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 임술일 (1일) | 진왕 이세민에게 조서를 내려 모든 군사를 감독하여 왕세충을 치게 하였다. |
임오일 (21일) | 진왕 이세민이 신안(하남성 신안현)에 도착하였는데 왕세충은 위왕 왕홍령을 파견하여 양양을 진수하게 하고 형왕 왕행본은 호뢰를 진수하게 하고 송왕 왕태는 화주를 진수하게 하고 제왕 왕세운은 남성을 검교하게 하고 초왕 왕세위는 보성성(황성)을 지키게 하고 태자 왕현웅은 동성을 지키게 하고 한왕 왕현서는 함가성을 지키게 하고 노왕 왕도순은 요의성을 지키게 하고 왕세충은 스스로 전투병사를 거느리고 좌보대장군 양경공은 조용양 28부의 기병을 거느리게 하고 우유격 대장군 곽선재는 내군 28부의 보병을 인솔하게 하고 좌유격 대장군 발야강은 외군 28부의 보병을 인솔하게 하였는데, 모두 3만명이 당을 대비하게 하였다. 나사신이 전군(前軍)을 거느리고 자간(낙양성의 서쪽)을 포위하니 왕세충은 스스로 군사 3만을 거느리고 이를 구원하였다. |
기축일 (28일) | 진왕이 장차 경무장을 한 기병을 거느리고 앞으로 가서 왕세충을 엿보았는데 갑자기 그들과 만나자 무리가 적어서 대적하지 못하고 길은 험하고 좁아서 왕세충에게 포위 되었다. 이세민이 좌우로 말을 달리며 활을 쏘아 그들의 좌건위장군 연기를 붙잡으니 왕세충이 마침내 물러났다. |
| 다음날 보병과 기병 5만을 인솔하고 자간으로 진군하니 왕세충은 자간의 수자리를 뽑아 낙양으로 돌아갔다. 이세민은 행군총관 사만보를 파견하여 의양(하남성 의양현 서쪽)에서 남쪽에서부터 용문을 점거하고 장군 유덕위는 태행의 동쪽에서부터 와서 하내를 포위하고 상곡공 왕군곽은 낙구에서부터 그들의 양도를 끊고 회주총관 황군한은 하음(하남성 맹현 북쪽)에서부터 와서 회락성을 공격하였으며, 대군이 북망(낙양성의 북쪽)에 주둔하고 군영을 연결하여 그들을 압박하였다. |
8월 | 갑진일 (14일) | 황군한이 교위 장야차를 펴견하여 수군으로 회락성(하남성 언사현 북쪽)을 습격하게 하여 이를 이기고 그 장수 달해선정을 붙잡고 하양의 남교를 끊고 돌아왔는데 그들의 보루와 모여 사는 곳 20여개를 항복 시켰다. 왕세충은 태지 왕현웅으로 하여금 양공경을 거느리고 회락을 공격하게 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마침내 그 서쪽에 월성을 쌓고 군사를 머물게 하여 지켰다. 왕세충은 창성궁에 진을 치고 진왕 이세민도 역시 진을 치고 물을 사이로하며 서로 말을 하였다. “군사들을 쉬게 하고 좋게 아야기하는 것이 좋지 않겠소?” “조서는 동도(낙양)을 빼앗으려고 하는 것이지 좋은 이야기를 하게 한 것이 아니오.” |
9월 | 계유일 (13일) | 왕세충의 현주(하남성 필양현)총관 전찬이 거느리고 있는 25개의 주를 가지고 와서 항복하였는데 이로부터 양양(호북성 번양시)의 소식은 왕세충과 단절 되었다. |
정축일 (17일) | 왕세충의 위주(하남성 울지현)자사인 시덕예가 거느리고 있는 기주(하남성 기현), 하주(하남성 태강현), 진주(하남성 회양현), 수주(하남성 언양현?), 허주(하남성 허창시), 영주(안휘성 부양시), 일주 등 일곱 주를 가지고 와서 항복하였다. |
신사일 (21일) | 이세민이 500의 기병을 데리고 전장터를 다니다가 위의 무릉선에 올랐다. 왕세충은 보병과 기병 1만여 명을 인솔하고 갑자기 들이 닥쳐 그를 포위하였다. 선웅신이 삭을 이끌어 잡고 곧바로 이세민에게로 달려오니 울지경덕이 이세민을 보호하여 포위를 벗어났다. 이세민과 울지경덕은 다시 기병을 인솔하고 돌아가서 싸우며 왕세충의 진영을 들락날락하는데 가고 돌아오는데 장애가되는 것이 없었다. 굴돌통이 많은 군사를 이끌고 도착하니 왕세충의 군사는 대패하였고 겨우 몸만 죽음을 면하였으며 그들의 관군장군 진지략을 사로잡고 참수한 것이 1천여급이었으며 창과 방패를 든 군사 6천명을 잡았다. 울지경덕에게 금을 한 궤짝 내려주었다. |
