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고구려와 중국의 관계-23(전연,前燕 때①)

상 상 2012. 11. 13. 18:08

 

※ 이 글은 본인의 글 http://blog.daum.net/cdh571/1319을 바탕으로 보완, 확장하고 나누어서 올리는 것임.

☆ 또한 이 글에는 기간이 겹쳐지므로 ‘고구려와 서진과의 관계’에 관한 글이 겹쳐있음.

 

글의 순서

 

1. 고구려와 전연(前燕)의 관계

2. 고구려와 전연 관계사(史)

3. 고구려와 전연 관계 기록

 

 

1. 고구려와 전연(前燕)의 관계

 

고구려는 중국이 혼란에 빠지자 기회를 놓치지 않고 옛 위만조선의 땅을 되찾았다.

그러나 요서쪽에 있었던 선비 묘용씨(전연)가 서쪽으로 선비 우문부 선비 단부 석륵의 후조와 부딪히며 세력이 커지면서

요동쪽으로 세력을 확장하자 고구려는 전연과 요동을 놓고 다툼을 벌이다가 모용황이 서울을 용성(요녕성 조양)으로 옮기고

고구려를 침공하여 힘은 전연쪽으로 기울었다.

이후 전연은 다시 서쪽으로 후조, 염위를 물리치고 화북에 자리 잡으나 18년만에 전진의 왕 부견에게 멸망당하였다.

이에따라 고구려는 전진왕 부견과 국교를 맺는다.

 

전연(前燕)을 세운 선비 모용부는 고구려의 노예로 살았다가 고구려를 탈출하여 독립한 것으로 보인다.

그 근거는 다음과 같다.

 

1) 유리왕 때 선비가 고구려의 속국이 되었는데

이후 고구려를 배반하여 탈출한 기록이 없다.

그런데,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선비가 고구려를 배반하고 탈출한 기록이 보인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고구려전을 보면

 

『백고(伯固: 고구려 8대 신대왕) 때부터 [고구려는] 자주 요동(遼東)을 노략질하였고,

또 유망(流亡)한 호(胡)[族] 5백여 호(戶)를 받아들였다.

건안(建安) 연간(196~219)에 .......(중략).......

[지난 날] 항복했던 호(胡)[족(族)]도 이이모(伊夷模: 고구려 10대 산상왕)를 배반하므로

이이모(伊夷模)는 새로 나라를 세웠는데 오늘날 [고구려가] 있는 곳이 이곳이다.』

이렇게 되어 있다.

 

즉, 산상왕 때 고구려가 내분이 일어나 나라가 풍비박산이 나자 이때를 틈타 선비가

고구려를 배반하고 탈출하여 요서(遼西)에 터를 잡은 것으로 보인다.

 

2) 선비 모용부를 일으킨 사람이 바로 모용외인데

진서 모용외 전을 보면

『(모용외의) 증조(曾祖)인 막호발(莫護跋)은 위(魏)나라 초 그의 여러 부(部)를 이끌고

요서(遼西)로 들어와 살았고, 선제(宣帝)(사마의)를 따라 공손씨(公孫氏: 공손연)를 치며 공을 세워 솔의왕(率義王)으로 임명되고

극성(棘城) 북쪽에 처음으로 건국하였다.(曾祖莫護跋, 魏初率其諸部入居遼西, 從宣帝伐公孫氏有功, 拜率義王, 始建國於棘城之北)』

이렇게 되어 있다.

 

사마의가 공손연을 멸망시킨 때가 238년 8월이다.

그리고 선비족이 고구려를 배반하고 탈출한 때는 산상왕이 수도를 옮긴 때인 209년 10월이다.

다시말해서 선비 모용부는 209년 10월 경에 고구려를 탈출하여 238년 8월 이전에 요서(遼西)에 정착한 것으로 보인다.

 

3) 선비 모용부는 342년 10월 고구려를 침략하고 있는데

고구려의 지리를 아주 자세히 알고 있다.

 

자치통감 진기19 성제 함강 8년(342년) 10월조를 보면 고구려 서울인 환도로 가는 길이 남쪽과 북쪽 두 개의 길이 있고

남쪽 길은 험하고 좁은 반면 북쪽 길은 평평하고 넓다고 명확하게 알고있다.

