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고구려와 중국의 관계-21(중국의 삼국, 위촉오 시기②)

상 상 2012. 11. 8. 17:43

 

(아래 글은 본인의 글 http://blog.daum.net/cdh571/1330을 시대순서에 따라 다시 올리는 것임)

 

2. 고구려와 중국의 삼국(위촉오) 관계기록-2

 

< 삼국사기 고구려 제11대 동천왕 본기 >

 

20년(246) 가을 8월에 위나라가 유주자사(幽州刺史) 관구검(毋丘儉)을 보내

만 명을 거느리고 현도로부터 침범하여 왔다.

 

왕은 보병과 기병 2만 명을 거느리고 비류수 가에서 맞아 싸워서 이기고,

3천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

또 군사를 이끌고 다시 양맥(梁貊)의 골짜기에서 싸워서 또 이기고,

3천여 명을 베거나 사로잡았다.

 

왕은 여러 장수들에게 말하였다.

“위나라의 대군이 오히려 우리의 적은 군대보다 못하고,

관구검이란 자는 위나라의 명장이지만 오늘 [그의] 목숨이 내 손아귀에 있다.”

그리고는 철기(鐵騎) 5천을 거느리고 나아가 공격하였다.

 

[관구]검이 방형의 진[方陣]을 치고 결사적으로 싸우니,

우리 군대는 크게 궤멸되고 죽은 자가 1만 8천여 명이었으며,

왕은 기병 1천여 기(騎)를 데리고 압록원(鴨淥原)으로 달아났다.

 

겨울 10월에 [관구]검이 환도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켜 사람들을 죽이고

장군 왕기(王頎)를 보내 왕을 쫓았다.

 

왕은 남옥저로 달아나 죽령(竹嶺)에 이르렀는데,

군사들이 흩어져 거의 다 없어지고, 오직 동부(東部)의 밀우(密友)만이 곁에 있다가

왕에게 말하였다.

“지금 추격병이 가까이 닥쳐 와서 형세가 벗어날 수 없습니다.

청컨대 신이 죽을 각오로 막겠습니다. 왕께서는 달아날 수 있을 것입니다.”

마침내 [그는] 결사대를 모집하여 그들과 함께 적진으로 가서 힘껏 싸웠다.

 

왕은 몰래 빠져나가 산 골짜기에서 흩어진 군졸을 모아 스스로 호위하면서

“밀우를 찾아오는 자에게는 후하게 상을 주겠다.”고 말하였다.

 

하부(下部)의 유옥구(劉屋句)가 나서며 “신이 가보겠습니다.” 하고,

전장에서 밀우가 엎어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곧 업고 돌아왔다.

왕은 그를 무릎에 눕혔는데, 한참만에 이윽고 깨어났다.

 

왕은 몰래 이리저리 돌아서 남옥저에 이르렀으나,

위나라의 군사가 좇아오기를 그치지 않았다.

왕은 방도가 막히고 기세가 꺾여서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데,

동부사람 유유(紐由)가 나서며 말하였다.

 

“형세가 매우 위급하나 헛되이 죽을 수는 없습니다. 신에게 어리석은 계책이 있습니다.

청컨대 음식을 가지고 가서 위나라 군사에게 제공하면서

틈을 엿보아 그 장수를 찔러 죽이려고 합니다.

만약 신의 계책이 성공하면, 왕께서는 분연히 공격하여 승부를 낼 수 있을 것입니다.”

왕은 “좋다”고 하였다.

 

유유가 위나라 군대로 들어가 거짓으로 항복하며 말하였다.

“우리 임금이 대국에 죄를 얻어서 도망쳐 바닷가에 이르렀으나,

몸 둘 땅이 없어서 장차 진영 앞에 나와 항복을 청하고 목숨을 맡기려고,

먼저 저를 보내 변변치 못한 음식을 가지고 와서 부하들에게 먹이려 합니다.”

