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문소황태후 둘째오빠 고언(高偃)의 아들, 고정(高貞) 비문(碑文)

상 상 2012. 5. 11. 18:53

 

북위 고정의 비(문)

출처: http://cafe.daum.net/hakunjai 에서/서예/번역/2번/고정비 1,2,3,4,5

 

北魏高貞碑

魏故䮾驤將軍․營州刺史․高使君․懿侯碑銘.

위(魏)의 고 봉양장군 ․ 영주자사 ․ 고사군 ․ 의후(故 䮾驤將軍 ․ 營州刺史 ․ 高使君 ․ 懿侯)의 비명(碑銘).

 

1. 君諱貞字羽眞.㪍海脩人也.其先蓋帝炎氏苗裔.昔在黃唐.是爲四嶽.爰逮伯夷.受命于禹舜.曰典朕□.□□□□.□曁呂尙佐克殷.

有大功於天下.位爲太師.俾侯齊國.世世勿絶.表乎東海.其公族有高子者.卽其氏焉.自玆已降.冠冕繼及.世濟其德.不霣其名.祖․左光祿大夫․

勃海敬公.純嘏所鍾.式誕文昭皇太后.是爲世宗武皇帝之外祖.考․安東將軍․靑州刺史․莊公.有行有禮.克荷克構卽文昭皇太后之第二兄也.

 

군(君)의 휘(諱)는 정(貞)이요, 자(字)는 우진(羽眞)이니 발해(㪍海)의 수인(脩人)이다. 그의 선조(先祖)는 염제(炎帝)씨의 후예니 옛날 황당(黃唐)에 있어 사악(四嶽)이 되었고 백이(白夷)에 미쳐 우 ․ 순(虞 ․ 舜)에게서 명을 받으니 말하기를, “짐(朕)의 □□을 맡아서 □□□□하라”라고 하였다. 여상(呂尙)에 이르러 주(周)나라를 도와 은(殷)나라를 토벌하니 천하(天下)에 큰 공이 있어서

지위(地位)는 태사(太師)에 오르고 제(齊)나라 제후(諸侯)가 되게 하니 세세(世世)로 끊이지 않아 동해(東海)에 뛰어나니 그의 공족(公族)에 고자(高子)라는 사람이 있어서 그 성씨(姓氏)를 고(高)라 하였다. 이로부터 이후에 벼슬이 계속하여 이어져서 세세(世世)로 그 덕(德)을 이루니 그 명성(名聲)을 떨어트리지 않았다.

조부(祖父)인 좌광록대부 ․ 발해경공(左光祿大夫 ․ 勃海敬公)은 대복(大福)이 모인 바가 되어 문소황태후(文昭皇太后)를 탄생하니

세종무황제(世宗武皇帝)의 외조부(外祖父)가 되었다.

그의 부친(父親)인 안동장군 ․ 청주자사 ․ 장공(安東將軍 ․ 靑州刺史 ․ 莊公)은 덕행(德行)과 예의(禮儀)가 있으며 책임(責任)을

완수하고 사업(事業)을 성취하니 문소황태후(文昭皇太后)의 제 이의 형(兄)이 된다.(둘째 오빠)

 

2. 君稟岐㠜之姿.挺珪璋之質.淸暉發於載弄.秀悟表乎齠齒.黃中通理之名.卓爾不群之目.固已殊異公族.見稱於匠者.至於孝以事親.

則白華不能比其潔.友于兄弟.則常棣無以方其盛.敬讓著自閭閻.信義行於邦黨.若夫秉心塞淵.砥礪名敎.伏膺文武.不肅而成.則綴軌於前脩.

同規於先達者矣.雖綺襦紈袴.英華於王․許.龍馬流車.陸離於陰․鄧.而不以富貴驕人.必以謙虛業己.是故夷門識慕.蹇步知歸.我德如風.

物應如響.

 

군(君)의 천품(天稟)이 기의(岐嶷: 재질이 남달리 뛰어남)한 바탕으로 태어나 규장(珪璋: 훌륭한 인품)한 재질(才質)이 뛰어났으니 그 청휘(淸暉: 맑은 빛. 총기)가 어려서 재롱을 부릴 때부터 나타났고, 뛰어난 깨달음이 7, 8세 때에 나타났으니 마음속에 덕(德)이 있고 사물의 이치에 통달(通達)함이 무리에서 뛰어나, 본래부터 다른 공족(公族)들과 특히 달라서 스승으로부터 칭찬을 받았었다.

효도에 있어서 부모를 섬김이 흰 꽃이 그의 청결함에 견주지 못하고, 형제간에 우애에 있어서 아가위나무도 그 무성함을 견주지 못했으며, 공경(恭敬)과 겸양(謙讓)이 마을에서 현저(顯著)하였고 신의(信義)를 나라와 붕당(朋黨)에서 행하였다. 무릇 그의 성심(誠心)을 지키며 사려(思慮)가 깊고 착실함과 도덕(道德)의 가르침에 힘쓰고, 문무(文武)를 마음에 새겨 잊지 않고 삼가 하지 않고서 이루는 것은 선현(先賢)들의 법도(法道)를 따른 것이며, 선진(先進)들과 함께 모범을 이뤘다. 비록 아름다운 의상(衣裳)을 입고 왕의

허락 하에 영화를 누렸고 용마(龍馬)와 빠른 수레를 타고 음 ․ 등(陰 ․ 鄧)에 눈부시게 아름다웠으나 부귀(富貴)로써 사람들에게

교만(驕慢)하지 않았고 반드시 겸허할 따름이었다. 이리하여 이문(夷門: 同輩)들이 사모할 줄 알고 절뚝발이 걸음으로 귀의(歸依)할 줄 알았으니 내 덕이 바람과 같이 행해져서 다른 사람들이 응함이 소리의 반향(反響)과 같았었다.

