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고구려와 중국의 관계-146(수나라때-5, 수서 고려전)

상 상 2013. 8. 26. 17:37

차 례

 

1. 수서 본기

2. 수서 고려전

3. 자치통감(수기2,5,6 등)

4. 수서 본기 분석

5. 수서 고려전 분석

6. 자치통감(수기2, 5,6 등) 분석

7. 고구려와 수나라의 관계

 

 

2. 수서 고려전(수서 권81 동이열전 고려전)

 

※ 아래에 있는 번역문은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번역한 것을 잘못된 부분은 본인이 정정한 것이며

   원문은 대만의 新漢籍全文(http://hanchi.ihp.sinica.edu.tw/ihp/hanji.htm)에서 가져 온 것임.

번 역 문

원 문

개황 초에는,입조하는 사신이 빈번하게 있었다. 진나라를 평정한 후에 이르러,탕이 크게 두려워하여,군사를 훈련시키고 곡식을 저축하여 방어할 계획을 세웠다. 개황 17년(597년) (황)상이 탕에게 옥새를 찍은 문서를 주며 말했다.“짐이 천명을 받아 사랑으로 기르고 강토를 거느리며, 왕에게 바다 한구석을 맡겨 조정의 교화를 선양하여 모든 인간으로 하여금 저마다의 뜻을 이루게 하고자 하였오. 왕은 사신을 보낼 때마다 매년 늘 조공을 바치면서 번부라고 일컫기는 하지만, 성의와 예절을 다하지 않고 있소. 왕이 남의 신하가 되었으면 모름지기 짐과 덕을 같이 베풀어야 할터인데, 오히려 말갈을 못견디게 괴롭히고 거란을 견고하게 가두었소. 여러 번국이 머리를 조아려 나에게 신첩 노릇을 하는게 [무엇이 나쁘다고 그처럼] 착한 사람이 의리를 사모하는 것을 분개하여 어찌 해치는 뜻이 (그렇게)심하오? 태부의 공인은 그 수가 적지 않으니, 왕이 반드시 써야 한다면 [나에게] 알리는 게 스스로 가능한데, 이전에는 몰래 재물을 뿌려 소인을 움직여, 사사로이 쇠뇌의 기술자를 그대 나라로 빼어 갔소. 이 어찌 병기를 수리하는 목적이 나쁜 생각에서 나온 까닭에 남이 알까 봐 두려워서 [사람을] 훔쳐 간 것이 아니겠소? 그때 사자를 보내어 그대 번국을 위무한 것은 본래 그대들의 인정을 살펴보고, 정치하는 법을 가르쳐 주고자 함이었소. 그린데 왕은 사자를 빈 객관에 앉혀 놓고 엄하게 막아 지키며, 눈과 귀를 막아 영영 듣고 보지도 못하게 하였소. 무슨 음흉한 계획이 있기에 남에게 알리고 싶지 않아서 관원을 금제하면서까지 방문해 살펴보는 것을 두려워하오? 또 여러번 기마병을 보내어 변경 사람을 살해하고, 여러 차례 간계를 부려 그릇되고 바르지 않은 말을 지어 내었으니, 마음에는 따르는 바가 없었소. 짐은 창생을 모두 적자와 같이 여겨 왕에게 하늘 아래(의 귀퉁이)를 주고, 벼슬을 주어, 깊은 은혜와 남다른 혜택을 원근에 드러내려 하였소. 왕은 오로지 불신감에 젖어 언제나 시의(猜疑)하여 사신을 보낼 때마다 소식을 밀탐하여 가니, 순수한 신하의 뜻이 어찌 이와 같을 수 있소? 이는 모두 짐의 훈도가 밝지 못한 연유이므로, 왕의 과실을 모두 너그러이 용서하겠으니, 오늘 이후로는 반드시 고치기 바라오. 번신의 예절을 지키고, 조정의 정전을 받들어, 스스로 그대 나라를 교화시키고, 남의 나라를 거역하지 않는다면, 길이 부귀를 누릴 것이며, 진실로 짐의 마음에 맞는 것이오. 그곳은 비록 땅이 협소하고 사람은 적지만, 하늘 아래 온세상 밑은 다 짐의 신하가 되는 것이오. 이제 만약 왕을 내쫓는다면 자리를 비워둘 수는 없으므로, 결국은 관속을 다시 가려뽑아 그곳을 안무하게 될 것이오. 왕이 만약 마음을 씻고 행동을 바꾸어, 헌장을 그대로 따른다면 곧 짐의 좋은 신하가 되는 것이니, 무엇 때문에 수고롭게 따로 재주있는 선비를 보내겠소. 예전에 제왕은 법을 마련할 적에 인과 신을 우선으로 하여, 선이 있으면 반드시 상을 주고, 악이 있으면 반드시 벌을 주니, 사해의 안이, 함께 짐의 뜻을 들었소. 만약 왕이 죄가 없는 데도, 짐이 갑자기 병사로 친다면, 나머지의 번국들이 나를 어떻게 말하겠소! 왕은 반드시 마음에 거리낌없이 짐의 이 뜻을 받아들여, 부디 의혹을 갖지 말고, 다른 의도를 품는 것을 고쳐주시오. 지난 날 진숙보는 여러 대에 걸쳐 강(江)[남(南)]에 있으면서 인민을 잔해(殘害)하고 우리의 봉후(烽候)를 놀라게 하며 우리의 변경을 약탈하였었소. 짐이 타이르고 훈계하기를 10년이나 하였으나, 그는 장강의 바깥이라는 것만 믿고 한 구석의 무리를 모아 미친듯이 거들먹거리며 짐의 말을 좇지 않았소. 때문에 장수에게 명하여 군사를 출동시켜 흉역을 제거토록 하였는데, 오가는 날짜는 한달이 못되었고 군사도 수천명에 지나지 않았었소. 역대의 포구를 하루 아침에 말끔히 소탕하니, 원근이 안녕을 누리고 사람과 귀신이 모두 기뻐하였소. 그런데 왕 만이 이를 한탄하고 마음 아파한다는 말이 들리고 있소. 관원의 성적이 좋은 사람을 승진시키고, 공적이 없는 사람을 내쫓는 것은, 담당 집행관리의 직무이나, 왕에게 죄를 준다 하여도 진이 멸망되어서가 아니고, 왕에게 상을 내린다 하여도 진이 존재하여서가 아닌데, 어찌하여 그처럼 화를 즐기고 난을 좋아하고 있소? 왕은 요수의 폭이 장강과 어떠하며, 고려의 인구가 많고 적음이 진나라와 어떠하다고 보고 있소? 짐이 만약 포용하여 길러 주려는 생각을 버리고 왕의 지난날의 허물을 문책하고자 하면 한명의 장수로도 족하지 무슨 많은 힘이 필요하겠소! 간절히 깨우쳐 주어 왕 스스로 새롭게 되기를 허용하니, 마땅히 짐(朕)의 뜻을 알아서 스스로 많은 복을 구하기 바라오.” 탕(湯)은 이 글을 받고 두려워하여 표문(表文)을 올려 사죄하려 하였으나, 마침 병으로 죽었다. 아들 원(元)이 이어서 즉위하니, 고조는 사신으로 하여금 원에게 상개부 의동삼사를 부여하고 요동군공의 작위를 이어받게 하며 옷 한 벌 일체를 주었다. 원이 표문을 올려 사례함과 아울러 상서(祥瑞)를 축하하면서 왕으로 봉하여 줄 것을 청하였다. 고조는 원을 우선 책봉하여 왕으로 삼았다.