 

위나라 장수가 그 말을 듣고 그 항복을 받으려 하였다.

 

유유는 식기에 칼을 감추고 앞으로 나아가,

칼을 빼서 위나라 장수의 가슴을 찌르고 함께 죽으니,

위나라 군대가 마침내 어지러워졌다.

 

왕은 군사를 세 길로 나누어 급히 공격하니,

위나라 군대가 소란해져서 군진을 이루지 못하고 마침내 낙랑(樂浪)으로부터 물러갔다.

 

왕은 나라를 회복하고 공을 논하였는데, 밀우와 유유를 으뜸으로 삼았다.

밀우에게는 거곡(巨谷)과 청목곡(靑木谷)을 주고,

[유]옥구에게는 압록원과 두눌하원(杜訥河原)을 식읍으로 주었다.

유유에게 벼슬을 추증하여 구사자(九使者)로 삼고,

그 아들 다우(多優)를 대사자(大使者)로 삼았다.

 

이 전쟁 때 위나라 장군이 숙신의 남쪽 경계에 이르러 돌에 그 공을 새겼으며,

또 환도산(丸都山)에 이르러 불내성(不耐城)에 공을 새기고 돌아갔다.

이전에 [동천왕의] 신하 득래(得來)는 왕이 중국을 침략하고 배반하는 것을 보고

여러 차례 간하였으나, 왕은 듣지 않았다.

득래가 한탄하여 “이 땅에 장차 쑥대가 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라 하고,

결국 먹지 않고 죽었다.

관구검이 모든 군사들에게 명령하여 그 묘를 무너뜨리지 말고

그 나무를 베지 못하게 하였으며, 그 처자를 포로로 잡았으나 모두 놓아 보내 주었다.

 

<괄지지(括地志)에 이렇게 쓰여 있다.

『불내성은 곧 국내성인데 성은 돌을 쌓아 만들었다.』

이것은 환도산과 국내성이 서로 접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양서(梁書)에 이렇게 쓰여 있다.

『사마의(司馬懿)가 공손연을 토벌한 틈을 타서, 왕이 장수를 보내 서안평을 습격하자,

관구검이 내침하였다.』

 

통감(通鑑)에는 득래가 왕에게 간한 것을 왕 위궁(位宮)[산상왕] 때의 일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잘못이다.>

 

위 기록에 관하여

 

1) 자치통감

2) 삼국지

 

 

1) 자치통감(위기7 소릉여공 정시7년, 246년-월일은 없음)

 

유주자사 관구검은 고구려왕 고위궁(高位宮)이 자주 침략하고 배반하였으므로 제군을 독려하여 토벌하였다. 고위궁은 패하여 달아났고, 관구검이 드디어 환도를 도륙하고 머리를 베고 포로로 잡아온 수가 천 명을 헤아렸다. 구려의 신하 득래가 자주 고위궁에게 간언하였으나 고위궁이 좆지 아니하였다. 득래가 한탄하며 말하였다.

“일어나서 이땅을 보니 장차 잡풀만 무성하겠구나!”

마침내 먹지않다가 죽었다. 관구검은 제군(諸軍)에게 그의 무덤을 파헤치지 말라고 하였고 무덤가에 있는 나무도 베지 않게 하였으며 그의 처자를 잡았으나 모두 놓아 보내주었다. 고위궁이 단신으로 처자를 거느리고 도망하여 숨어버리자 관구검은 군사를 이끌고 돌아왔다. 얼마있지않아 다시 그를 공격하니 고위궁이 드디어 매구로 달아났다.

관구검은 현도태수 왕기를 파견하여 그를 추격하게 하였는데 옥조를 지나 천여리를 가서 숙신씨의 남쪽경계 지역까지 갔다가 돌에 공적을 새기고 돌아왔다. 이때 죽이거나 잡아온 사람이 8천여 명이었다. 공로를 평가하여 상을 받으니 후작을 받은 사람이 100여명 이었다.

