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233,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77, 5. 토번의 침공-29)

상 상 2016. 5. 25. 19:07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233,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77, 5. 토번의 침공-29)

 

차례

 

. 관련 사료

1. 구당서 토번전()

2. 구당서 토번전()

3. 신당서 토번전

4. 구당서 돌궐전

5. 신당서 돌궐전

6. 구당서 측천본기

7. 신당서 측천본기

8. 구당서 거란전

9. 신당서 거란전

10. 구당서 발해전

11. 신당서 발해전

12. 구당서 숙종본기

13. 구당서 회홀전

14. 신당서 회골전

15. 구당서 남조전

16. 신당서 남조전

17. 구당서 신라전

18. 신당서 신라전

19. 삼국사기 신라본기

 

.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

1. 이진충의 난 이전

2. 이진충의 난

3. 돌궐족 묵철의 침공

4. 안사의 난

5. 토번의 침공

6. 토번의 침공 이후

7. 민란의 발생과 남조의 침공

8. 황소의 난

9. 절도사의 시대

10. 당의 멸망

 

. 통일신라와 당

1. 통일신라 이후의 당나라 약사

2. 신구당서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3.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4. 사료를 통합해서 본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

 

 

.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

1. 이진충의 난 이전

2. 이진충의 난

3. 돌궐족 묵철의 침공

4. 안사의 난.

5. 토번의 침공

1) 연표

 

1) 연표- 29

기 사

821

장경 원년(821) (회홀의) 비가보의가한(毗伽保義可汗)이 죽자 사흘 동안 조정의 일을 보지 않고 관리 3품 이상 관리에게 홍려시에 가서 그 사자에게 조문을 하게 했다.

4월에 [황제가] 전정에서 회골 군장을 등라우록몰밀시구주록비가가한(登羅羽錄沒密施句主錄毗伽可汗: 11대 가한)으로 책봉해 주고, 소부감 배통을 검교좌산기상시 겸 어사대부로 삼아 부절을 갖고 책립하면서 조문하는 사신을 맡게 했다.

5월에 회골 재상, 도독, 공주, 마니 등 573명이 공주를 맞이하기 위해 조정에 들어오자 홍려시에 안치시켰다. [그리고] 조칙을 내려 말했다. “태화공주가 회골에 시집을 가서 가돈이 되니 마땅히 중서사인 왕기를 홍려시에 보내 알리게 하고, 좌금오위대장군 호증을 검교호부상서 지절충송공주입회골급책가한사(持節充送公主入迴鶻及冊可汗使)로 삼으라. 광록경 이헌을 어사중승을 더해 부사로 삼으라. 태상박사 은유를 전중시어사로 바꾸어 판관을 맡도록 하라. 토번이 청새보(靑塞堡)를 공격한 것은 [당나라가] 회흘과 화친했기 때문이었다. 염주자사(鹽州刺史) 이문열이 군대를 내서 격퇴하게 하도록 하라.” 회골이 아뢰었다. “1만 기()로 북정에서 출동하고, 1만 기()로 안서에서 출동해서 토번을 꺾고 태화공주를 맞이해 귀국하겠습니다.” 그 달에 조칙을 내려 말했다. “태화공주가 회골로 시집을 가니 마땅히 특별한 부서를 설치하는데, 그 관속은 반드시 친왕의 예에 따르게 하여라.” <구당서 회홀전>

 

참고

청새보(靑塞堡): 영하 회족자치구 영무(寧夏回族自治區 靈武市) 서남쪽

염주(鹽州): 섬서성 정변현(陝西省 榆林市 定边县,定邊)- 장안 북북서쪽 378km

북정도호부(北庭都護府): 신강 위그루 자치구 길목살이현 북정진

(新疆 昌吉回族自治州 吉木萨尔县 北庭镇)- 장안 북서쪽 2010km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신강성 쿠차(新疆省 库车-庫車)-장안 서서북쪽 2414km

821

회흘은 함안공주가 죽은 이후 여러 번 귀부해 과거의 우호 관계를 이어가기를 청했으나 오래 동안 허락을 받아내지 못했다. 원화 년간 말에 이르러 그 요청이 더욱 간곡하게 되자 헌종이 회골[北虜]이 왕실에 공을 세운 바가 있고, 또한 토번이 매년 변경의 걱정거리가 된다고 하면서 마침내 시집보낼 것을 허락했다. 이미 허락했으나 헌종이 붕어해버렸다. 목종(穆宗: 12)이 즉위해 해를 넘겨 열 번째 누이를 태화공주로 삼아 장차 시집을 보내려고 하자 회흘 등라골몰밀시합비가가한(登邏骨沒密施合毗伽可汗: 12대 가한)이 사신으로 이난주(伊難珠) 구록도독사결병외재상(句錄都督思結并外宰相) 부마(駙馬) 매록사마(梅錄司馬), 그리고 공주 한 사람, 엽호공주(葉護公主) 한 사람, 그리고 달간과 낙타와 말 천여 마리를 보내 맞이하게 했다. 태화공주가 회흘 나라로 떠나려고 할 때 목종이 친히 통화문 좌측까지 와서 환송하면서 백관을 장경사앞에 도열하게 했는데, 그 의장이 심히 성대해 남녀 백성들이 모두 와서 구경을 했다.

12월 진무절도[] 장유청이 아뢰어 말했다. “조칙에 따라 군사 3천 명을 울주(蔚州)로 보내야 하는데, 여러 번 내부에서 이미 천여 명을 징발했으니 나머지 2천 명은 태화공주가 국경을 빠져 나가기를 기다려 징발해 보내겠나이다.” 또한 아뢰었다. “천덕[](天德軍)에서 보내온 편지에서 회골 760명이 낙타와 말, 그리고 수레를 끌고 이어 황로천(黃蘆泉)에 이르러 공주를 맞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풍주자사(豐州) 이우가 아뢰었다.

태화공주를 맞이하기 위해 회골 3천 명이 유천(柳泉)에서 군영을 짓고 토번과 대결하고 있습니다.” <구당서 회홀전>

 

참고

장경사: 섬서성 서안시 동쪽 당나라 시대(唐代) 통화문 밖에 있었던 사찰

울주(蔚州: 치소, 지금 하북성 울현)

천덕군(天德軍): 내몽고 자치구 오납특전기 동북쪽.

()은 당나라 시대(唐代) 둔방(屯防) 단위의 명칭

황로천(黃蘆泉): 지금 산서성 문희현 동쪽에 위치하고 있는 우물

풍주(豐州): 내몽고자치구 오랍전기? 서북 소소향 토성촌의 고성(古城)

유천(柳泉): 감숙성 진원현(甘肅省 镇原县-鎭原)에 위치한 곳으로 추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