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대 헌안왕
0 년 (AD 857) : 헌안왕이 왕위에 올랐다.
[번역문]
헌안왕(憲安王)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의정(誼靖)<또는 우정(祐靖)이라고도 하였다.>으로 신무왕의 배다른 동생이다. 어머니는 조명부인(照明夫人)으로, 선강왕(宣康王)의 딸이다. [왕은] 문성왕의 고명(顧命)에 의하여 즉위하였다.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이찬 김안(金安)을 상대등으로 삼았다.
[원문]
憲安王立 諱誼靖 一云祐靖 神武王之異母弟也 母照明夫人 宣康王之女 以文聖顧命卽位 大赦 拜伊湌金安爲上大等
2 년 (AD 858) : 봄 정월에 몸소 신궁에 제사지냈다.
[번역문]
2년(858) 봄 정월에 몸소 신궁에 제사지냈다. 여름 4월에 서리가 내렸다.
5월부터 가을 7월에 이르기까지 비가 내리지 않았다. 당성군(唐城郡)의 남쪽 강가에
큰 고기가 나왔는데, 길이가 40보(步)이고 높이가 여섯 자이었다.
[원문]
二年 春正月 親祀神宮 夏四月 降霜 自五月至秋七月 不雨 唐城郡南河岸
有大魚出 長四十步 高六丈1)
3 년 (AD 859) : 사람들이 굶주렸으므로 왕이 진휼하였다.
[번역문]
3년(859) 봄에 곡식이 귀하여 사람들이 굶주렸으므로 왕이 사자를 보내 진휼하였다.
여름 4월에 명을 내려, 제방을 완전하게 수리하게 하고 농사를 권장하였다.
[원문]
三年 春 王遣使賑救 夏四月 敎修完隄防勸農貴人饑 王遣使賑救 夏四月 敎修完隄防勸農
4 년 (AD 860) : 임해전에서 잔치를 베풀었는데
[번역문]
4년(860) 가을 9월에 왕이 임해전에서 여러 신하들을 모아 잔치를 베풀었는데, 왕족 응렴(膺廉)이 15세의 나이로 그 자리에 참석하였다. 왕이 그의 마음을 알아보려고 갑자기 물었다. “너는 한동안 돌아다니면서 공부했는데, 착한 사람을 본 일이 없는가?” [응렴]이 대답하였다. “저는 일찍이 세 사람을 보았는데, 착한 행실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왕이 “어떤 것인가?” 하니,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한 사람은 귀한 집 자제이면서 남과 사귐에 있어서는 자기를 먼저 하지 않고 남의 아래에 처하였으며, 또 한 사람은 집에 재물이 넉넉하여 사치스러운 옷을 입을 수 있는데도 항상 삼베와 모시옷으로 스스로 즐거워했습니다. 그리고 한 사람은 권세와 영화를 누리고 있었으나 일찍이 한번도 다른 사람에게 위세를 부리지 않았습니다. 제가 본 것은 이와 같습니다.” 왕이 듣고서 잠자코 있다가 왕비에게 귀엣말로 말하기를 “내가 많은 사람을 보아 왔지만 응렴같은 사람은 없었다.” 하고는 딸을 그의 아내로 삼게 할 마음을 가지게 되어, 응렴을 돌아보고 말하였다. “바라건대 그대는 자중자애 하라. 나에게 딸자식이 있는데 그로 하여금 잠자리를 모시도록 하겠다.” 다시 술자리를 베풀고 같이 마시다가 조용히 말하였다. “내게는 두 딸이 있는데 언니는 지금 20세이고 동생은 19세이다. 오직 그대가 장가들고자 하는 대로 하라!” 응렴이 사양하였으나 어쩔 수 없어 일어나 절하여 감사하고는 집에 돌아와 부모에게 알렸다. 부모가 말하였다. “듣건대 왕의 두 딸의 용모는 언니가 동생만 못하다고 한다. 만약 어쩔 수 없다면 마땅히 그 동생에게 장가드는 것이 좋겠다.” 그러나 여전히 주저하며 결정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흥륜사(興輪寺) 승려에게 물으니, 승려가 말하였다. “언니에게 장가들면 유익한 것이 세 가지 있고, 동생에게 장가들면 반대로 손해되는 것이 세 가지 있습니다.” 응렴은 이에 [왕에게] 아뢰었다. “저는 감히 스스로 결정할 수가 없습니다. 오직 왕께서 명하시는 대로 따르겠습니다.” 이에 왕은 맏딸을 [응렴에게] 시집보냈다.
[원문]
四年 秋九月 王會羣臣於臨海殿 王族膺廉年十五歲 預坐焉 王欲觀其志 忽問曰 “汝游學有日矣 得無見善人者乎” 答曰 “臣嘗見三人 竊以爲有善行也” 王曰 “何如” 曰 “一高門子弟 其與人也 不自先而處於下 一家富於財 可以侈衣服 而常以麻紵自喜 一有勢榮 而未嘗以其勢加人 臣所見如此” 王聞之默然 與王后耳語曰 “朕閱人多矣 無如膺廉者” 意以女妻之 顧謂膺廉曰 “願郞自愛 朕有息女 使之薦枕” 更置酒同飮 從容言曰 “吾有二女 兄今年二十歲 弟十九歲 惟郞所娶” 膺廉辭不獲起拜謝 便歸家告父母 父母言 “聞王二女容色 兄不如弟 若不得已 宜娶其弟” 然尙疑未決 乃問興輪寺僧 僧曰 “娶兄則有三益 弟則反是有三損” 膺廉乃奏 “臣不敢自決 惟王命是從” 於是 王長女出降焉
5 년 (AD 861) : 왕이 죽었다. 시호를 헌안이라 하고
[번역문]
5년(861) 봄 정월에 왕이 병으로 자리에 누워 오랫동안 낫지 않았으므로 좌우의 신하들에게 일렀다. “과인은 불행히도 아들은 없고 딸만 있다. 우리나라의 옛일에 비록 선덕(善德)과 진덕(眞德) 두 여자 임금이 있었으나, 이는 암탉이 새벽을 알리는 것과 비슷하므로 본받을 일이 못된다. 사위 응렴은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노련하고 성숙한 덕을 가지고 있다. 경들은 그를 왕으로 세워 섬기면 반드시 선조로부터 이어 온 훌륭한 왕업을 떨어뜨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과인은 죽어도 또한 썩지 않을 것이다.” 이달 29일에 [왕이] 죽었다. 시호를 헌안(憲安)이라 하고 공작지(孔雀趾)에 장사지냈다.
[원문]
五年 春正月 王寢疾彌留 謂左右曰 “寡人不幸 無男子有女 吾邦故事 雖有善德·眞德二女主 然近於牝雞之晨 不可法也 甥膺廉 年雖幼少 有老成之德 卿等立而事之 必不墜祖宗之令緖 則寡人死且不朽矣” 是月二十九日 薨 諡曰憲安 葬于孔雀趾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