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본기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제 26대 영양왕 -5

상 상 2012. 2. 10. 18:58

22 년 (AD 611) : 양제가 고구려를 토벌하게 하였다.

[번역문]

22년(611) 봄 2월에 양제가 조서를 내려 고구려를 토벌하게 하였다.

여름 4월에 [황제의] 행차가 탁군의 임삭궁(臨朔宮)에 이르니, 사방의 군사들이 모두 탁군으로 모였다.

 

23 년 (AD 612) : 정월 임오(壬午)에 황제가 조서를 내렸다.

[번역문]

23년(612) 봄 정월 임오(壬午)에 황제가 조서를 내렸다.

『고구려의 보잘 것 없는 무리들이 미욱스럽고 공손하지 못하여, 발해(渤海)와 갈석(喝石) 사이에 모이고,

요수(遼水)와 예수(濊水)의 경계를 거듭 잠식하였다. 비록 한(漢)나라와 위(魏)나라가 거듭 주륙하여 소굴이 잠시 위태로왔으나,

난리로 막힘이 많자 부족이 다시 모여, 지난 시대에 냇물과 수풀처럼 모여, 지금까지 번창하였다.

 

돌아보건대 저 중국의 땅이 잘리어 오랑캐의 부류가 되었다. 세월이 오래되어 악이 쌓여 가득차니, 하늘의 도가 음란한 자에게 재앙을 내리고, 망할 징조가 이미 나타났다. 떳떳한 도를 어지럽히고 덕을 무너뜨림이 이루 헤아릴 수 없으며, 악을 가리고 간사함을 품은 것은 [헤아리기에] 날이 오히려 부족할 정도이다.

 

[조서를] 보내 엄격히 알린 것도 일찍이 면대(面對)하여 받지 않았으며, 조정에 알현하는 예도 몸소 하기를 즐겨하지 않았다.

도망간 반도(叛徒)들을 꾀어냄이 끝닿는 데 모르고, 변방에 가득하여 봉후(烽候)를 괴롭히니, 문빗장과 딱다기가 이로써 조용하지 못하고, 백성이 그로 말미암아 생업을 폐하게 되었다.

 

옛날에 정벌할 때 하늘의 그물에서 빠졌으며, 이전에 사로잡아 죽일 것도 늦추어주고, 뒷날 복종하여 목베임도 당하지 않게 해주었는데, 일찍이 은혜를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악을 쌓아, 거란의 무리를 합쳐서 바다의 수자리 군사들을 죽이고, 말갈의 습관을 익혀 요서를 침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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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삼국사기 원본 출처: http://koreandb.nate.com/history/saki/

 

2. 해설 및 분석:

1)“고구려의 보잘 것 없는 무리들이 미욱스럽고 공손하지 못하여, 발해(渤海)와 갈석(喝石) 사이에 모이고,

요수(遼水)와 예수(濊水)의 경계를 거듭 잠식하였다.”는 것을 보면,

이때는 고구려가 발해와 갈석(산해관 서쪽) 사이를 차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고구려 영토가 갈석(산해관 서쪽 난하부근)까지 임을 알 수 있습니다.

 

☆ 본문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문장들이 고구려와 중국의 진정한 관계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

(사람은 서로 싸울 때, 특히 죽이고자 할 때 진실한 말이 나오는 법입니다)

 

2) [조서를] 보내 엄격히 알린 것도 일찍이 면대(面對)하여 받지 않았으며, 조정에 알현하는 예도 몸소 하기를 즐겨하지 않았다.

(원문: 移告之嚴 未嘗面受 朝覲之禮 莫肯躬親)

 

⇒ 이 말은 고구려 임금이 중국 황제라는 사람을 황제라고 인정하지 않았음과

고구려 임금 자신도 중국의 신하가 아니라는 것을 행동으로 보여준 예입니다.

 

고구려 임금은 자신과 중국 임금이 서로 대등하다고 생각한 것이고 그래서‘[조서를] 보내 엄격히 알린 것도 일찍이 면대(面對)하여 받지 않았으며, 조정에 알현하는 예도 몸소 하기를 즐겨하지 않’은 것입니다.

 

중국을 통일한 수나라에게도 이런 식인데 중국을 통일 하기 전의 왕조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따라서 여태까지 중국에서 고구려 임금을 무엇에 봉했다느니 책봉했다느니 한 것은

중국에서 자기 혼자 그렇게 하고, 자기들 사서에 그렇게 기록해 놓은 것뿐이지

고구려에게는 아무런 영향도 없고 소용도 없는 것으로써 다 헛말이며 실제도 아니고 거짓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3) 도망간 반도(叛徒)들을 꾀어냄이 끝닿는 데 모르고, 변방에 가득하여 봉후(烽候)를 괴롭히니,

문빗장과 딱다기가 이로써 조용하지 못하고, 백성이 그로 말미암아 생업을 폐하게 되었다.

(원문: 誘納亡叛 不知紀極 充斥邊垂 亟勞烽候 關柝以之不靜 生人爲之廢業)

 

⇒ 고구려와 당시 중국 여러나라가 서로 공격하는 사이이므로 서로 대등하고 맞먹는 관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수직적, 위 아래 관계가 아님)

따라서 고구려 임금을 책봉했다느니 하는 기록은 거짓이었음을 또한번 알 수 있습니다.

 

4) ① 거란의 무리를 합쳐서 바다의 수자리 군사들을 죽이고, 말갈의 습관을 익혀 요서를 침범하였다.

② 이보다 먼저 개황(開皇) 17년(A.D.597; 고구려高句麗 영양왕嬰陽王 8년)에 수문제(文帝)가 소위 새서(璽書-천자의 조서)라는 것을 통하여 영양왕에게 말한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옵니다

“말갈(靺鞨)을 못견디게 괴롭히고 거란(契丹)을 금고(禁錮)시켰소.”(①②출처: 수서 동이열전 고구려전)

 

⇒ 이 두 구절을 합해서 보면 고구려는 거란을 그 아래두고 마음대로 가두거나

혹은 마음대로 군사로 동원하여 고구려 군사와 합쳐 수나라 수군을 쳐서 죽였으며

말갈 역시 고구려 휘하에 두고 마음대로 다루거나 군사로 동원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고구려는 거란과 말갈을 종으로 부려 먹었다는 말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