開皇初,頻有使入朝。及平陳之後,湯大懼,治兵積穀,為守拒之策。開皇十七年,上賜湯璽書曰:朕受天命,愛育率土,委王海隅,宣揚朝化,欲使圓首方足各遂其心。王每遣使人,歲常朝貢,雖稱藩附,誠節未盡。王既人臣,須同朕德,而乃驅逼靺鞨,固禁契丹。諸藩頓顙,為我臣妾,忿善人之慕義,何毒害之情深乎?太府工人,其數不少,王必須之,自可聞奏。昔年潛行財貨,利動小人,私將弩手逃竄下國。豈非修理兵器,意欲不臧,恐有外聞,故為盜竊?時命使者,撫慰王藩,本欲問彼人情,教彼政術。王乃坐之空館,嚴加防守,使其閉目塞耳,永無聞見。有何陰惡,弗欲人知,禁制官司,畏其訪察?又數遣馬騎,殺害邊人,屢騁姦謀,動作邪說,心在不賓。朕於蒼生悉如赤子,賜王土宇,授王官爵,深恩殊澤,彰著遐邇。王專懷不信,恒自猜疑,常遣使人密覘消息,純臣之義豈若是也?蓋當由朕訓導不明,王之愆違,一已寬恕,今日以後,必須改革。守藩臣之節,奉朝正之典,自化爾藩,勿忤他國,則長享富貴,實稱朕心。彼之一方,雖地狹人少,然普天之下,皆為朕臣。今若黜王,不可虛置,終須更選官屬,就彼安撫。王若洒心易行,率由憲章,即是朕之良臣,何勞別遣才彥也?昔帝王作法,仁信為先,有善必賞,有惡必罰,四海之內,具聞朕旨。王若無罪,朕忽加兵,自餘藩國謂朕何也!王必虛心納朕此意,慎勿疑惑,更懷異圖。往者陳叔寶代在江陰,殘害人庶,驚動我烽候,抄掠我邊境。朕前後誡勑,經歷十年,彼則恃長江之外,聚一隅之眾,惛狂驕傲,不從朕言。故命將出師,除彼凶逆,來往不盈旬月,兵騎不過數千。歷代逋寇,一朝清蕩,遐邇乂安,人神胥悅。聞王歎恨,獨致悲傷,黜陟幽明,有司是職,罪王不為陳滅,賞王不為陳存,樂禍好亂,何為爾也?王謂遼水之廣何如長江?高麗之人多少陳國?朕若不存含育,責王前愆,命一將軍,何待多力!慇懃曉示,許王自新耳。宜得朕懷,自求多福。湯得書惶恐,將奉表陳謝,會病卒。子元嗣立。高祖使使拜元為上開府、儀同三司,襲爵遼東郡公,賜衣一襲。元奉表謝恩,并賀祥瑞,因請封王。高祖優冊元為王。

