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신라와 당의 관계-91, 신당서 회홀전-11) 차례 가. 관련 사료 1. 구당서 토번전(상) 2. 구당서 토번전(하) 3. 신당서 토번전 4. 구당서 돌궐전 5. 신당서 돌궐전 6. 구당서 측천본기 7. 신당서 측천본기 8. 구당서 거란전 9. 신당서 거란전 10. 구당서 발해전 11. 신당서 발해전 12. 구당서 숙종본기 13. 구당서 회홀전 14. 신당서 회골전 15. 구당서 남조전 16. 신당서 남조전 17. 구당서 신라전 18. 신당서 신라전 19. 삼국사기 신라본기 나.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 1. 이진충의 난 이전 2. 이진충의 난 3. 돌궐족 묵철의 침공 4. 안사의 난 5. 토번의 침공 6. 토번의 침공 이후 7. 민란의 발생과 남조의 침공 8. 황소의 난 9. 절도사의 시대 10. 당의 멸망 다. 통일신라와 당 1. 통일신라 이후의 당나라 약사 2. 신구당서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3.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4. 사료를 통합해서 본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 가. 관련 사료 14. 신당서 회골전 ※ 14. 신당서 회홀전(권217) 출처: 1) 번역문: 동북아역사넷/ 도서/ 중국정사 외국전/ 新唐書 卷217/ 회골전(回鶻傳) 2) 원문: 新漢籍全文(http://hanchi.ihp.sinica.edu.tw/ihp/hanji.htm) /免費使用/史/正史/新唐書/ 列傳/ 卷二百一十七(上, 下) 번 역 문 | 원 문 | 42) 이듬해(842년) 회골이 군주를 모시고 고비 남쪽으로 와서 운[주](雲州: 치소, 지금 산유성 대동시)와 삭[주](朔州: 치소, 지금 산서성 삭주시 서남쪽)를 공격하고 횡수(橫水: 지금 내몽고자치구 항금기 서북쪽을 흐르는 하천)를 약탈해서 죽고 약탈당한 백성이 아주 많게 되었고, 천덕[군](天德軍: 지금 내몽고자치구 오납특전기 동북쪽에 설치)과 진무[군] 사이를 왕래하면서 자기 마음대로 가축을 약탈했다. 이에 [조정에서] 각 도의 병사를 소집해 연합해서 토벌하게 했다. 올몰사는 적심이 심하게 간사해 통제가 어렵게 되자 몰래 천덕[군]의 변방 장수 전모와 약속을 하고 적심을 아장에서 불러 죽였다. 나힐철은 적심의 백성 7천 장을 거두어 동쪽으로 진무[군](振武軍)과 대동[군](大同軍: 치소, 지금 산서성 대동현)으로 도망해서 실위와 흑사[적](黑沙磧: 내몽고자치구 탁극탁현 북방), [그리고 유림(楡林)]에 의지해 남으로 유주(幽州)를 엿보자 절도사 장중무가 격파하고 그 백성을 모두 잡았다. 나힐철이 도망가다가 오개[가한]에게 잡혀 죽었다. 그러나 오개[가한]의 군대는 여전히 강해 10만 명이 된다고 하며 대동[군] 북쪽 여문산(閭門山: 지금 요녕성 북진 만족자치현 서쪽에 위치하고 있었던 산?)에 있는 아장에 머물러 있었다. [회창 2년(842) 겨울과 3년(843) 봄에] 특륵방구차와 아돈녕 등의 네 부락과 장군 조마니 부락의 백성 [일곱 부락의] 3만 명이 [장]중무에게 투항하자 올몰사도 사자를 보내 귀순을 표시했다. 