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22, 신당서 토번전-4)

상 상 2014. 12. 15. 17:17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22, 신당서 토번전-4)

 

차례

 

. 관련 사료

1. 구당서 토번전()

2. 구당서 토번전()

3. 신당서 토번전

4. 구당서 돌궐전

5. 신당서 돌궐전

6. 구당서 측천본기

7. 신당서 측천본기

8. 구당서 거란전

9. 신당서 거란전

10. 구당서 발해전

11. 신당서 발해전

12. 구당서 숙종본기

13. 구당서 회홀전

14. 신당서 회홀전

15. 구당서 남조전

16. 신당서 남조전

17. 구당서 신라전

18. 신당서 신라전

19. 삼국사기 신라본기

 

.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

1. 이진충의 난 이전

2. 이진충의 난

3. 돌궐족 묵철의 침공

4. 안사의 난

5. 토번의 침공

6. 토번의 침공 이후

7. 민란의 발생과 남조의 침공

8. 황소의 난

9. 절도사의 시대

10. 당의 멸망

 

. 통일신라와 당

1. 통일신라 이후의 당나라 약사

2. 신구당서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3.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4. 사료를 통합해서 본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

 

 

. 관련 사료

1. 구당서 토번전()

2. 구당서 토번전()

3. 신당서 토번전

 

신당서 토번전 출처:

1) 번역문: 동북아 역사넷/ 도서/ 중국정사 외국전/ 신당서(新唐書)216 토번전(吐蕃傳)

2) 원문: 新漢籍全文(http://hanchi.ihp.sinica.edu.tw/ihp/hanji.htm) /免費使用//正史/新唐書/列傳/卷二百一十六上(吐蕃上)

                                               번          역           문

                  원          문

17) 의봉 4(679)에 찬보가 죽자 아들 기노실농이 뒤를 잇고 흠릉(欽陵)이 다시 국정을 맡았는데 대신을 [당에] 보내 초상을 알리자 황제가 사자를 보내 장례에 참석하게 했다. 그 이듬해 찬파(贊婆)와 소화귀가 군대 3만을 이끌고 하원(河源)을 공격하고 양비천(良非川)에 주둔하니, ()경현(敬玄)이 이들과 황천(湟川: 청해성 서녕 부근의 황수)에서 교전했으나 대패했다. 좌무위장군 흑치상지가 정예병 3천으로 토번의 군영을 야습하니 찬파가 두려워하여 철군했다. 이에 흑치상지를 하원군경략대사로 삼았다. 이에 더욱 엄히 경계를 서고 둔전을 개간하니 토번의 모략이 점차 꺾였다.

儀鳳四年贊普死子器弩悉弄立欽陵復擅政使大臣來告喪帝遣使者往會葬明年贊婆素和貴率兵三萬攻河源屯良非川敬玄與戰湟川敗績左武衞將軍黑齒常之以精騎三千夜擣其營贊婆懼引去遂擢常之為河源軍經略大使乃嚴烽邏開屯田虜謀稍折

18) 당초 검남(劍南: 대개 오늘날의 사천성)을 지나 무주(茂州: 사천성 무현 일대)의 서쪽에 안융성(安戎城: 사천성 무현의 서남에 위치)을 쌓아 토번의 변경을 위협하려 했다. 갑자기 생강(生羌)이 토번을 인도하여 이를 빼앗고 지키니 이로 인하여 서이하(西洱河: 운남성 대리의 서쪽 하원현에서 발원하여 양비강과 합류)의 여러 오랑캐를 병탐하고 양동(羊同)과 당항(党項)의 여러 강족을 모두 신하로 삼았다. 그 땅은 동쪽으로는 송주(), 무주(), 휴주()와 접하고 남쪽으로는 파라문(婆羅門)에 이르며 서쪽으로는 4()을 취하고 북쪽으로는 돌궐에 이르러 그 넓이가 만여 리에 이르니 그 강성함은 한()과 위() 때의 여러 ()() 중에도 없는 바였다.

劍南度茂州之西築安戎城以迮其鄙俄為生羌導虜取之以守因幷西洱河諸蠻盡臣羊同党項諸羌其地東與松巂接南極婆羅門西取四鎮北抵突厥幅圓餘萬里魏諸戎所無也

19) 영륭 원년(680) 문성공주가 죽자 사자를 보내 조문하게 했고 토번은 우리나라 진행언(陳行焉)의 유해를 돌려보냈다. 당초 ()행언은 토번에 사신으로 갔다가 논흠릉이 자신에게 절하게 하려고 군대를 열병시켜 위협하였으나 굴복하지 않아 10년 간 억류되었다. 이때 유해가 돌아오자 목주자사에 추증했다. 찬파(贊婆)가 다시 양비천에 침입하자, 흑치상지가 이를 격퇴하여 쫓아버렸다.