 

이듬해(개황18년) 원이 말갈의 무리 만여 기병을 거느리고 요서에 침구하였는데 영주총관 위충이 치니 달아났다. 고조가 소식을 듣고 크게 노하여 한왕 (양)량(諒)을 원수(元帥)로 삼고 수군과 육군을 총동원하여 고려를 치도록 명하는 한편, 조서를 내려 그 작위를 없애도록 하였다. 이때 군량 수송이 이어지지 않아 육군(六軍)의 먹을 것이 모자라고, 또 군사가 임유관을 나가서는 전염병마저 만나 군대가 (기세를) 떨치지 못하였다. (황제가) 요수에 이르자, 원(영양왕)도 두려워하여 사신을 보내 사죄하고, 황상에게 표문을 올려 칭하기를,‘요동 분토(糞土)의 신, 원’운운하였다. 황상은 군대를 철수하고, 처음과 같이 대우하니, 원도 해마다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明年,元率靺鞨之眾萬餘騎寇遼西,營州總管韋沖擊走之。高祖聞而大怒,命漢王諒為元帥,總水陸討之,下詔黜其爵位。時餽運不繼,六軍乏食,師出臨渝關,復遇疾疫,王師不振。及次遼水,元亦惶懼,遣使謝罪,上表稱「遼東糞土臣元」云云。上於是罷兵,待之如初,元亦歲遣朝貢。