 

2) 삼국지

 

<삼국지 위서 선비오환동이전 고구려전>

 

정시3년(242년)에 (고구려의) 궁(宮:동천왕)이 서안평을 침범하였고 정시5년(244년)에 유주자사 관구검에 의해 격파되었다. 이 말은(이와 관련된 얘기는) 관구검전에 있다.

 

< 삼국지 위서 관구검전(‘史랑방’의 글을 복사해 온 것임)>

 

정시 중(正始中: 240-248) 관구검은 고구려(高句驪)가 수차례 침반(侵叛,침범하고 반란을 일으킴)하였으므로 제군(諸軍)의 보기(步騎,보병과 기병) 1만 명을 지휘해 현도(玄菟)를 나가 여러 길로 고구려를 쳤다. 구려왕(句驪王) 궁(宮)(※)이 보기(步騎) 2만 명을 거느리고 비류수(沸流水) 가로 진군하여 양구(梁口)에서 크게 싸웠다. (梁의 음은 渴) 궁(宮)이 연달아 격파되어 패주했다. 그리하여 관구검이 속마현거(束馬縣車,말발굽을 싸매 미끄러지지않게 하고 수레를 서로 매달아 뒤떨어지지 않게 함. 위험을 무릅쓰고 험한 산길을 행군하는 것을 묘사)하여 환도(丸都)(산)에 올라 구려(句驪)의 도읍을 도륙하고 수천명을 참획했다.

구려(句驪)의 패자(沛者)로 그 이름이 득래(得來)인 자가 있어 수차례 궁(宮)에게 간언했으나 [1] 궁(宮)이 그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득래가 탄식하며 말했다, “이 땅이 (폐허가 되어) 장차 봉호(蓬蒿,쑥)가 자라나는 꼴을 곧 보겠구나.” 그리고는 음식을 먹지 않고 죽으니 온 나라에서 그를 현명하게 여겼다. 관구검이 제군(諸軍)에 명해 그의 묘(墓)를 허물지 않고 그곳의 나무를 베지 못하게 하였고 그의 처자들을 모두 풀어서 보내주었다.

궁(宮)은 홀로 처자를 거느리고 달아나 숨었다. 관구검이 군을 이끌고 돌아왔다.

 

(정시正始) 6년(245년), 다시 고구려를 치자 궁(宮)이 매구(買溝)로 달아났다. 관구검이 현도태수(玄菟太守) 왕기(王頎)를 보내 추격하게 하니 (왕기가) 옥저(沃沮)를 지나 천여 리를 가서 숙신씨(肅愼氏)의 남쪽 경계에까지 이르러 각석기공(刻石紀功,돌을 새겨 공적을 기록함)하고 환도(丸都)의 산(山)과 불내(不耐)의 성(城)에 글자를 새겼다. 주륙하거나 받아들인 이가 모두 8천여 구(口)에 이르렀고, 공을 논해 상을 주어 후(侯)로 봉해진 자가 백여 명에 달했다. 산을 뚫고 물을 대니 이로써 백성들이 이로움을 얻었다.

 

正始中,儉以高句驪數侵叛,督諸軍步騎萬人出玄菟,從諸道討之.句驪王宮將步騎二萬人,進軍沸流水上,大戰梁口,梁音渴.宮連破走.儉遂束馬縣車,以登丸都,屠句驪所都,斬獲首虜以千數.句驪沛者名得來,數諫宮,[一]宮不從其言.得來歎曰:「立見此地將生蓬蒿.」遂不食而死,擧國賢之.儉令諸軍不壞其墓,不伐其樹,得其妻子,皆放遣之.宮單將妻子逃竄.儉引軍還.六年,復征之,宮遂奔買溝.儉遣玄菟太守王頎追之,[二]過沃沮千有餘里,至肅愼氏南界,刻石紀功,刊丸都之山,銘不耐之城.諸所誅納八千餘口,論功受賞,侯者百餘人.穿山溉灌,民賴其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