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신라와 당의 관계-23, 신당서 토번전-5) 차례 가. 관련 사료 1. 구당서 토번전(상) 2. 구당서 토번전(하) 3. 신당서 토번전 4. 구당서 돌궐전 5. 신당서 돌궐전 6. 구당서 측천본기 7. 신당서 측천본기 8. 구당서 거란전 9. 신당서 거란전 10. 구당서 발해전 11. 신당서 발해전 12. 구당서 숙종본기 13. 구당서 회홀전 14. 신당서 회홀전 15. 구당서 남조전 16. 신당서 남조전 17. 구당서 신라전 18. 신당서 신라전 19. 삼국사기 신라본기 나.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 1. 이진충의 난 이전 2. 이진충의 난 3. 돌궐족 묵철의 침공 4. 안사의 난 5. 토번의 침공 6. 토번의 침공 이후 7. 민란의 발생과 남조의 침공 8. 황소의 난 9. 절도사의 시대 10. 당의 멸망 다. 통일신라와 당 1. 통일신라 이후의 당나라 약사 2. 신구당서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3.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4. 사료를 통합해서 본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 가. 관련 사료 1. 구당서 토번전(상) 2. 구당서 토번전(하) 3. 신당서 토번전 신당서 토번전 출처: 1) 번역문: 동북아 역사넷/ 도서/ 중국정사 외국전/ 신당서(新唐書)卷216 토번전(吐蕃傳) 2) 원문: 新漢籍全文(http://hanchi.ihp.sinica.edu.tw/ihp/hanji.htm) /免費使用/史/正史/新唐書/列傳/卷二百一十六上(吐蕃上) 번 역 문 | 원 문 | 24) 흠릉이 집권한 지 오래되었는데 항상 중앙에서 정사를 담당하였고, 동생들은 지방을 맡아 병권을 행사했는데 찬파가 동쪽을 맡은 지 거의 30년이 되니 변경의 근심이 되었다. 그 형제들은 모두 재략이 있어, 여러 토번 사람들이 그들을 두려워했다. 기노실롱이 장성하니 스스로 나라를 다스리고자 했고, 이에 점차 불만이 쌓여가자 대신 논암(論巖) 등과 도모하여 [흠릉 형제를] 제거하고자 했다. 마침 흠릉은 병사를 이끌고 밖에 있었는데, 찬보가 수렵을 구실로 병사를 모아 [흠릉의] 무리 2천여 명을 죽이고, 사신을 보내 흠릉과 찬파를 불러들였으나 흠릉이 거역하자 찬보가 친히 토벌했다. 아직 싸움이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흠릉의 군대는 괴멸되었고 [흠릉] 스스로 목숨을 끊으니 주변에 따라 죽은 자가 백여 명이었다. 찬파는 자신의 부중과 형의 아들 망포지(莽布支) 등을 이끌고 와서 (당나라)변경을 두드리니 우림비기(羽林飛騎)를 보내 영접하고 위로했다. 찬파를 특진· 보국대장군· 귀덕군왕에, 망포지는 좌우림대장군· 안국공에 발탁하여 모두 철권(鐵券)을 주었으며 극진히 예를 다해 위로하였다. 찬파는 즉시 자신의 부중을 이끌고 하원(河源: 감숙성 영등현 서북에 위치)을 지켰는데 전사하여 안서대도호에 추증했다. | 欽陵專國久,常居中制事,諸弟皆領方面兵,而贊婆專東境幾三十年,為邊患。兄弟皆才略沈雄,眾憚之。器弩悉弄既長,欲自得國,漸不平,乃與大臣論巖等圖去之。欽陵方提兵居外,贊普託言獵,即勒兵執其親黨二千餘人殺之,發使者召欽陵、贊婆,欽陵不受命,贊普自討之。未戰,欽陵兵潰,乃自殺,左右殉而死者百餘人。