양제가 제위를 이어 받으매, 천하가 전성하여, 고창왕과 돌궐의 계인 가한이 친히 대궐에 나아와 조공을 바쳤다. 그리하여 원을 불러 입조케 하니, 원이 두려워하여 번신의 예절을 자못 빠뜨렸다. 대업 7년(611년) 제(帝)가 장차 원의 죄 토벌하려고, 황제의 수레가 요수를 건너, (황)상이 요동성에 군영을 설치하고, 길을 나누어 군사를 출동시켜, 각기 병사를 그 성 아래로 정돈하였다. 고려는 군사를 거느리고 나와 막았으나, 전투가 다수 불리하자, 모두 성을 닫고 굳게 지켰다. 제(帝)는 제군에 명하여 성을 공격케 하였다. 또 여러 장수들에게 칙서로,“고려가 만약 항복을 하면 바로 받아들이고, 군사를 풀어서는 않된다.”고 명하였다. 성이 장차 함락되려 할때, 적이 번번이 항복을 청한다고 말하였으나, 여러 장수들이 황제의 뜻에 따라 감히 기회를 이용하여 나아가지 못하고, 먼저 (황제에게) 달려가서 아뢰도록 명령하였다. 회보가 도착할 무렵이면 적들이 수비를 역시 정비하고 적절히 나와서 맞서 싸웠다. 이와 같이 하기를 두 세 번을 되풀이하였으나 양제는 깨닫지 못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군량은 다하고 군사는 지친 데다, 군량 수송마저 이어지지 않아 모든 군대가 패전하니, 결국 후퇴하였다. 이 출전에서는 단지 요수 서쪽에 있는 적의 무려라 만을 함락시켜 요동군 및 통정진을 설치하고 돌아왔을 뿐이다.

煬帝嗣位,天下全盛,高昌王、突厥啟人可汗並親詣闕貢獻,於是徵元入朝。元懼,藩禮頗闕。

大業七年,帝將討元之罪,車駕渡遼水,上營於遼東城,分道出師,各頓兵於其城下。高麗率兵出拒,戰多不利,於是皆嬰城固守。帝令諸軍攻之,又勑諸將:「高麗若降者,即宜撫納,不得縱兵。」城將陷,賊輒言請降,諸將奉旨不敢赴機,先令馳奏。比報至,賊守禦亦備,隨出拒戰。如此者再三,帝不悟。由是食盡師老,轉輸不繼,諸軍多敗績,於是班師。是行也,唯於遼水西拔賊武厲邏,置遼東郡及通定鎮而還。

(대업)9년(613년)에 양제가 다시 친정(親征)하였다. 이때는 칙서로 모든 군대에게 상황에 맞게 적절히 대응하라고 명하였다. 여러 장수들이 길을 나누어 성을 공격하니, 적의 군세가 날로 위축되었다. 때마침 양현감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반서가 도착하자, 양제는 크게 두려워하여 그날로 육군(六軍) 모두를 이끌고 돌아왔다. 병부시랑 곡사정이 도망하여 고려로 들어가니, 고려가 사실을 낱낱이 알고서 정예병을 총동원해 추격을 해와 뒤에 따르던 부대는 대부분 패하였다. (대업)10년(614년)에 또 다시 천하의 군사를 징발하였으나, 때마침 도적이 벌떼처럼 일어나, 사람들 대다수가 고향을 버리고 떠돌았으며, 곳곳마다 교통이 두절되어, 군사가 대다수 기한에 맞추어 오지 못했다. (황제가) 요수에 이르자, 고려도 피폐되어서 사신을 보내어 항복을 청하며 곡사정을 가두어 보내 속죄하였다. 황제가 허락하고 회원진에 주둔하여 항복 문서를 받았다. 이에 포로와 군대의 무기 및 양식을 가지고 돌아왔다. (황제가) 서울에 도착하여 고려의 사자로 하여금 친히 태묘에 고하도록 한 뒤 억류시켰다. 이어서 원을 불러 들여 입조토록 하였으나, 원은 끝내 오지 않았다. 양제는 제군(諸軍)을 엄중히 정비하여 다시 후에 거사할 것을 꾀하였으나, 마침 천하에 대란이 일어나 결국 다시 실행할 수 없었다.

九年,帝復親征之,乃勑諸軍以便宜從事。諸將分道攻城,賊勢日蹙。會楊玄感作亂,反書至,帝大懼,即日六軍並還。兵部侍郎斛斯政亡入高麗,高麗具知事實,悉銳來追,殿軍多敗。

十年,又發天下兵,會盜賊蜂起,人多流亡,所在阻絕,軍多失期。至遼水,高麗亦困弊,遣使乞降,囚送斛斯政以贖罪。帝許之,頓於懷遠鎮,受其降款。仍以俘囚軍實歸。至京師,以高麗使者親告於太廟,因拘留之。仍徵元入朝,元竟不至。帝勑諸軍嚴裝,更圖後舉,會天下大亂,遂不克復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