황제가 가한이 나라를 되찾는 것을 돕고자 했으나 가한이 이미 운주를 공격해 유면과 싸워 패배를 했다. 올몰사가 세 부락과 특근, 대추(大酋)가 2천 기를 이끌고 진무[군]에 투항을 했다. [황제가] 조칙을 내려 올몰사를 우금오위대장군으로 책봉하고 회화군왕이라 작을 내린 다음 천덕[군]을 귀의군(歸義軍)으로 하고 [그를] 귀의군[절도]사로 배수하고, 아력지를 영변군공(寧邊郡公), 습물철을 창화군공(昌化郡公), 오라사를 영삭군공(寧朔郡公)으로 [작을 주고], 또한 관군대장군 좌위위대장군으로 삼았고, 애사물을 영새군공(寧塞郡公)으로 [작을 주고] 우령군대장군으로 삼았다. 더해 올몰사에게 아장의 기치[牙旗], 표범의 꼬리, 칼과 그릇[刀器 등] 여러 물자를 내려주고 그 속관에게도 관과 요대를 주었다. [황제가] 조칙을 내려 재상 [이]덕유에게 진(秦)나라와 한(漢)나라이래 귀화했던 충성스럽고 뛰어난 자를 대저 30명 뽑아 『이역귀충전(異域歸忠傳)』을 지어 그들에게 내려주라고 했다. 올몰사가 그의 가족이 태원에 머무르며 이끌고 있는 형제들과 천자를 위해 변방을 지킬 것을 청하자 황제가 유면에게 명해 운[주]와 삭[주] 사이에 집을 지어 그 가족을 살게 했다. | 明年,回鶻奉主至漠南,入雲、朔,剽橫水,殺掠甚眾,轉側天德、振武間,盜畜牧自如。乃召諸道兵合討。嗢沒斯以赤心奸桀,難得要領,即密約天德戍將田牟,誘赤心斬帳下。那頡啜收赤心眾七千帳東走振武、大同,因室韋、黑沙南闚幽州,節度使張仲武破之,悉得其眾。那頡啜走,烏介執而殺之。然烏介兵尚彊,號十萬,駐牙大同北閭門山。而特勒厖俱遮、阿敦寧等凡四部,及將軍曹磨你眾三萬,因仲武降,嗢沒斯亦附使者送款。帝欲使助可汗復國,而可汗已攻雲州,劉沔與戰,敗績。嗢沒斯率三部及特勒、大酋二千騎詣振武降。詔拜嗢沒斯為右金吾衞大將軍,爵懷化郡王,以天德為歸義軍,即拜歸義軍使;阿歷支寧邊郡公,習勿啜昌化郡公,烏羅思寧朔郡公,並為冠軍大將軍、左威衞大將軍;愛邪勿寧塞郡公,為右領軍大將軍。加賜嗢沒斯牙旗、豹尾、刀器諸物,給其屬冠帶。詔宰相德裕采秦、漢以來興殊俗、忠效卓異者凡三十人,為異域歸忠傳寵賜之。嗢沒斯請留族太原,率昆弟為天子扞邊,帝命劉沔為列舍雲、朔間處其家。 | 43) 가한이 사자를 보내 군대를 빌려 원래의 아정이 있었던 곳을 돌아가고자 하며 또한 천덕성을 빌려달라고 했으나 황제가 허락하지 않았다. 가한이 화를 내며 대동천(大同川: 내몽고자치구 오랍특전기 동북쪽 대내태진 북쪽에 있는 작은 하천)으로 들어와 노략질을 하고, 돌려서 운주를 공격하자 자사 영벽이 감히 나가지 못했다. [황제가] 조칙을 내려 여러 진의 병사를 징발해 태원 이북에 주둔하게 했다. | 可汗遣使者藉兵欲還故廷,且假天德城,帝不許。可汗恚,進略大同川,轉戰攻雲州,刺史嬰壁不敢出。詔益發諸鎮兵屯太原以北。 | 44) 올몰사 등이 조정에 오자 모두 이씨 [성을] 내려 올몰사를 [이]사충(李思忠), 아력지를 [이]사정(李思貞), 습물철을 [이]사의(李思義), 오라사를 [이]사례(李思禮), 그리고 애사물을 [이]홍순(李弘順)이라고 하고 귀의군부[절도]사에 배수 했다. 이에 [황제가] 조칙을 내려 유면을 회골남면초무사(鶻南面招撫使), 장중무를 동면초무사(東面招撫使), [이]사충을 하서당항도장(河西党項都將) 서남면초토사(西南面招討使)로 삼고, [유]면에게 안문[현](鴈門縣: 산서성 대현)에 둔영하라고 했다. 