永隆元年文成公主薨遣使者弔祠又歸我陳行焉之喪行焉使虜論欽陵欲拜己臨以兵不為屈留之十年及是喪還贈睦州刺史贊婆復入良非川常之擊走之

20) 무후(武后) 때 토번은 다른 오랑캐와 함께 조하(朝賀)했다.

영창 원년(689)에 조서를 내려 문창우상(文昌右相) 위대가를 안식도대총관으로 삼고, 안서대도호 염온고는 그를 보좌하게 하여 토번을 토벌하도록 했는데 군대를 머물게 하고 전진하지 않아 각각 사형에 처하고 귀양 보냈다. 이듬해 다시 조서를 내려 문창우상 잠장천을 무위도행군대총관으로 삼아 토번을 토벌하게 했는데 진군하다 중간에 토벌을 취소했다.

武后時與蠻夷同朝賀永昌元年詔文昌右相韋待價為安息道大總管安西大都護閻溫古副之以討吐蕃兵逗留坐死明年復詔文昌右相岑長倩為武威道行軍大總管討之兵半道罷

21) 그 이듬해(690) 대수령 갈소가 귀천부(貴川部)와 당항의 무리 30만을 이끌고 항복했는데 무후가 우옥검위장군 장현우를 안무사로 삼고 군대 2만을 거느리고 가서 마중하게 했는데 대도수(大度水: 사천성 서북에서 발원하여 성도 남쪽 낙산시 인근에서 민강으로 유입된다)에 이르렀을 때 토번이 갈소를 잡아 갔다. 그러나 다른 추장 잠삽(昝插)이 다시 강족과 오랑캐 8천을 거느리고 오자 ()현우가 즉시 그 부중을 엽주(葉州: 사천성 청계현 서남)에 머물게 하고 잠삽을 자사로 임명했다. 대도산(大度山)에 비석을 세워 전공을 기록했다.

又明年大首領曷蘇率貴川部與党項種三十萬降后以右玉鈐衞將軍張玄遇為安撫使率兵二萬迎之次大度水吐蕃禽曷蘇去而它酋昝插又率羌蠻八千自來玄遇即其部置葉州用昝插為刺史刻石大度山以紀功

22) 그 해(690) 또 조서를 내려 우응양위장군 왕효걸을 무위도행군총관에 임명하여, 서주도독 당휴경· 좌무위대장군 아사나충절(阿史那忠節)을 이끌고 가서 토번을 격파하게 하니 그 무리를 크게 파하고 4(: 안서4)을 회복해 안서도호부를 구자(龜茲)에 두고 병사를 주둔시켜 지키게 했다. 당시 사람들이 [안서] 4()의 존폐에 대해 의논하였는데, 우사(右史) 최융이 의견을 아뢰기를, “융적(戎狄)의 무리가 중국의 걱정거리가 된 것은 이미 오래이니, 오제(五帝삼왕(三王)도 신하로 삼지 못했습니다. ()은 백만의 군사로도 평성(平城: 산서성 대동현)에서 곤란에 빠졌으며, 그 후 ()무제(武帝)는 분개하고 사방의 오랑캐는 매우 기뻐하였는데, 장건(張騫)이 비로소 서역과 통하여 4(: 무위, 장액, 주천, 돈황 등 하서 4)을 설치하고, 2(: 옥문관과 양관)에 의지하여 흉노의 오른팔을 끊었습니다. 점차 황하와 황수(湟水)를 건너 영거(令居: 청해성 서녕시 동북쪽)에 성을 쌓아 [흉노와] 남쪽 강족() 사이의 연락을 두절시켰습니다. 이 때 장후정수(鄣候亭燧: 장은 요충에 세워진 성새를, 후는 적의 동정을 살피는 초소를, 정은 역정을, 수는 봉화대를 뜻한다)는 장성 밖 수천 리 까지 뻗어 있었으니 국고는 고갈되고 모든 병사와 군마가 동원되었으며 행인(行人: 빈객의 접대를 맡았던 관료) ·사자(使者)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가죽으로 화폐를 만들어 씀에 이르렀고, 산민법(算緡法: 한 무제 때 동전에 대해 세금을 부과하던 법으로 민전-緡錢 2천에 120전을 징수했다)을 시행하고, 배와 수레에 세금을 징수했으며 술을 전매했습니다. [오랑캐를] 회유하여 귀부시키지 않고 어찌 장구한 계책이라고 하겠습니까! 흉노는 이 때 고립되어 더욱 멀리 달아나 드디어 서역을 개척하고 관리를 두어 [서역을] 통치하였습니다. 광무(光武) 황제가 중흥을 이루자 모두 다시 내속하였는데, 연광(延光) 연간(122~125)에 이르러 세 번 끊어지고 세 번 통하였습니다. [우리] 태종문황제(태종)가 한 나라의 옛 업적을 따라 남산(南山)에서 총령(葱嶺: 파미르 고원)에 이르기까지 부(()을 설치하니, [인가에서 피어오르는] 연기가 서로 멀리 바라다 보였으므로 토번이 감히 침범하지 못했습니다. 고종(高宗) 때 관리는 있었으나 공적이 없었으니 4진을 버리고 점유할 수 없어 토번이 마침 세력을 뻗쳐 언기(焉耆) 서쪽으로 진입하면서 소리 높여 북을 치고 동쪽으로 말을 몰아 고창(高昌)을 넘고 거사(車師)를 지나 상락(常樂)을 침략하고 막하연적(莫賀延磧: 현재 하미-哈密와 돈황 사이에 위치한 합순 사막)을 횡단하여 돈황에 이르렀습니다. 지금 왕효걸이 단숨에 4진을 얻어 앞선 황제의 옛 영토를 수복하였는데 만약 또 잃는다면 이는 공적을 훼손하고 완성된 방책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4진을 지키지 못하면 오랑캐의 병사가 서역에 이르고, 서역이 불안하면 남쪽 강족이 동요하여 서로 연결되니 하서(河西)가 반드시 위험해집니다. 또한 막하연적은 이천 리에 걸쳐있고 물과 풀이 없어 만약 [남쪽의 강족이] 북쪽으로 오랑캐와 접한다면 당의 병사는 [막하연적을] 건너서 북쪽으로 갈 수 없어 이서(伊西: 이주-하미와 서주-투르판 동쪽 카라 코조북정(北庭: 북정도호부안서(安西)의 여러 번국()들을 모두 잃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의논은 중지되었다.

