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120, 삼국사기 신라 본기 -9 (33대 성덕왕 본기- 5 끝.)

상 상 2015. 8. 12. 17:46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120, 삼국사기 신라 본기 -9 (33대 성덕왕 본기- 5 .)

 

차례

 

. 관련 사료

1. 구당서 토번전()

2. 구당서 토번전()

3. 신당서 토번전

4. 구당서 돌궐전

5. 신당서 돌궐전

6. 구당서 측천본기

7. 신당서 측천본기

8. 구당서 거란전

9. 신당서 거란전

10. 구당서 발해전

11. 신당서 발해전

12. 구당서 숙종본기

13. 구당서 회홀전

14. 신당서 회골전

15. 구당서 남조전

16. 신당서 남조전

17. 구당서 신라전

18. 신당서 신라전

19. 삼국사기 신라본기

 

.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

1. 이진충의 난 이전

2. 이진충의 난

3. 돌궐족 묵철의 침공

4. 안사의 난

5. 토번의 침공

6. 토번의 침공 이후

7. 민란의 발생과 남조의 침공

8. 황소의 난

9. 절도사의 시대

10. 당의 멸망

 

. 통일신라와 당

1. 통일신라 이후의 당나라 약사

2. 신구당서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3.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4. 사료를 통합해서 본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

 

 

. 관련 사료

19. 삼국사기 신라본기

 

19. 삼국사기 신라 본기의 출처:

1) 원 출처는 네이트(nate). 그러나 현재 네이트에 있는 삼국사기는 폐쇄되어 찾아볼 수 없음

2) 지금 삼국사기를 볼 수 있는 싸이트는 네이버로 원문과 함께 읽는 삼국사기

싸이트 주소( http://terms.naver.com/list.nhn?cid=49615&categoryId=49615 )

 

33대 성덕왕 본기- 5

33 (AD 734) : 정월에 백관들에게 교서를 내려,

[번역문]

33(734) 봄 정월에 백관들에게 교서를 내려, 직접 대궐 북문으로 들어와 아뢰고 대답하도록 하였다. 당나라에 들어가 숙위하던 좌령군위원외장군(左領軍衛員外將軍) 김충신(金忠信)이 황제에게 글을 올렸다. ()이 받은 분부는 신으로 하여금 폐하의 신임표[]를 가지고 본국에서 군사를 동원하여 말갈을 쳐서 없애고 일이 있을 때마다 계속 보고하는 일이었습니다. 신은 황제의 명령을 받고부터 장차 목숨을 바치려고 맹세하였는데, 마침 이때 교대하러 온 김효방(金孝方)이 죽었기 때문에 제가 계속 머물러 숙위하게 되었습니다. 신의 본국 왕은 신이 오랫동안 황제의 조정에 머물러 모셨다 하여 종질(從姪) 지렴(志廉)을 사신으로 보내 신과 교대하게 하여, 지금 그 사람이 이미 도착하였으니 신은 곧바로 돌아가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됩니다. 전에 받은 황제의 분부를 매양 생각하니 밤낮으로 잊을 수가 없습니다. 폐하께서 앞서 명을 내려 본국왕 흥광(興光)[성덕왕]에게 영해군대사(寧海軍大使)의 관작을 더하고 신임표를 주어 흉악한 도적을 토벌케 하였으니, 황제의 위엄이 닿는 데는 비록 먼 곳이라도 가까운 것 같고, 임금의 명령이 있으면 제가 어찌 감히 받들지 않겠습니까? 준동(蠢動)하던 오랑캐들은 이미 자신들의 잘못을 뉘우치리라 생각되나 악을 제거함에는 근본을 다스려야 하고 법을 펴는 데는 혁신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군사를 내는 데는 의리가 세 번의 승리보다도 더 귀중하지만, 적을 풀어놓으면 후환이 몇 대까지 끼치는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폐하께서는 신이 본국으로 돌아가는 기회에 신에게 부사(副使)의 직책을 임시로 주시어 황제의 뜻을 가지고 먼 바깥으로 나아가 거듭 선포하게 해주십시오. 그러면 이것이 어찌 황제의 위엄만 더욱 떨칠 뿐이겠습니까? 응당 또 군사들도 기운을 내어 반드시 그 소굴을 둘러엎고 거친 변방도 안정되어, 마침내 동쪽 신라의 신하인 신의 작은 정성이 이루어 져 국가의 큰 이익이 될 것입니다. 신 등은 다시 푸른 바다에 배를 띄우고 전승의 보고를 대궐에 바칠 것이니, 터럭같은 공적이나마 드러내어 비와 이슬같은 혜택에 보답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엎드려 생각컨대 폐하께서는 이를 도모하시기 바랍니다.  

황제가 이를 허락하였다. 여름 4월에 대신 김단갈단(金端竭丹)을 당나라에 보내 새해를 축하하니, 황제가 내전에서 잔치를 베풀어 접견하고 위위소경(衛尉少卿)의 관작과 비색 난포(襴袍)와 평만은대(平漫銀帶) 및 명주 60필을 주었다. 이보다 앞서 왕의 조카 지렴을 보내 황제의 은혜에 감사하고 작은 말 두 필과 개 세 마리, 500, 20, 60, 우황 20, 인삼 200, 두발 100, 바다표범 가죽 16장을 바쳤는데, 이때 와서 지렴에게 홍려소경원외치(鴻臚少卿員外置)의 관작을 주었다.