임오일 (22일) | 병원진이 복주를 가지고 와서 항복하였다. |
10월 | 갑오일 (5일) | 왕세충의 대장군 장진주가 와서 항복하였다. |
갑진일 (15일) | 행군총관 나사신이 왕세충의 협석보(하남성 신안현 서쪽)를 습격하여 이를 뽑았다. 나사신이 또 천금보(낙양성 북쪽)를 함락하였다. 두건덕이 유주를 포위하였으나 돌아갔다. |
무신일 (19일) | 두건덕이 무리 20만을 인솔하고 다시 유주(현 북경시)를 공격하였다. 설만균과 설만철이 물리치니 돌아갔다. 양경이 관주(형양)을 들어 항복하니 이세민은 총관 이세적을 파견하여 그 성을 점거하게 하였다. |
경술일 (21일) | 그때에 왕세충의 태자 앙현웅이 호뢰에서 진수하면서 영(하남성 형양현)과 변(하남성 개봉시) 사이에 진을 치고 있다가 이 소식을 듣고 군사를 인솔하고 관성으로 나아가니 이세적이 이를 쳐서 물리쳤다. 양성(하남성 등봉현) 현령 왕웅이 여러 보루를 인솔하고 와서 항복하였는데 이세민이 이세적으로 하여금 군사를 인솔하고 그에 대응하게 하고 왕웅을 숭주(양성현을 숭주로 고침) 자사로 삼자 숭주의 남쪽 길은 비로소 소통되었다. 또 비밀리에 변주자사 왕요한에게 장자보를 도모하게 하니 왕요한이 장자보의 목을 베어가지고 항복하였다. 왕현웅은 여러 주가 모두 배반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두려워하여 달아나서 낙양으로 갔다. 왕홍렬이 양양(호북성 양번시)을 점거하니 황상이 금주 총관부 사마 경양 사람 이대량으로하여금 번(호북성 양번시 근처)과 등(호북성 양번시 근처)을 안무하고 이를 도모하게 하였다. |
11월 | 경신일 (1일) | 이대량이 번진성을 공격하여 이를 뽑고 그의 장수 국대안의 목을 베고 그 성책 14개를 떨어뜨렸다. |
무자일 (29일) | 이달에 두건덕이 황하를 건너서 맹해공을 쳤다. 애초에 왕세충이 두건덕의 여양을 침입하자 두건덕이 은주(하남성 회가현)을 습격하여 깨뜨려서 이에 보복하였다. 이로부터 두 나라는 악한 관계를 맺어서 사자가 왕래하지 아니하였다. 당의 군사가 낙양을 압박하자 왕세충은 사자를 파견하여 두건덕에게 구원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두건덕의 중서시랑 유빈이 두건덕에게 유세하였다. “천하가 크게 혼란하여 당은 관서(關西)를 얻었고 정(왕세충의 나라)은 하남을 얻었으며 하(두건덕의 나라)는 하북을 얻었으니 함께 정족의 형세를 이루었습니다...... (이하 생략: 결국 왕세충을 도와야 한다는 말을 하였음) 두건덕이 이 말을 쫒아서 사자를 파견하여 왕세충에게 원조하겠다고 하고 또, 당에 가서 낙양의 군사활동을 그만두어 달라고 청하니 이세민이 보류하고 대답하지 않았다. |
12월 | 신묘일 (3일) | 왕세충의 허(하남성 허창시)와 박(안휘성 박주시) 등 11개 주가 모두 항복을 받아달라고 청하였다. |
신축일 (13일) | 왕세충의 수주(호북성 수주시) 총관 서의가 주를 들어 항복하였다. |
계묘일 (15일) | 왕세충이 그 형의 아들 대왕(代王) 왕완과 큰 손자 왕안세를 파견하여 두건덕에게 가서 또 군사를 달라고 빌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