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신라와 당의 관계-92, 신당서 회홀전-12) 끝. 차례 가. 관련 사료 1. 구당서 토번전(상) 2. 구당서 토번전(하) 3. 신당서 토번전 4. 구당서 돌궐전 5. 신당서 돌궐전 6. 구당서 측천본기 7. 신당서 측천본기 8. 구당서 거란전 9. 신당서 거란전 10. 구당서 발해전 11. 신당서 발해전 12. 구당서 숙종본기 13. 구당서 회홀전 14. 신당서 회골전 15. 구당서 남조전 16. 신당서 남조전 17. 구당서 신라전 18. 신당서 신라전 19. 삼국사기 신라본기 나.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 1. 이진충의 난 이전 2. 이진충의 난 3. 돌궐족 묵철의 침공 4. 안사의 난 5. 토번의 침공 6. 토번의 침공 이후 7. 민란의 발생과 남조의 침공 8. 황소의 난 9. 절도사의 시대 10. 당의 멸망 다. 통일신라와 당 1. 통일신라 이후의 당나라 약사 2. 신구당서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3.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4. 사료를 통합해서 본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 가. 관련 사료 14. 신당서 회골전 ※ 14. 신당서 회홀전(권217) 출처: 1) 번역문: 동북아역사넷/ 도서/ 중국정사 외국전/ 新唐書 卷217/ 회골전(回鶻傳) 2) 원문: 新漢籍全文(http://hanchi.ihp.sinica.edu.tw/ihp/hanji.htm) /免費使用/史/正史/新唐書/ 列傳/ 卷二百一十七(上, 下) 번 역 문 | 원 문 | 45) [이]사충 등이 나라가 망하자 모두 조정에 들어오기를 원했고, 허락을 받아 마침내 귀의군을 해체하자 [이]사충을 승진시켜 좌감문위상장군 겸 무왕부(撫王傅)로 삼아 [그에게] 봉록을 2인분 주었으며 영악방(永樂坊: 장안 외곽성 내에 있는 방리-坊里의 하나)에 저택을 내려주고 그 병사들은 나눠 여러 절도[사]에게 주었다. 회골사람들이 여러 도(道)에 가서 사는 것을 꺼려해 호타하(滹沱河: 지금 하북성 서부로 흘러가는 하천)를 점거한 체 반란을 일으키자 유면이 3천 명을 묻어 죽였다. [황제가] 조칙을 내려 두 도성에 있는 회골의 영공덕사(營功德使) 모두에게 관과 요대를 내려주게 했다. 관리가 마니의 책과 그림을 압수해 길에서 태우고 재산을 몰수해 관서에 주었다. | 思忠等以國亡,皆願入朝,見聽,遂罷歸義軍,擢思忠左監門衞上將軍兼撫王傅,兩稟其奉,賜第永樂坊,分其兵賜諸節度。虜人憚隸食諸道,據滹沱河叛,劉沔阬殺三千人。詔回鶻營功德使在二京者,悉冠帶之。有司收摩尼書若象燒于道,產貲入之官。 | 46) 알념가한(遏捻可汗)의 남은 부락이 5천 명이었는데, 해(奚)의 대추(大酋) 석사랑에게 의지해 살고 있었다. 대중(大中) 초기에(대중 원년, 847년 봄: 구당서) [장]중무가 해를 토벌해 격파하자 회골이 점차 줄어 없어졌고, [대중 2년(848) 봄에] 남아 있었던 명왕(名王)과 귀신(貴臣) 5백 명도 옮겨가 실위에게 의지했다. [장]중무가 실위를 회유해 가한 등을 잡아오게 하자 알념[가한]이 무서워 아내 갈록(葛祿)과 아들 특륵독사 등 9명의 기병만 데리고 말을 달려 백성들을 버리고 서쪽으로 달아났는데 부락 사람들이 모두 서럽게 울었다. [그 이후에] 실위 일곱 부락이 [남은] 회골을 나누어 예속시켰다. 힐알사가 화를 내며 그 (재)상 아파(阿播)에게 군대 7만 명을 거느리고 실위를 공격해 회골을 모두 잡아서 고비 북쪽으로 돌아갔다. 