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181,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25), 돌궐족 묵철의 침공-19)

상 상 2016. 1. 13. 17:24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181,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25), 돌궐족 묵철의 침공-19)

 

차례

 

. 관련 사료

1. 구당서 토번전()

2. 구당서 토번전()

3. 신당서 토번전

4. 구당서 돌궐전

5. 신당서 돌궐전

6. 구당서 측천본기

7. 신당서 측천본기

8. 구당서 거란전

9. 신당서 거란전

10. 구당서 발해전

11. 신당서 발해전

12. 구당서 숙종본기

13. 구당서 회홀전

14. 신당서 회골전

15. 구당서 남조전

16. 신당서 남조전

17. 구당서 신라전

18. 신당서 신라전

19. 삼국사기 신라본기

 

.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

1. 이진충의 난 이전

2. 이진충의 난

3. 돌궐족 묵철의 침공

4. 안사의 난

5. 토번의 침공

6. 토번의 침공 이후

7. 민란의 발생과 남조의 침공

8. 황소의 난

9. 절도사의 시대

10. 당의 멸망

 

. 통일신라와 당

1. 통일신라 이후의 당나라 약사

2. 신구당서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3.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4. 사료를 통합해서 본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

 

 

.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

1. 이진충의 난 이전

2. 이진충의 난

3. 돌궐족 묵철의 침공

1) 연표

2) 연표 분석 및 해설

3) 요약

 

 

2) 연표 분석 및 해설:

이진충의 난이 미친 파장

(1) 연도별 분석 및 해설(698~ 755)

(2) 나라별 분석 및 해설

 

 

(1) 연도별 분석 및 해설-9

 

본론으로 돌아와서.....

 

735

정월, 가돌우의 머리를 동도(낙양)에 전하니 이과절을 북평군왕으로 삼았으나 그해, 이과절은 가돌우의 남은 무리인 니예(泥禮)에게 살해당했고 이과절의 여러 아들들도 함께 살해당했으나 오로지 한 명의 아들인 날건(剌乾)만이 달아나 안동도호부에 투항해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거란도 또한번 뒤집어 진 것이다.

 

그리고, 중요한 서쪽 토번에서 일이 일어났는데

 

736

토번이 서쪽으로 가서 발률(勃律)을 공격하자 발률에서 사신을 보내 급함을 알리니,

당 현종이 사신을 토번에 파견하여 군대를 멈출 것을 명령하였다.

토번이 명령을 받아들이지 않고 기어이 발률국을 공격하니 당 현종이 매우 노했다.

당시 최희일이 양주(涼州)에서 지키고 있었는데 최희일과 토번 장군 걸력서가 백구(白狗)를 죽여 결맹하고

각기 수비를 철거했다.

당나라는 이 틈을 타고 최희일로 하여금 토번을 습격하게 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최희일은 이 때문에 양심의 가책을 받고 병들어 죽었다.

이에 당 현종은 두희망을 농우절도사로, 태복경 왕욱을 익주장사 검남절도사로 삼아 토번을 토벌하게 했다.

그리고 경계를 표시한 비석을 훼손하게 했다.

 

이렇게 또한번 야비한 수작으로 토번을 배신한 것이다.

그리고 동쪽 발해에 대해서는

 

737

(개원) 25(737) 대무예가 병으로 죽으니, 그의 아들 대흠무가 왕위에 올랐다. (당 현종은) 내시 단수간을 보내 대흠무를 책봉하여 발해군왕으로 삼는 동시에 그의 아버지를 뒤이어 좌효위대장군 홀한주도독으로 삼았다. 대흠무는 조명(詔命)을 받들고 경내에 사면령을 내리는 한편, 단수간의 편에 사신을 보내어 입조하고 공헌(貢獻)하였다.

 

이때는 당이 돌궐의 화친정책으로 힘이 생겨 돌궐 군주를 매수와 이간질로 죽이고 거란의 권력자도 매수와 이간질로 죽였으며 토번도 야비한 배신으로 침략하는 행위를 하던 때이다. 그러나 발해에게는 한번 수작을 벌렸다가 혼이 난 경험이 있어서 인지 아니면 거리가 너무 멀어서인지 별다른 짓은 못하고 사신까지 보내 화친정책을 쓰고 있다.

 

그 다음, 다시 서쪽 토번에 대하여

738

4월에 두희망이 무리를 이끌고 토번의 신성(新城)을 함락시키고,

7월에는 토번의 하교(河橋)를 침범하고, 황하()의 왼쪽에 염천성을 쌓았다. 또 왕욱은 안융성을 공격했다.

 

당나라가 이런 짓을 하니 참다못한 토번은 그해 9월 정예 군사를 모두 모아 안융성을 구원하고, 당나라군을 대파한다. 이렇게 되니 왕욱은 몸을 빼내어 달아났으나, 장사(將士) 이하 수만 명 및 군량, 군수품 등이 모두 토번의 손에 넘어갔다. 토번이 본때를 보인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739

7월에 토번이 다시 백초군, 안인군 등을 공격하였다.

당 현종은 왕욱이 패배한 뒤 장유(張宥)와 장구겸경(章仇兼瓊)에게 안융성을 취할 계책을 세우게 하였다.

그래서,

 

740

, 장구겸경이 안융성 안에 있는 토번의 적도국을 구워삶아, 적도국 등이 성을 넘어 귀부하자 이를 기회로 당나라군을 끌어들여 안융성에 입성하고, 토번 병사들을 모두 죽인 뒤, 허원으로 하여금 지키게 하였다.

그러자 그해 10월 토번이 다시 무리를 이끌고 안융성 및 유주를 공격하였으나 당시 날씨가 매우 추워 스스로 무리를 이끌고 후퇴했다. 이에 당 현종이 안융성을 평융성으로 고쳤다.

 

역시 중국인은 그들의 특기인 금품으로 사람을 구워삶아 자기들의 뜻을 이룬 것이며,

또다시 토번을 배신한 것이다.

이번까지 당나라는 공주를 시집보낼 때 양국평화를 약속했고, 적령에서 비석을 세우며

서로 침략하지 않기로 약속하였지만 번번히 당나라가 그 약속을 깨버린 것이다.

 

한편, 북쪽의 돌궐에서는

 

등리가한과 그의 어머니가 서살(西殺)을 유인해 베고 그의 백성을 모두 병합하자 좌살이 화가 자기에게 미칠까 두려워해 군대를 보내 등리가한을 공격해 죽이고 자신이 자립해 오소미시가한이라 불렀다.

하지만 좌살 또한 나라 사람들이 따르지 않고 발실밀 부락이 군대를 일으켜 공격하자 좌살이 크게 패해 몸만 빠져 나와 달아나서 나라가 크게 어지러워지게 되었다.

 

이렇게 되니 서살의 처자와 묵철의 손자인 발덕지 특근, 비가가한의 딸인 대락공주, 이연가한의 소처(小妻)인 여새복, 등리가한의 딸인 여촉공주, 아포사힐리발 등이 모두 그 부락 백성들을 이끌고 차례대로 와서 항복했다.(구당서 돌궐전)

 

한마디로 돌궐에서 또다시 내분이 일어나 붕괴된 것이다.

그런데 신당서 돌궐전은 돌궐의 멸망시점에 대하여 다르게 기록하고 있어 돌궐의 역사를 좀 더 기록하고 있다. 그것은 좀 더 아래에 쓰여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