 

[원문]

三十三年 春正月 敎百官 親入北門奏對 入唐宿衛左領軍衛員外將軍金忠信上表曰 臣所奉進止 令臣執節 本國發兵馬 討除靺鞨 有事續奏者 臣自奉聖旨 誓將致命 當此之時 爲替人金孝方身亡 便留臣宿衛 臣本國王 以臣久侍天庭 遣使從姪志廉代臣 今已到訖 臣卽合還 每思前所奉進止[주석29] 無忘夙夜 陛下先有制 加本國王興光寧海軍大使 錫之旌節 以討凶殘 皇威載臨 雖遠猶近 君則有命 臣敢不祗 蠢爾夷俘 計已悔禍 然除惡務本 布憲惟新 故出師 義貴乎三捷縱敵 患貽於數代 伏望 陛下因臣還國 以副使假臣 盡將天旨 再宣殊裔 豈惟[주석30]斯怒益振 固亦武夫作氣 必傾其巢穴 靜此荒隅 遂夷臣之小誠 爲國家之大利 臣等復乘桴滄海 獻捷丹闈 効毛髮之功 答雨露之施 臣所望也 伏惟 陛下圖之帝許焉 夏四月 遣大臣金端竭[주석31]丹 入唐賀正 帝宴見於內殿 授衛尉少卿 賜緋襴袍·平漫銀帶及絹六十匹 先時遣王姪志廉謝恩 獻小馬兩匹 狗三頭 金五百兩 銀二十兩 布六十匹 牛黃二十兩 人蔘二百斤 頭髮一百兩 海豹皮一十六張 及是授志廉鴻臚少卿員外置

 

34 (AD 735) : 정월에 형혹(熒惑)이 달을 침범하였다.

[번역문]

34(735) 봄 정월에 형혹(熒惑)이 달을 침범하였다. 김의충(金義忠)을 당나라에 보내 새해를 축하하였다. 2월에 부사(副使) 김영(金榮)이 당나라에서 죽자, 광록소경(光祿少卿) 벼슬을 추증하였다. 의충이 돌아올 때 조칙으로 패강(浿江) 이남의 땅을 주었다.

 

[원문]

三十四年 春正月 熒惑犯月 遣金義忠入唐賀正 二月 副使金榮在唐身死 贈光祿少卿 義忠廻 勑賜浿江以南地

 

35 (AD 736) : 6월에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새해를 축하

[번역문]

35(736) 여름 6월에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새해를 축하하고 아울러 표()를 올려 사례하였다. 패강(浿江) 이남의 땅을 준다는 은혜로운 칙서를 삼가 받았습니다. 신은 바다의 먼 변방에 태어나 살면서 성스러운 조정의 교화를 입었습니다. 비록 정성된 마음을 먹기는 하였으나 나타낼 만한 공적은 없었으며, 충성과 정절로 일을 삼았으나 노력은 상받기에 부족하였습니다. 폐하가 비와 이슬같은 은혜를 내리고 해와 달같이 밝은 조서를 내려, 신에게 땅을 주시어 신의 고을들을 넓혀 주셨고, 드디어 개간할 기약이 있도록 해주고 농사짓고 누에칠 자리를 얻게 하였습니다. 신은 조칙의 뜻을 받들어 영예로운 은혜를 깊이 입었음에, 이 몸이 부서져 가루가 되더라도 보답할 길이 없습니다.

 

겨울 11월에 왕의 종제(從弟) 대아찬 김상(金相)을 보내 당나라에 조회하게 하였는데, 도중에서 죽었으므로 황제가 그것을 매우 슬퍼하여 그에게 위위경(衛尉卿)의 관작을 추증하였다. 이찬 윤충 사인 영술(英述)을 보내 평양주(平壤州)와 우두주(牛頭州) 두 주()의 지세를 살펴보게 하였다. 개가 재성(在城) 고루(鼓樓)에 올라가 사흘 동안 짖었다.

 

[원문]

三十五年 夏六月 遣使入唐賀正 仍附表陳謝曰 伏奉恩勑 賜浿江以南地境 臣生居海裔 沐化聖朝 雖丹素爲心 而功無可効 以忠貞[주석32]爲事 而勞不足賞 陛下降雨露之恩 發日月之詔 錫臣土境[주석33] 廣臣邑居 遂使墾闢有期 農桑得所 臣奉絲綸之旨 荷榮寵之深 粉骨糜[주석34]身 無由上答冬十一月 遣從弟大阿湌金相朝唐 死于路 帝深悼之 贈衛尉卿 遣伊湌允忠 思仁 英述 檢察平壤 牛頭二州地勢 狗登在城鼓樓 吠三日

 

36 (AD 737) : 2월에 김포질을 당나라에 보내 새해를 축하

[번역문]

36(737) 2월에 사찬 김포질(金抱質)을 당나라에 보내 새해를 축하하고 아울러 토산물을 바쳤다. 왕이 죽었다. 시호를 성덕(聖德)이라 하고 이거사(移車寺) 남쪽에 장사지냈다.

삼국사기 권 제8

 

[원문]

三十六年 春二月 遣沙湌金抱質入唐賀正 且[주석35]獻方物 王薨 諡曰聖德 葬移車寺南

三國史記 卷 第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