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신라와 당의 관계-169,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13), 돌궐족 묵철의 침공-7)
차례
가. 관련 사료
1. 구당서 토번전(상)
2. 구당서 토번전(하)
3. 신당서 토번전
4. 구당서 돌궐전
5. 신당서 돌궐전
6. 구당서 측천본기
7. 신당서 측천본기
8. 구당서 거란전
9. 신당서 거란전
10. 구당서 발해전
11. 신당서 발해전
12. 구당서 숙종본기
13. 구당서 회홀전
14. 신당서 회골전
15. 구당서 남조전
16. 신당서 남조전
17. 구당서 신라전
18. 신당서 신라전
19. 삼국사기 신라본기
나.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
1. 이진충의 난 이전
2. 이진충의 난
3. 돌궐족 묵철의 침공
4. 안사의 난
5. 토번의 침공
6. 토번의 침공 이후
7. 민란의 발생과 남조의 침공
8. 황소의 난
9. 절도사의 시대
10. 당의 멸망
다. 통일신라와 당
1. 통일신라 이후의 당나라 약사
2. 신구당서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3.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4. 사료를 통합해서 본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
나.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
1. 이진충의 난 이전
2. 이진충의 난
3. 돌궐족 묵철의 침공
1) 연표
2) 연표 분석 및 해설
3) 요약
1) 연표(698년~755년)-7
< 연표 7: 돌궐족 묵철의 침공(730년~734년) >
===========================================
730 |
[개원] 18년(730) 10월에 (토번의) 명실렵(名悉獵) 등이 서울(장안)에 이르자, 황상이 선정전에 행차하시고, 우림장을 진열하여 이들을 접견하였다. (명)실렵은 자못 서적과 문장에 익숙하여, 앞서 금성공주를 마중하러 장안에 왔을 때, 당시 조정에서는 모두 그의 언변이 재능 있다고 칭찬했다. 이때 황상이 그를 안쪽에 마련된 소규모 연회에 불러 환담을 나누며 예우하고, 자포(紫袍), 금대(金帶) 및 어대(魚袋)와 시복(時服), 증채(繒彩), 은반(銀盤), 호병(胡瓶)을 주었으며, 또한 별관에서 매우 후하게 대접했다. (명)실렵은 자포, 금대와 여러 기물은 받았으나 어대를 물려 사양하며 말하기를, “본국에는 이러한 장복(章服)이 없으니, 감히 이런 특별한 상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고 황상이 가상하게 여겨 이를 허락했다. 어사대부 최림(崔琳)을 불러 사신에 임명하고 토번에 답례를 행하게 했다. 또한 적령(赤嶺: 일월산)에 각자 경계를 표시한 비석을 세워 다시는 서로 침공하지 않기를 서약했다.
<구당서 토번전>
[개원] 18년(730), 가돌우가 (이)소고를 죽이고 부락을 거느리고 아울러 해(奚)의 무리를 위협해 돌궐에 항복하자 동화공주는 도망쳐 평로군(平盧軍)에 의탁했다. 이에 중서사인 배관과 급사중 설간 등에게 조칙을 내려 경성(장안) 및 관내· 하동· 하남· 하북도에서 씩씩하고 용맹한 병사를 모으게 하고 충왕 (이)준(忠王 浚)을 하북도행군원수로 삼아 그들을 토벌하게 했으나 군대는 끝내 가지 않았다.
<구당서 북적열전 거란전> |
731 |
[개원] 19년(731) 궐특륵이 죽자 금오[위]장군 장거일과 도관랑중 여향에게 인장이 찍힌 조서를 받들고 장례를 조문하게 하고, 황제가 [그를] 위해 비문에 기록하게 하며 또한 묘와 상을 세워 네 벽면에는 싸우는 모습을 깎기 위해 좋은 수공장인 여섯 명을 보내 정확하고 닮게 그리게 했는데, [이는] 그 나라에 과거에 없었던 일이라 여긴 묵극련이 보고 몹시 슬퍼했다.
<신당서 돌궐전> |
732 |
(개원) 20년(732년) (대)무예가 그의 장수 장문휴를 보내어 해적을 거느리고 등주자사 위준을 공격하였다. (당현종은) (대)문예를 파견하여 유주에 가서 군사를 징발하여 이를 토벌케 하는 동시에 태복원외경 김사란을 시켜 신라에 가서 군사를 일으켜 발해의 남쪽 지경(南境)을 치게 하였다. 마침 산이 험하고 날씨가 추운 데다 눈이 한길이나 내려서 병사들이 태반이나 얼어 죽으니, 전공을 거두지 못한 채 돌아왔다. (대)무예가 원한을 풀지 못하여 몰래 동도(낙양)에 사자(使者)를 보내어 자객을 빌어 천진교 남쪽에서 (대)문예를 저격케 하였으나, (대)문예는 자객들을 물리쳐서 죽지 않았다. (당 현종은) 하남부에 명하여 그 적(賊)들을 모두 잡아다 죽였다.