贊婆以所部及兄子莽布支等款塞,遣羽林飛騎迎勞,擢贊婆特進、輔國大將軍、歸德郡王,莽布支左羽林大將軍、安國公,皆賜鐵券,禮尉良厚。贊婆即領部兵戍河源,死,贈安西大都護。 | 25) 또 좌숙정대어사대부 위원충을 농우제군대총관으로 삼아 농우제군대사 당휴경을 통솔하여 토벌하게 했다. 당시 오랑캐는 양주(涼州)를 공격하고 있었는데 당휴경이 이를 격파하여 수급 이천을 베었다. 이에 논미살이 내조하여 화의를 청했다. 찬보는 스스로 만여 기병을 이끌고 실주(悉州)를 공격하였는데 도독(무주도독) 진대자가 네 번 싸워 모두 이겼다. 다음 해 말과 황금을 보내 혼인을 구했다. 그러나 오랑캐 남부에 속해있던 무리가 모두 배반하니 찬보가 친히 토벌에 나섰고, 군영에서 죽었다. | 又遣左肅政臺御史大夫魏元忠為隴右諸軍大總管,率隴右諸軍大使唐休璟出討。方虜攻涼州,休璟擊之,斬首二千級。於是論彌薩來朝請和。贊普自將萬騎攻悉州,都督陳大慈四戰皆克。明年,乃獻馬、黃金求昏。而虜南屬帳皆叛,贊普自討,死于軍。 | 26) 여러 아들이 보위를 다투니 토번 사람들이 기례축찬(棄隸蹜贊)을 세워 찬보로 삼았다. 나이 일곱 살이 되었을 때 사신이 와서 상을 알리고 또 회맹을 구했다. 또 대신 실동열(悉董熱)이 사신으로 와서 간곡히 혼인을 구하였으나 답하지 않았다. 마침 감찰어사 이지고가 요주(姚州: 운남성 요안현)의 오랑캐를 토벌하여 토번의 길잡이가 되는 것을 막자고 건의하자 황제가 조를 내려 검남에서 병사를 모집하여 그를 물리치도록 했다. 오랑캐의 추장이 이 사실을 토번에 알려 주어, 이지고를 죽이고 그 시신으로 하늘에 제사지낸 후 촉한(蜀漢)으로 공격해 들어왔다. 조서를 내려 영무감군우대어사 당구징을 요휴도토격사로 삼아 병사를 이끌고 이를 격파하게 했다. 오랑캐는 양(漾)· 비(濞) 두 강 위에 철교를 세워 서이(西洱)의 오랑캐와 교통하였고 성을 쌓아 이를 지켰다. 당구징이 철교를 훼손하고 성을 빼앗아 전지(滇池: 운남성 곤명시 소재)에 철 기둥을 세워 공을 기록했다. | 諸子爭立,國人立棄隸蹜贊為贊普,始七歲,使者來告喪,且求盟。又使大臣悉董熱固求昏,未報。會監察御史李知古建討姚州蠻,削吐蕃向導,詔發劍南募士擊之。蠻酋以情輸虜,殺知古,尸以祭天,進攻蜀漢。詔靈武監軍右臺御史唐九徵為姚巂道討擊使,率兵擊之。虜以鐵絙梁漾、濞二水,通西洱蠻,築城戍之。九徵毀絙夷城,建鐵柱於滇池以勒功。 | 27) 중종, 경룡 2년(708) 혼인을 청하러 온 [토번의] 사신을 돌려보냈다. 혹자는 말하기를 [토번의] 사신이 와서 공주를 맞이하고 또 중국어를 익혀 통하니 돌려보내지 않음이 마땅하다고 했지만, 황제는 중국이 신의로 오랑캐와 사귀어야 한다고 하여 허락하지 않았다. 그 다음해 토번이 다시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바치고, [찬보의] 할머니 가돈(可敦) 이 또 종아(宗俄)를 사신으로 보내 청혼하였다. 이에 황제는 옹왕(雍王) (이)수례(守禮)의 딸로 금성공주를 삼아 처가 되게 하니, 토번이 상찬돌명실랍 등을 보내 공주를 맞이했다. 황제는 공주가 어린 점을 가엾이 여겨 특별히 비단 수만 필을 주고 기예인과 여러 장인을 다 따르게 했으며(雜伎諸工悉從) 구자(龜茲)의 악기도 주었다. 조서를 내려 좌위대장군 양구로 하여 절을 지니고 공주를 배웅하도록 했다. 황제는 처음에 시평(始平: 섬서성 흥평현 북쪽)에 이르러 장막을 치고 연회를 베풀었는데 여러 신하와 토번의 사신을 불러 연회를 베풀면서 슬픔에 흐느껴 울었고, 시평현에서 사면을 단행하여 사형에 처해진 죄인을 모두 면해주고, 백성들의 요역과 부세를 1년간 면제해 주었으며, 현의 이름을 고쳐 금성(金城)으로, 향(鄉)의 이름을 고쳐 봉지(鳳池)로, 리(里)의 이름을 고쳐 창별(愴別)로 하였다. 