是歲又詔右鷹揚衞將軍王孝傑為武威道行軍總管率西州都督唐休璟左武衞大將軍阿史那忠節擊吐蕃大破其眾復取四鎮更置安西都護府於龜茲以兵鎮守議者請廢四鎮勿有也右史崔融獻議曰:「戎狄為中國患尚矣五帝三王所不臣漢以百萬眾困平城其後武帝赫然發憤甘心四夷張騫始通西域列四郡据兩關斷匈奴右臂稍稍度河築令居以絕南羌於是鄣候亭燧出長城數千里傾府庫殫士馬行人使者歲月不絕至作皮幣算緡法稅舟車榷酒酤夫豈不懷為長久計然也匈奴於是孤特遠竄遂開西域置使者領護光武中興皆復內屬至於延光三絕三通太宗文皇帝踐漢舊跡並南山抵葱嶺剖裂府鎮煙火相望吐蕃不敢內侮高宗時有司無狀棄四鎮不能有而吐蕃遂張入焉耆之西長鼓右驅踰高昌歷車師鈔常樂絕莫賀延磧以臨燉煌今孝傑一舉而取四鎮還先帝舊封若又棄之是自毀成功而破完策也夫四鎮無守胡兵必臨西域西域震則威憺南羌南羌連衡河西必危且莫賀延磧袤二千里無水草若北接虜唐兵不可度而北則伊西北庭安西諸蕃悉亡。」議乃格

23) 이 때 수령 발론찬이 돌궐의 가짜 가한(可汗) 아사나퇴자(‘가짜 가한이라는 표현은 아사나퇴자가 토번을 배후로 옹립되었음을 의미한다)와 함께 남쪽으로 쳐들어와 왕효걸과 냉천(冷泉)에서 싸웠으나 패해 달아났다. 쇄엽진수사(碎葉鎭守使) 한사충이 이숙몰사성(泥熟沒斯城)을 파했다.