<구당서 북적열전 발해말갈전>
[개원] 20년(732)에 궐특근이 죽자 [황제가] 조칙을 내려 금오[위]장군 장거일과 도관랑중 여향에게 새서를 갖고 돌궐에 들어가 궐특근을 조문하고 제사지내게 하면서 비석을 세웠는데, 황제께서 친히 비문(碑文)을 지었고, 또한 사묘(祠廟)를 세워 돌을 깎아서 상(像)을 만들고 네 벽면에는 궐특근이 전쟁과 진영에 있었던 모습을 그리게 했다.
<구당서 돌궐전>
[개원] 20년(732), 조칙을 내려 예부상서 신안왕 (이)의(信安王 禕)를 행군부대총관으로 삼아 무리를 거느리고 유주장사 조함장과 함께 변경으로 나가 그들을 공격해 물리치게 하니 부획한 것이 상당히 많았다. 가돌우는 그의 휘하를 거느리고 멀리 도망쳤고 해(奚)의 무리도 모두 항복하자 [신안왕] (이)의(禕)는 곧 군대를 철수시켰다.
<구당서 북적열전 거란전> |
733 |
다음 해(733년), 가돌우가 또 [다시] 와서 약탈하였다. 유주장사 설초옥이 부장 곽영걸· 오극근· 오지의· 나수충을 보내 정예 기병 만 명을 거느리고 항복한 해(奚)의 무리를 함께 지휘하여 그들을 추격하게 했다. 군대가 유관(渝關: 임유관)의 도산 주위에 도달하자 가돌우는 돌궐 병사들을 지휘하여 관군(당나라군)과 대적했다. 해(奚)의 무리가 마침내 두 마음[兩端]을 품고 흩어져 달아나 요험[險]에 의지하였다. 관군이 크게 패하자 (오)지의와 (나)수충은 휘하를 거느리고 도망쳐 [돌아]왔으나 (곽)영걸과 (오)극근은 진(陣)에서 죽었고, 그 아래의 육천여 명은 모두 적에게 살해당했다.
조칙을 내려 장수규를 유주장사 겸 어사중승으로 삼아 그들을 경략하게 하였다. 가돌우는 점차 (장)수규에게 압박을 당하자 사자를 보내 거짓으로 항복하였다. 이어 또 [무리의 마음이] 미혹되고 안정되지 않자 무리를 이끌고 점차 서북쪽으로 향해 돌궐로 가려 하였다. (장)수규가 관기(管記) 왕회(王悔) 등을 보내 부락으로 가서 그들을 불러와 타이르고 가르치게 했다. 이때 거란의 아관인 이과절(李過折)은 가돌우와 함께 병마[에 관한 일]을 나누어 맡았으나 마음이 맞지 않았는데 (왕)회가 은밀히 유인하자 (이)과절은 밤중에 병사를 거느리고 가돌우 및 그의 지당(支黨) 수십 명을 참수했다.
<이상 구당서 북적열전 거란전>
[개원] 21년(733), 공부상서 이호(李暠)를 토번에 보내 방문하게 했는데, 매번 당나라 사신이 변경에 들어오면 도착한 곳에 갑병(甲兵) 및 기마를 성대하게 늘어놓고, 그 정예를 자랑했다.
<구당서 토번전> |
734 |
[개원] 22년(734), 장군 이전(李佺)을 적령(赤嶺)에 보내 토번과 함께 국경을 나누고 비석을 세웠다.
<구당서 토번전>
[개원] 22년(734)에 소살이 대신 매록철에게 독살되었는데, 약이 퍼졌으나 죽기 전에 먼저 매록철을 토벌해 참하고 그의 일당을 다 죽였다. [그가] 돌아가자 나라 사람들이 그의 아들을 세워 이연가한으로 삼았다. [황제가] 조칙을 내려 종정경 이전에게 가서 조문하게 했고, 아울러 이연[가한]을 책립했으며 [소살을] 위해 비석과 사묘(祠廟)를 세워주고, 사관(史官)인 기거사인 이융에게 그 비문을 지으라고 했다. 오래되지 않아 이연[가한] 역시 병으로 죽자 다시 그의 아우를 세워 등리가한이 되었다.
<구당서 돌궐전>
[개원 22년(734)에] 묵극련의 빈번한 결혼 요청을 황제가 허락하자 이에 가해률필(哥解栗必)을 보내 감사하며 결혼할 날짜를 청했다. 얼마 있어 [묵극련이] 매록철에게 독살이 되나 죽음을 참고 매록철을 죽이고, 그 무리마저 죽이고서야 죽었다. 황제가 장례를 위해 조칙을 내려 종정경 이전에게 장례에 조문하게 하고 묘당을 세웠으며, 조칙을 내려 사관(史官) 이융(李融)을 시켜 그 비문을 적게 했다. 나라사람들이 모두 그 아들을 세워 이연가한이 되었다.
<신당서 돌궐전>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