공주가 토번에 이르자 성을 짓고 살았다. 양구를 선주도독에 임명했다. 이 때 토번은 겉으로 [당과] 화평한 척했지만 속으로는 분노를 품고 있었으니 양구에게 후하게 대접하고 하서구곡(河西九曲: 청해성 동남 지역에서 황하의 흐름이 바뀌는 지역)을 공주의 탕술지(湯沐地:생활비에 쓰이는 땅, 지참금)로 삼을 것을 청해 양구가 표를 올려 그 땅을 주었다. 구곡(九曲)이라는 곳은 물이 달고 풀이 좋은 곳으로 목축에 적합한 곳이며 당과의 접경지역이다. 이로부터 오랑캐가 점차 늘어나고 강해져 쉽게 쳐들어 왔다. | 中宗景龍二年,還其昏使。或言彼來逆公主,且習聞華言,宜勿遣,帝以中國當以信結夷狄,不許。明年,吐蕃更遣使者納貢,祖母可敦又遣宗俄請昏。帝以雍王守禮女為金城公主妻之,吐蕃遣尚贊咄名悉臘等逆公主。帝念主幼,賜錦繒別數萬,雜伎諸工悉從,給龜茲樂。詔左衞大將軍楊矩持節送。帝為幸始平,帳飲,引羣臣及虜使者宴,酒所,帝悲涕歔欷,為赦始平縣,罪死皆免,賜民繇賦一年,改縣為金城,鄉曰鳳池,里曰愴別。公主至吐蕃,自築城以居。拜矩鄯州都督。吐蕃外雖和而陰銜怒,即厚餉矩,請河西九曲為公主湯沐,矩表與其地。九曲者,水甘草良,宜畜牧,近與唐接。自是虜益張雄,易入寇。 | 28) 현종(玄宗) 개원 2년(714) [토번의] 재상 분달연이 [당조의] 재상에게 글을 올려 회맹의 문서를 짓고 하원(河源)에서 경계를 정할 것을 청했는데, 좌산기상시 해완을 중개인으로 삼아 회맹에 임하게 했다. 황제가 요숭(姚崇) 등에게 명하여 [토번에] 답서를 보내도록 하고, 해완에게 명하여 신룡(神龍) 연간 작성된 회맹문을 가지고 가도록 했다. 토번 또한 상흠장,· 어사 명실렵을 보내 맹약의 문서를 지어 바쳤으나 아직 상의하여 정해지지 않았는데 분달연이 병사 십만을 이끌고 임조(臨洮)를 침범하고, 난주(蘭)·위주(渭: 州: 감숙성 농서현)를 공격해 들어와 감목(監牧)의 말을 약탈해 갔다. 양구가 두려워 자결했다. 조서를 내려 설눌을 농우방어사로 삼아 왕준 등과 힘을 합쳐 격파하게 했다. 황제가 심히 노하여 조를 내리고 친히 군사를 이끌고 가서 토번을 토벌했다. 왕준 등이 무계(武階: 위주-渭州의 서쪽 경계)에서 싸워 만칠 천여 급을 참수하고 노획한 양, 말이 20만에 달했다. 또 장자(長子)에서 싸웠는데 풍안군사(豐安軍使) 왕해빈이 전사했다. 이에 당군이 승기를 타고 진군하여 오랑캐를 대파하였으니 [토번의] 군중이 곳곳에서 충돌하여 도망갈 수 없었고 시신이 쌓여 조수(洮水)가 흐르지 않았다. 이에 황제가 행군을 멈췄다. 자미사인(紫微舍人: 중서사인의 별칭) 예약수에게 전공을 조사하고 아울러 전사자를 제사지내도록 하고 주현에 조칙을 내려 토번 병사의 시신도 더불어 묻도록 했다. | 玄宗開元二年,其相坌達延上書宰相,請載盟文,定境於河源,丐左散騎常侍解琬涖盟。帝令姚崇等報書,命琬持神龍誓往。吐蕃亦遣尚欽藏、御史名悉臘獻載辭。未及定,坌達延將兵十萬寇臨洮,入攻蘭、渭,掠監馬。楊矩懼,自殺。有詔薛訥為隴右防禦使,與王晙等幷力擊。帝怒,下詔自將討之。會晙等戰武階,斬首萬七千,獲馬羊無慮二十萬。又戰長子,豐安軍使王海賓戰死。乘之,虜大敗,眾奔突不能去,相枕藉死,洮水為不流。帝乃罷行。詔紫微舍人倪若水臨按軍實戰功,且弔祭戰亡士,敕州縣幷瘞吐蕃露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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