옛날에는 지리적 정보가 비밀로 되어 있고 외국인에 대하여는 어느 누구에게도 알려주지 않는다.

그런데 선비 모용부는 아주 자세하게 알고 있다.

왜일까? 선비 모용부가 고구려에 살았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유리왕 때인 서기전 9년부터 산상왕 때인 서기209년까지 무려 200년 이상을 고구려에 살았으니

고구려의 지리에 대해 아주 자세하게 알 수 밖에 없다.

이러한 점을 볼때에도 선비 모용부는 고구려에서 노예로 살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4) 선비 모용부가 세운 후연은 결국 고구려의 품으로 돌아온다

전연은 후연으로 이어지고 후연의 백성과 문무백관은 북연으로 이어지는데

북연은 북위와 충돌이 벌어져 나라가 위험하게 되자 고구려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나라가 망하게 되자 결국 왕과 대신, 백성 모두가 고구려로 망명한다.

같은 선비족인 북위에 통합되기를 거부하고 왜 고구려로 갔을까?

이런 걸 수구지심(수구초심)이라고 한다.

 

여우가 죽을 때 머리를 자기가 살던 언덕 쪽으로 둔다는 것이다.

나라가 위험하게 되자 자기가 살았던 고구려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나라가 망하게 되자 자기가 살던 고구려로 돌아간 것으로 보인다.

 

5) 연나라는 모용황 때인 342년 10월, 고구려를 침략하고 5만명을 잡아갔는데

연나라에서는 고구려 사람들을 상당히 우대하고 있다.

 

고운은 모용보의 양자가 되어 나중에는 후연의 마지막 황제가 되는데

이때 고운(그때의 이름은 모용운)을 황제로 세운 풍발이 모용운에게 한 말이 있다.

 

자치통감 권114, 진기36, 안제 의희 3년(407년), 가을 7월 계해일(26일)조를 보면

 

『공은 고씨(高氏)의 이름 높은 집안(名家)인데, 어떻게 다른 사람의 양자가 될수 있으며...(公,高氏名家,何能為人養子)...

이렇게 말하고 있다.

 

후연에서 고구려 사람들을 높은 집안(名)로 말하고 있다.

포로로 잡혀갔는데도 왜 이런 대접을 받았을까?

 

전연과 후연을 세운 선비 모용부가 비록 자기들이 나중에 잘되어 천하를 호령하였지만

본래 자기들은 고구려의 하인 생활을 했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하고 생각되며,

본래 고구려 사람들이 자기들의 위에 있었던 존귀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하고 생각된다.

 

북제를 세운 고환의 증조 할아버지 고호(高湖)도

후연에서 산기상시라는 좋은 벼슬을 하고 있다

(자치통감 권108, 진기30, 효무제 태원 20년(395년) 5월 갑술일(28일) 기사를 보면

「산기상시 고호(高湖)가 간하였다.」고 하면서 고호(高湖)가 말한 내용이 나온다.)

 

6) 이러한 점은 북위때도 마찬가지였다.

북위 역시 선비족인데 북위 세종때의 권력자 고조(高肇) 열전을 보면

(위서 열전 권83 하, 열전 외척 제71 하)

고조의 아버지인 고양(高颺)과 고양의 동생인 고승신(高乘信)이 북위에 들어가자

북위는 여위장군(厲威將軍)과 명위장군(明威將軍)을 준다.

 

고조의 여동생 문소황태후는 풍태후가 직접 머나먼 용성까지 가서 데리고 온 사람이며

자기 여조카들이 황후로 있었음에 불구하고 직접 황제와 맺어준 사람이다.

문소황태후의 신분을 높게 보지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또 다른 고구려 사람인 고숭(高崇) 열전을 보아도

고숭의 아버지 고잠(高潛)이 북위에 들어가자 개양남(開陽男)의 작위를 주었다.

 

이렇게 고구려 사람들은 선비족에게 상당히 높은 대우를 받았다.

왜 그랬을까?

 

아마도 200 여년간 고구려 사람들이 자기들 위에 존엄한 사람들로 살았기 때문에

태생적으로 선비족들은 고구려 사람들을 높은 신분으로 대한 것이 아니겠는가하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