선기는 당()에 투항한다.

그리고 당나라에서는 연이은 기근 이후 드디어 보리가 익으니, 갑자기 폭식하여 죽은자 1/5이었다

이렇게 되자

 

787

봄 당이 토번과 또 회맹하기로 하고 회맹 전에 염주와 하주를 돌려달라고 부탁한다

5월 토번이 토리수에서 회맹하자고 하니 당이 그러기로 약정한 후 당나라가 평량으로 번복하였다.

그리하여 평량회맹이 이루어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