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신라와 당의 관계-167,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11), 돌궐족 묵철의 침공-5)
차례
가. 관련 사료
1. 구당서 토번전(상)
2. 구당서 토번전(하)
3. 신당서 토번전
4. 구당서 돌궐전
5. 신당서 돌궐전
6. 구당서 측천본기
7. 신당서 측천본기
8. 구당서 거란전
9. 신당서 거란전
10. 구당서 발해전
11. 신당서 발해전
12. 구당서 숙종본기
13. 구당서 회홀전
14. 신당서 회골전
15. 구당서 남조전
16. 신당서 남조전
17. 구당서 신라전
18. 신당서 신라전
19. 삼국사기 신라본기
나.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
1. 이진충의 난 이전
2. 이진충의 난
3. 돌궐족 묵철의 침공
4. 안사의 난
5. 토번의 침공
6. 토번의 침공 이후
7. 민란의 발생과 남조의 침공
8. 황소의 난
9. 절도사의 시대
10. 당의 멸망
다. 통일신라와 당
1. 통일신라 이후의 당나라 약사
2. 신구당서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3.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4. 사료를 통합해서 본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
나.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
1. 이진충의 난 이전
2. 이진충의 난
3. 돌궐족 묵철의 침공
1) 연표
2) 연표 분석 및 해설
3) 요약
1) 연표(698년~755년)-5
< 연표 5: 돌궐족 묵철의 침공(720년~72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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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0 |
[개원] 8년(720) 겨울에 어사대부 왕준을 삭방[도]대총관으로 임명했는데, [왕준이] 서쪽의 발실밀(拔悉密)과 동쪽의 해(奚)와 거란 두 종족을 징발해 내년 가을 초를 작전 시기로 삼아 삭방(朔方)의 병사들을 끌어들여 여러 길로 [나누어] 함께 들어가 계락하(稽落河)부근에서 돌궐의 아장(衙帳)을 포위할 것을 아뢰어 청했다.
소살이 [이 소식을] 듣고 크게 두려워하자 돈욕곡이 말했다. “발실밀은 지금 북정[도호부]에 있고 두 종족과는 동서로 너무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힘을 반드시 합칠 수 없습니다. 왕준의 병마도 생각해보면 또한 이곳에 올 수 없습니다. 반드시 올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가까이 오기를 살폈다가 오면 아장을 북쪽으로 사흘[걸리는] 거리[의 땅으]로 옮기면 당나라 병사들이 식량이 바닥나 자연히 물러날 것입니다. 또 발실밀은 가벼워 이익을 좋아하니 명령을 듣고 반드시 먼저 올 것이고, 왕준과 장가정이 화합하지 않아 주청(奏請)하는 바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반드시 감히 움직이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왕준의 병마가 오지 않고 발실밀이 혼자서 온다면 바로 발실밀의 군대를 격파하고 잡아 형세를 쉽게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구당서 돌궐전> |
721 |
[개원] 9년(721) 가을에 발실밀은 과연 돌궐의 아장까지 왔으나 왕준의 병사들과 [거란과 해] 두 종족이 도착하지 못했다. 발실밀이 두려워 물러나 돌아가려고 하자 돌궐[의 비가가한]이 이를 격파하려고 함에 돈욕곡이 [말리면서] 말했다. “이 무리들은 집까지의 거리가 천리라 [공격하면] 반드시 죽기 살기로 싸울 것이기 때문에 공격할 수 없습니다. 병사들을 이끌고 뒤쫓아 가는 것만 못합니다.” 북정[도호부]에서 2백 리 떨어진 곳에서 돈욕곡은 병사들을 나누어 샛길로 가게 해서 먼저 북정[도호부]를 포위한 다음 병졸들을 풀어 회군하는 발실밀의 돌아오는 무리들을 공격하게 함으로써 [발실밀의 무리들이] 마침내 흩어져 도망해 북정[도호부]로 들어가고자 했으나 이미 성이 함락되어 들어갈 수 없게 되어 돌궐에게 모두가 사로잡혔고 [돌궐은] 아울러 그의 남녀마저 사로잡은 다음에 돌아올 수 있었다. 돈욕곡이 군대를 돌려 적정(赤亭)을 나아가서 양주(涼州)의 양과 말을 노략질했다. 이때 양경술이 양주도독이었는데, 부장(副將) 노공리와 판관(判官) 원징을 보내 군대를 내서 [돈욕곡 무리를 막고] 공격하게 했다. [이 때] 돈욕곡이 말했다 “[양]경술이 만약 성을 지키고 스스로를 굳게 잠그고 있다면 바로 [그와] 화해를 할 것이지만 만약 [그가] 병사를 출동시켜 서로 맞부닥치게 된다면 결전을 벌여야 할 것입니다. 저는 지금 승리[한 기세]에 편승해서 반드시 공을 세울 수 있을 것입니다.” [노]공리 등의 군사들이 산단[현]에 이르러 적을 만나자 원징이 병사들에게 팔을 걷고 활시위를 당기도록 하다가 급하게 소매를 묶도록 했는데, 마침 눈보라로 얼고 찢어져 모두가 활과 화살을 [땅에] 떨어뜨렸기 때문에 관군(당나라군)이 대패했고 원징은 몸만 빠져나와 도망가야 했다. [양]경술은 패전의 책임을 지고 관작을 삭탈 당해 백의(白衣)를 입고 양주[도독의] 사무를 대리[檢校]했다. 소살은 이로 말미암아 [세력을] 크게 떨치게 되었고, 묵철의 백성들을 모두 차지하게 되었다. [소살은] 바로 다시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하고 현종의 아들이 될 것을 청하자 황제가 허락해주었다. 바로 공주와의 혼인도 청했으나 황제가 다만 후한 하사품을 주고 돌려보냈다.
<구당서 돌궐전> |
722 |
[개원] 10년(722), (거란의) 울우가 들어와 알현하고 혼인을 청했다. 황제가 또 종매부(從妹夫)인 솔경령(率更令) 모용가빈의 딸을 봉해 연군공주로 삼아 그에게 시집보냈다.
<구당서 북적열전 거란전> |
723 |
다음 해(723년) 울우가 병으로 죽자 동생인 토우(吐于)가 [그 뒤를] 이어서 그의 무리를 다스리고 형의 관작을 이어받고 다시 연군공주를 처로 삼았다. 토우는 가돌우와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
<구당서 북적열전 거란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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