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년 (AD 759) : 정월에 병부와 창부의 경(卿)과 감(監)을 [번역문] 18년(759) 봄 정월에 병부(兵部)와 창부(倉部)의 경(卿)과 감(監)을 시랑(侍郞)으로 고치고 대사(大舍)를 낭중(郞中)으로 고쳤으며, 집사 사지(執事舍知)를 집사 원외랑(執事員外郞)으로 고치고 집사 사(執事史)를 집사 랑(執事郞)으로 고쳤다. 조부(調府), 예부(禮部), 승부(乘府), 선부(船府), 영객부(領客府), 좌우의방부(左右議方府), 사정부(司正府), 위화부(位和府), 예작전(例作典), 대학감(大學監), 대도서(大道署), 영창궁(永昌宮) 등의 대사(大舍)를 주부(主簿)로 고치고, 상사서(賞賜署), 전사서(典祀署), 음성서(音聲署), 공장부(工匠府), 채전(彩典) 등의 대사(大舍)를 주서(主書)로 고쳤다. 2월에 예부(禮部)의 사지(舍知)를 사례(司禮)로 고치고, 조부(調府)의 사지(舍知)를 사고(司庫)로, 영객부(領客府)의 사지(舍知)를 사의(司儀)로, 승부(乘府)의 사지(舍知)를 사목(司牧)으로, 선부(船府)의 사지(舍知)를 사주(司舟)로, 예작부(例作府)의 사지(舍知)를 사례(司例)로, 병부(兵部)의 노사지(弩舍知)를 사병(司兵)으로, 창부(倉部)의 조사지(租舍知)를 사창(司倉)으로 고쳤다. 3월에 살별[彗星]이 나타났다가 가을이 되어서야 없어졌다. [원문] 十八年 春正月 改兵部·倉部卿監爲侍郞 大舍爲郞中 改執事舍知爲執事員外郞 執事史爲執事郞 改調府 禮部 乘府 船府 領客府 左右議方府 司正 位和府 例作典 大學監 大道署 永昌宮等大舍爲主簿 賞賜署 典祀署 音聲署 工匠府 彩典等大舍爲主書 二月 改禮部舍知爲司禮 調府舍知爲司庫 領客府舍知爲司儀 乘府舍知爲司牧 船府舍知爲司[주석11]舟 例作府舍知爲司例 兵部弩舍知爲司兵 倉部租舍知爲司倉 三月 彗星見 至秋乃滅 19 년 (AD 760) : 도성 동쪽에서 북치는 것과 같은 소리가 [번역문] 19년(760) 봄 정월에 도성(都城) 동쪽[寅方]에서 북치는 것과 같은 소리가 들렸는데, 사람들이 말하기를 귀신의 북소리라 하였다. 2월에 궁궐 안에 큰 못을 팠고, 또 궁궐 남쪽의 문천(蚊川) 위에 월정교(月淨橋)와 춘양교(春陽橋)의 두 다리를 놓았다. 여름 4월에 시중 염상(廉相)이 관직에서 물러났으므로 이찬 김옹(金邕)을 시중으로 삼았다. 가을 7월에 왕자 건운(乾運)을 왕태자로 봉하였다. [원문] 十九年 春正月 都城寅方 有聲如伐鼓[주석12] 衆人謂之鬼鼓 二月 宮中穿大池 又於宮南蚊川之上 起月淨·春陽二橋 夏四月 侍中廉相退 伊湌金邕爲侍中 秋七月 封王子乾運爲王太子 20 년 (AD 761) : 정월 초하루에 무지개가 해를 꿰뚫었는데, [번역문] 20년(761) 봄 정월 초하루에 무지개가 해를 꿰뚫었는데, 해에 귀고리 같은 것이 형성되었다. 여름 4월에 살별[彗星]이 나타났다. [원문] 二十年 春正月朔 虹貫日 日有珥 夏四月 彗星出 21 년 (AD 762) : 오곡, 휴암, 한성, 장새, 지성, 덕곡성을 [번역문] 21년(762) 여름 5월에 오곡(五谷), 휴암鵂巖), 한성(漢城), 장새(獐塞), 지성(池城), 덕곡(德谷)의 여섯 성을 쌓고 각각 태수를 두었다. 가을 9월에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원문] 二十一年 夏五月 築五谷 鵂巖 漢城 獐塞 池城 德谷六城 各置太守 秋九月 遣使入唐朝貢 22 년 (AD 763) : 여름 4월에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 [번역문] 22년(763) 여름 4월에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가을 7월에 서울에 큰 바람이 불어 기와가 날라가고 나무가 뽑혔다. 8월에 복숭아꽃과 오얏꽃이 다시 피었다. 