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치통감 송기 권123 문제 원가 13년(436년) 4월 기사를 보면(날짜는 없음) 다음과 같다.
그러니까 고구려는 화룡(북연의 서울)의 동쪽에 주둔하였고, 북위는 서쪽으로부터 왔으니 화룡의 서쪽에 주둔하였다는 말이다.
그 다음이 이상하다. 북연의 권력 핵심자인 상서령 곽생이 성문을 열어서 북위군을 받아들이려 했는데 북위군이 의심이 나서 들어가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곽생이 군대를 챙겨서 (북)연왕을 공격하였으나 (북)연 왕이 고려(고구려)의 군대를 이끌고 동문으로 들어와서 곽생과 궁궐 아래에서 싸웠는데 곽생이 떠도는 화살에 맞아서 죽었다고 한다.
여기서 곽생이 어떤 군대를 챙겨 북연왕을 공격한 것일까? 북연의 군대 대부분은 북연 최후의 보루, 백랑성 전투에 투입되었을 것이고, 북연의 서울인 화룡에 남은 군대란 북연왕의 친위군 밖에 없었을 것이다.
지금 북연의 서울인 화룡의 동쪽에는 고구려군이 있고, 서쪽에는 북위군이 있다. 그리고 그 화룡에 북연왕과 북연왕의 친위군이 있다. 그런 상황에서 상서령 곽생이 동원할 수 있는 군대란 어떤 군대일까?
북연왕이 있는 상황에서 북연왕의 신하가 북연왕의 친위대 나아가서 북연왕의 군대를 동원할 수 있을까?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북연왕의 친위대가 북연왕의 신하인 곽생의 말을 따를수 있을까?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면 곽생이 동원한 군대란 바로 어떤 군대일까? 그것은 북위의 군대일 것이다. 곽생이 성문을 열어서 서쪽에 있는 북위 군대가 성안으로 들어왔고, 곽생이 북위 군대를 이끌고 북연왕을 공격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래서 동쪽에 있는 고구려 군대를 이끌고 동문으로 들어와서 곽생의 군대와 궁궐에서 싸운 것으로 보여진다. 그리고 「곽생이 떠도는 화살에 맞아서 죽었다」는 것은 곽생의 군대가 패했음을 말한다. 다시말해서 북연왕이 인도한 고구려 군대와 곽생이 인도한 북위 군대가 서로 북연 성 안으로 들어와 북연 궁궐에서 싸운 결과 북연왕이 인도한 고구려 군대가 이겼다는 말이다. 그리고 갈로 맹광이 성에 들어왔다는 말은 곧이어 고구려군의 본대(本隊)가 들어왔다는 말이다.
그다음에 이어지는 기사는 5월 을묘일(5일) 기사이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 위서, 고필(高弼)전을 보면 대노(大怒)라고 기록되어 있다.
(북)연왕과 곽생의 전투가 4월 어느날(날짜는 없음)에 벌어졌는데 북연왕이 용성을 떠난 때가 5월 5일이다. 그리고 여기를 보면 「정예의 병사들을 거느리고」라는 표현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북연왕의 친위대이고 따라서 곽생이 동원한 군대가 북연왕의 군대가 아님을 알수 있다. 즉, 곽생이 동원한 군대는 바로 곽생이 성문을 열어서 들어온 북위의 군대임을 또한번 확인 할수 있다.
결국 고구려 군대가 북위의 군대를 꺾었기 때문에 북연왕이 「백성들을 거느리고 동쪽으로 옮기면서 궁전을 불태울 수」있는 여유가 있었던 것이며, 80리나 되는 기나긴 피난 행렬도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이고, 고구려 군대를 뒤쪽에 배치하였던 것이다.
또한 북위의 군대가 패했기 때문에 고필의 부하장수인 고구자가 기병을 거느리고 그들을 추격하려고 하였지만, 고필이 그를 제지한 것이고,
북위의 군사가 패했기 때문에 위의 주군인 태무제(3대 세조)가 소식을 듣고 대노(大怒)하여 함거로 고필(高弼)과 아청을 불러들였고, 평성에 도착하자 모두 내쳐져서 문졸(門卒)로 삼은 것이다.
요약해서 말하면 북연이 망할 때 고구려와 북위가 군사적 충돌이 있었고 그 결과 고구려 군대가 승리하였다는 말이다. 그래서 위와 같은 기사들이 나왔다는 말이다.
그러면 왜 직접적으로 고구려 군사가 승리한 기록이 없을까? 그것은 춘추사관의 전형적인 필법으로 자기들이 패한 것을 감춘 것, 즉 빼버린 것이다. 핵심적인 말을 빼버리고 에둘러 표현했다는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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