남은 부락들은 삼림 속에 숨어 [주변에 사는] 여러 다른 종족을 도적질해 스스로 먹고 살다가 점차 방특륵에게 귀부했다. | 遏捻可汗裒殘部五千,仰食於奚大酋碩舍朗。大中初,仲武討奚,破之,回鶻寖耗滅,所存名王貴臣五百餘,轉依室韋。仲武諭令羈致可汗等,遏捻懼,挾妻葛祿、子特勒毒斯馳九騎夜委眾西走,部人皆慟哭。室韋七姓析回鶻隸之。黠戛斯怒,與其相阿播將兵七萬擊室韋,悉收回鶻還磧北。遺帳伏山林間,狙盜諸蕃自給,稍歸厖特勒。 | 47) 이 때 [방]특륵이 이미 스스로 가한을 칭하고 감주(甘州: 지금 감숙성 장액-甘肅省 張掖)에 거주하면서 고비 서쪽의 여러 오아시스를 차지하고 있었다.(이를 역사에서는 감주 회골이라고 하기도 하고, 달리 하서 회골이라고도 한다. 몽골 초원의 회골이 9세기 중반 붕괴된 이후 서쪽의 감주 주변으로 이주해 성립된 왕국이다) 선종(宣宗: 16대 군주)이 힘써 멀리 떨어져 있는 땅을 위무하기 위해 사자를 보내 영주(靈州)에 가서 [회골의] 추장을 살피자 회골이 이로 인해 사자를 따라 사람을 보내 경사에 왔고, 황제가 이에 올록등리라골몰밀시합구록비가회건가한(嗢祿登里邏汨沒蜜施合俱錄毗伽懷建可汗)이라고 책봉했다. 이후 10여 년이 지나 다시 한 번 토산품을 바쳤다. | 是時,特勒已自稱可汗,居甘州,有磧西諸城。宣宗務綏柔荒遠,遣使者抵靈州省其酋長,回鶻因遣人隨使者來京師,帝即冊拜嗢祿登里邏汨沒蜜施合俱錄毗伽懷建可汗。後十餘年,一再獻方物。 | 48) 의종(懿宗: 17대 군주) 시기에(함통 7년, 866년 10월: 구당서 의종본기) 대추(大酋) 복고준이 북정(北庭)에서 토번을 격파해 논상열을 죽이고 서주(西州)와 윤대(輪臺: 신강 유오이 자치구 윤대현 동남에 위치) 등의 성을 모두 얻게 되자 달간 미회옥(達干米懷玉)을 시켜 조정에 와 포로를 바치며 책봉을 청했고 [황제가] 조칙을 내려 허가해주었다. 그 이후에 왕실이 어지럽게 되자 특산물을 바치며 조회에 참석하지 않게 되면서 사서에 그에 대한 기록에 없게 되었다. | 懿宗時,大酋僕固俊自北庭擊吐蕃,斬論尚熱盡取西州、輪臺等城,使達干米懷玉朝,且獻俘,因請命,詔可。其後王室亂,貢會不常,史亡其傳。 | 49) 소종(昭宗:19대 군주)이 봉상[현](鳳翔縣: 치소, 지금 섬서성 봉상현)에 행행했는데,(천복 2년, 902년 4월 신축일: 자치통감) 영주절도사(靈州節度使) 한손이 표를 올려 [감주]회골이 어려움을 구하러 군대를 이끌고 오기를 청한다고 하자 한림학사 한악이 말했다. “회골은 나라의 원수가 된 지 오래되었습니다. 회창 이래로 변경을 엿보자 새들이 부화를 하지 못했고 수확도 하지도 못했습니다. 지금 저희가 어려운 것을 틈타 엿보고 있으니 열어주시면 안됩니다.” 결국 막고 답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나라는 [군대를] 일으키지 않고 때때로 옥과 말을 변경에 있는 주[邊州]의 시장에 [와서] 거래를 했다고 한다.(회홀에 대한 기록 끝) | 昭宗幸鳳翔,靈州節度使韓遜表回鶻請率兵赴難,翰林學士韓偓曰:「虜為國仇舊矣。自會昌時伺邊,羽翼未成,不得逞。今乘我危以冀幸,不可開也。」遂格不報。然其國卒不振,時時以玉、馬與邊州相巿云。 |
☆ 신당서 회홀전은 여기서 끝난게 아니고 이 이하에는 다음과 같은 부족들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1)설연타, 2)발야고, 3)복골, 4)계필, 5)다람갈, 6)아질, 7)발실밀, 8)도파, 9)골리간 10)백습 11)곡설처 12)힐알사 13)견곤 이러한 기록들은 우리역사를 아는데 도움이 되지 않아 생략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