또한 조칙을 내려 은주자사(銀州刺史) 하청조와 울주자사(蔚州刺史) 계필통에게 번(蕃)과 혼(渾)의 군대를 이끌고 진무[군]을 나아가 [유]면과 [장]중무와 연합해 회골을 조금씩 핍박하게 했다. [이]사충이 여러 차례 깊이 들어가 그 부하들을 항복하게 회유하자 [유]면은 사타의 병사를 나누어 사충을 돕게 하고 하중군(河中軍: 산서성 영제시 서남쪽 포주진) 은 기병 5백으로 [이]홍순을 돕게 했다. [유]면이 [군대를 이끌고] 나아가 운주에 이르고, [이]사충이 보대책(保大柵: 보대군이 위치한 성채. 보대군은 섬서성 황릉현 동남쪽)에 주둔해서 하중과 진허(진주와 허주의 경계에 위치한 곳)의 병사들을 이끌고 회골과 교전을 벌여 패배했다. 이듬해(844년) 또한 [이]홍순에게 패배를 했다. [유]면과 천덕행영부사 석웅이 용감한 기병과 사타, 계필 등의 여러 다른 족속을 정돈해 밤에 운주를 나가 마읍[군](馬邑郡: 치소, 지금 산서성 삭주시)까지 말을 달려갔다가 안중새(安衆塞: 산서성 삭현 동북쪽 마읍에 위치)에서 회골과 만나 싸워 [회골을] 대패시켰다. 오개[가한]이 바야흐로 진무[성]을 압박하며 힘차게 말을 몰아 들어왔다가 밤에 성벽에 판 구멍에 숨어 있었던 정예 병사가 튀어 나오자 오개[가한]이 놀라 물러나 갔고, [석]웅이 북쪽으로 쫓아 살호산까지 가자 오개[가한]은 부상을 입고 도망했다. [풍주자사 석]웅이 [태화]공주를 만나 공주를 모시고 돌아오자 특근 이하 백성 수만 명이 항복을 했고, 짐수레와 물자, 그리고 내려준 조서 등을 모두 거두어 들였다. [오개]가한이 나머지를 거두어 흑거자(黑車子: 화해실위의 추장?)에게로 가서 의지하자 [황제가] 조칙을 내려 [이]홍순, [하]청조에게 끝까지 쫓게 했다. [이]홍순이 흑거자를 많은 재물로 유혹해 오개[가한]을 죽일 것을 도모했다. 이전에 [오개]가한을 따라 망명한 사람들이 [궤멸되어] 군대를 조직하지 못했고, [대중 원년(847)이 되자] 자주 유주에 와서 항복하자 남아 있는 사람들은 모두 기근과 추위, 그리고 부상에 떨며 겨우 수천 명이 있었을 뿐이었다. 흑거자가 그가 다친 것을 이용해 오개[가한]을 [금산(金山)에서] 죽였다. 그 부하들이 그의 동생 알념특륵을 가한으로 삼았다. 황제가 조칙을 내려 [이]덕유에게 유주에 공을 기념하는 비석을 세워 후대에 자랑하게 했다. | 嗢沒斯等既朝,皆賜李氏,名嗢沒斯曰思忠,阿歷支曰思貞,習勿啜曰思義,烏羅思曰思禮;愛邪勿曰弘順,即拜歸義軍副使。於是,詔劉沔為回鶻南面招撫使,張仲武東面招撫使,思忠為河西党項都將、西南面招討使,沔營鴈門。又詔銀州刺史何清朝、蔚州刺史契苾通,以蕃、渾兵出振武,與沔、仲武合,稍逼回鶻。思忠數深入諭降其下。沔分沙陀兵益思忠,河中軍以騎五百益弘順。沔進次雲州,思忠屯保大柵率河中、陳許兵與回鶻戰,敗之。明年,又為弘順所破。沔與天德行營副使石雄料勁騎及沙陀、契苾等雜虜,夜出雲州,走馬邑,抵安眾塞逢虜,與戰破之。烏介方薄振武,雄馳入,夜穴壘出鏖兵,烏介驚,引去,雄追北至殺胡山,烏介被創走。雄遇公主,奉主還,降特勒以下眾數萬,盡收輜帑及所賜詔書。可汗收所餘往依黑車子,詔弘順、清朝窮躡。弘順厚啗黑車子以利,募殺烏介。初,從可汗亡者既不能軍,往往詣幽州降,留者皆飢寒痕夷,裁數千。黑車子幸其殘,即殺烏介。其下又奉其弟遏捻特勒為可汗。帝詔德裕紀功銘石于幽州,以夸後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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