상대등 신충(信忠)과 시중 김옹(金邕)이 관직에서 물러났다. 대나마 이순(李純)은 왕이 총애하는 신하였는데, 갑자기 하루 아침에 세상을 피하여 산 속으로 들어갔다. 왕이 여러 번 불렀으나 나오지 않고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어 왕을 위하여 단속사(斷俗寺)를 세우고 거기서 살았다. 후에 왕이 풍악을 좋아한다는 말을 듣고 곧 궁궐문에 나아가 간(諫)하여 아뢰었다. “신(臣)이 듣건대 옛날 걸(桀)과 주(紂)가 술과 여자에 빠져 음탕한 음악을 그치지 않다가, 이로 말미암아 정치가 쇠퇴하게 되고 나라가 망하였다고 합니다. 앞에 엎어진 수레가 있으면 뒷 수레는 마땅히 경계하여야 될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대왕께서는 허물을 고치시고 자신을 새롭게 하여 나라의 수명을 길게 하소서!” 왕이 이 말을 듣고 감탄하여 풍악을 그치고는 곧 그를 방으로 인도하여 불교의 오묘한 이치와 나라를 다스리는 방책을 며칠 동안 듣다가 그쳤다. [원문] 二十二年 夏四月 遣使入唐朝貢 秋七月 京都大風 飛瓦拔樹 八月 桃[주석13]李再花 上大等信忠 侍中金邕免 大奈麻李純爲王寵臣 忽一旦避世入山 累徵不就 剃髮爲僧 爲王創立斷俗寺居之 後聞王好樂 卽詣宮門 諫奏曰 “臣聞 昔者桀·紂 荒于酒色 淫樂不止 由是 政事凌遲 國家敗滅 覆轍在前 後車宜戒 伏望 大王改過自新 以永國壽” 王聞之感歎 爲之停樂 便引之正室 聞說道妙 以及理世之方 數日乃止 23 년 (AD 764) : 이찬 만종(萬宗)을 상대등으로 삼고 [번역문] 23년(764) 봄 정월에 이찬 만종(萬宗)을 상대등으로 삼고 아찬 양상(良相)을 시중으로 삼았다. 3월에 살별[星孛]이 동남쪽에 나타났고, 용이 양산(楊山) 아래에 나타났다가 조금 후에 날아가 버렸다. 겨울 12월 11일에 크고 작은 유성이 나타났는데, 보는 사람들이 그 수를 이루 다 셀 수 없었다. [원문] 二十三年 春正月 伊湌萬宗爲上大等 阿湌良相爲侍中 三月 星孛于東南 龍見楊山下 俄而飛去 冬十二月十一日 流星或大或小 觀者不能數 24 년 (AD 765) : 지진이 일어났다.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번역문] 24년(765) 여름 4월에 지진이 일어났다.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니 황제가 사신에게 검교예부상서(檢校禮部尙書)의 벼슬을 주었다. 6월에 유성이 심(心) [별자리]를 범하였다. 이 달에 왕이 죽었다. 시호를 경덕(景德)이라 하고 모지사(毛祇寺) 서쪽 산봉우리에 장사지냈다. <고기에 이르기를 『영태(永泰) 원년 을사(765)에 죽었다.』고 하였으나, 구당서와 자치통감에는 모두 『대력(大曆) 2년(767)에 신라 왕 헌영(憲英)이 죽었다.』고 하였다. 어찌하여 그것이 잘못되었을까?> [원문] 二十四年 夏四月 地震 遣使入唐朝貢 帝授使者檢校禮部尙書 六月 流星犯心 是月 王薨 諡曰景德 葬毛祇寺西岑 古記云 『永泰元年乙巳卒』 而舊唐書及資理[주석14]通鑑皆云 『大曆二年 新羅王憲英卒』 豈其誤耶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