증성 원년(695)에 흠릉과 찬파가 임조(臨洮)를 공격하니 왕효걸이 숙변도대총관이 되어 소라한산(素羅汗山)에서 싸웠고 오랑캐가 패해 돌아갔다. [토번이] 양주(涼州: 감숙성 무위시)를 공격하여 (양주)도독(都督)을 죽였다. 사신을 보내 화의를 청하면서 4진에서 철군할 것을 약속하고, 십성(十姓)의 땅을 분할하기를 청했다. 무후(武后)가 조서를 내려 통천위(通泉尉) 곽원진을 사신으로 가게 했는데 도중에 흠릉을 만났다. 곽원진이 말하기를, “녹동찬은 조정을 받들어 섬기면서 우호를 맹세함에 다함이 없었는데 지금에 와서는 함부로 관계를 단절하고 매년 변경을 침범하니, 아버지는 통교하였는데 아들이 그것을 끊었다. 그것이 효도인가? 아버지는 받들었는데 아들은 반란을 일으켰다. 그것이 충성인가?”라고 하였다. 흠릉이 말하기를, “그렇다. 천자께서 화평을 허락하여 두 나라가 국경의 수비를 없애고, 십성돌궐(十姓突厥)·4(四鎭)이 각기 군장을 세워 스스로 자신의 나라를 지킨다면 어떠한가?”라고 하였다. 곽원진이 말하기를, “당은 십성(十姓)·4(四鎭)을 통해 서쪽 땅을 진무하고 여러 나라의 주군이 되었으니 다른 도리가 있는 것이 아니며 여러 부()는 토번과는 달라 오랫동안 당에 편입된 백성들이다.”라고 하였다. 흠릉이 말하기를, “사신은 내가 여러 부()를 분할하여 당의 변환(邊患)을 만든다고 생각하는가? 내가 만약 토지와 재물을 탐했다면 청해(靑海황천(湟川)이 가까운데 지금 그곳을 버리고 다투지 않음은 또 왜인가? 돌궐의 여러 부는 넓디 넓은 사막 중에 있으며 중국과는 매우 먼 거리에 있는데 어찌 만 리 밖의 땅을 다투는가? 또한 [당조는] 사방의 오랑캐를 모두 신하로 삼고 겸병하여 먼 외국의 변경도 멸하지 않은 곳이 없는데 오직 토번만이 나라를 지키고 있으니 이는 단지 형제(흠릉 형제)가 삼가 주의하여 서로 보전됨을 얻었을 뿐이다. 십성(十姓) 중 오돌륙(五咄陸: 서돌궐 10성 부족의 하나)은 안서(安西)[도호부]에서 가까우나 토번에서는 멀고, 사근(俟斤: 서돌궐 10성 부족의 하나)은 우리 땅에서 큰 사막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데 기병이 말을 빠르게 달려 돌파하여도 열흘에 이르기 어려우니 걱정되는 점이다. 오해(烏海황하(黃河)의 땅은 산천이 매우 깊고 험준하며 병에 걸리기 쉬워서 원래 당군이 들어올 수 없는 곳이다. 만약 진군해 온다 해도 약한 군대와 나약한 장수가 오랑캐에 당하기 쉬우니 그런 까닭으로 내가 [이 땅을] 얻고자 하는 것이지 여러 부를 엿보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감주(양주()는 적석(積石: 적석군-積石軍. 청해성 귀덕현 동쪽)으로부터 2천리 거리에 있는데 넓은 곳은 수백에도 못 미치고, 좁은 곳은 겨우 백 리이니 내가 만약 장액(張掖옥문(玉門: 옥문관. 감숙성 돈황 서쪽)에서 출발하면 그대의 나라가 봄에는 농사짓지 못하고 가을에는 수확할 수 없어 5~6년도 되지 않아 서쪽을 끊을 수 있다. 지금 땅을 버리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니 이 역시 우리를 걱정할 것은 없다. 청해(靑海)의 전투에서 황인소가 화평을 약속했는데 변경을 지키는 병사가 경계하지 않은 틈에 최지변이 사근을 지나 우리 소와 양 만 두를 약탈하였으니 이를 구하고자 온 것이다.”라고 하였다. 토번이 사신을 파견해 다시 간곡히 청하였으나 곽원진이 강력히 불가함을 주장하니 무후가 그의 의견을 따랐다.

於是首領勃論贊與突厥偽可汗阿史那俀子南侵與孝傑戰冷泉敗走碎葉鎮守使韓思忠破泥熟沒斯城證聖元年欽陵贊婆攻臨洮孝傑以肅邊道大總管戰素羅汗山虜敗還又攻涼州殺都督遣使者請和約罷四鎮兵求分十姓地武后詔通泉尉郭元振往使道與欽陵遇元振曰:「東贊事朝廷誓好無窮今猥自絕歲擾邊父通之子絕之孝乎父事之子叛之忠乎?」欽陵曰:「然天子許和得罷二國戍使十姓突厥四鎮各建君長俾其國自守若何?」元振曰:「唐以十姓四鎮撫西土為列國主道非有它且諸部與吐蕃異久為唐編人矣。」欽陵曰:「使者意我規削諸部為唐邊患邪我若貪土地財賦彼青海湟川近矣今捨不爭何哉突厥諸部磧漠廣莽去中國遠甚安有爭地萬里外邪且四夷唐皆臣幷之雖海外地際靡不磨滅吐蕃適獨在者徒以兄弟小心得相保耳十姓五咄陸近安西於吐蕃遠俟斤距我裁一磧騎士騰突不易旬至是以為憂也烏海黃河關源阻奧多癘毒唐必不能入則弱甲孱將易以為蕃患故我欲得之非闚諸部也涼距積石道二千里其廣不數百狹纔百里我若出張掖玉門使大國春不耕秋不穫不五六年可斷其右今棄不為亦無虞于我矣青海之役黃仁素約和邊守不戒崔知辯徑俟斤掠我牛羊萬計是以求之。」使使者固請元振固言不可許后從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