 

3. 弱冠以外戚令望.除秘書郞.傃驎閣而來儀.瞻石渠而式踐.於是縱容校文之職.飜飛鵷鷺之間.容止此而可觀.淸風玆焉已穆.旣而重離載朗.

東朝始建.杞梓備陳.瑤金必剖.僉求其可.帝曰.爾諧.遷太子洗馬.夙夜惟夤.媚玆儲后.仰敷四德之美.式揚三善之功.同禁聯坊.亡有出其右也.于時六宮□□.百姓未繁.周爰大邦.罔踰莘似.以君姉有神表淑問.拜爲皇后.君戚愈重.□□沖.寵日益.權日損.由是有少君退讓之風.無□淵嬌奢之患.故赫赫之望.具瞻允集.楨幹之期.匪朝伊暮.而不幸短命.

 

약관(弱冠: 20세 전후의 나이)에 외척(外戚: 문소황태후(文昭皇太后)의 親戚)의 좋은 평판(評判)으로 비서랑(秘書郞)에 임명되어

기린각(麒麟閣: 漢時功臣閣)에 나오고 석거각(石渠閣: 漢時藏書閣)에서 실천하니, 이에 교서(校書)의 직책에

종용(縱容: 從容. 자연스럽고 태연함)히 근무하여 조정의 원앙(鵷鷺: 백관)의 사이에서 명성을 떨치게 되어 그의 진퇴와 거동이 볼만 하였고, 조촐한 풍격(風格)이 훌륭하여 이미 중후하고 아름다우며 명랑 하였다. 동조(同朝: 東宮.太子)를 세우매

기재(杞梓: 유능한 인재)를 등용하여 그 일을 정하게 되니 모두 그가 합당함을 요구하게 되었다. 황제(皇帝)가 말하기를,

“네가 합당하다.”라 하시고 태자세마(太子洗馬)로 전직케 하니 밤낮으로 조심하고 공손하게 태자를 모시고

사덕(四德: 元 ․ 亨 ․ 利 ․ 貞)의 미를 우러러 베풀고 삼선(三善: 신하(臣下) ․ 자식(子息) ․ 유자(幼子)의 德目)의 공을

앙양(仰揚)하니 같이 태자를 모시는 사람들 중에서 가장 뛰어났다. 그 당시에 육궁(六宮)이 □□하고 백성이 번창(繁昌)하지 못하였다. 주(周)는 대국이었으나 신(莘)나라의 출생으로 무왕의 모친인 태사(太姒)와 같은 숙녀(淑女)를 넘어서지 못하였으니 고정(高貞)의 매(妹)가 덕이 지극히 높아 출중하다는 좋은 평판(評判)이 이를 황후(皇后)로 맞이하였다. 이로서 군(君)의 황실(皇室)과

척분(戚分)이 더욱 무거워지고 □□충(沖)하여 황제의 총애(寵愛)는 날로 더하여 갔으나 권세(權勢)를 날로 삼갔다. 이로 말미암아 젊은 그에게 퇴양(退讓)의 풍격이 있고 □연(淵)과 교사(嬌奢)의 잘못이 없었기 때문에 빛나는 덕망(德望)을 모두가 보고 이에

모이게 되어 국가의 기둥이 될 때가 시간문제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단명(短命)하셨다.

 

4. 春秋卄有六.以延昌三年.歲次甲午.四月己卯朔.卄六日乙巳.遘疾卒於京師.二宮悲慟.九族悼傷.同位駿奔.遐邇必至.天子迺詔有司曰.

故太子洗馬․高貞.器業始茂.方加榮級.而秀穎未實.奄彫夏彩.今宅兆有期.宜蒙追陟.可特贈䮾驤將軍․營州刺史.以旌戚.其墓□所須.

悉仰本州營辨.臨葬又特給東園龍轜.加諡曰懿.

 

나이 26세인 연창(延昌) 3년 갑오(甲午)년 4월 기묘삭(己卯朔) 26일 을사(乙巳)에 병을 얻어 서울에서 세상을 떠나시니

이궁(二宮: 皇帝 ․ 皇后)이 매우 애통하고 구족(九族)이 슬퍼 상심하였으며 같은 지위에 있던 자들이 분주(奔走)하게 다니며

원근(遠近)에서 모두 참석하였다. 천자(天子)는 이에 유사에게 조서(詔書)를 내려 말하기를, “고태자세마 ․ 고정(故太子洗馬 ․ 高貞)은 기량과 업적이 비로소 출중하여 장차 영예(榮譽)와 직급(職級)을 내리고자 하였으나, 훌륭한 인재가 무너져 결실을 맺지 못하였다. 이제 택조(宅兆: 墓域)에 때가 있으니 마땅히 추증(追贈)을 입음이 마땅한지라, 특별히 농양장군 ․ 영주자사(䮾驤將軍 ․ 營州刺史)를 추증(追贈)하고 훌륭한 외척(外戚)으로 그의 묘를 잘 다스릴 것이니 소용되는 비용(費用)은 모두 본주(本州)즉 영주(營州)에서 담당하여 장례에 임할 것이며 특별히 동원(東園)에 있는 황실의 상여거(喪轝車)를 내주고 시호(諡號)는 ‘의(懿)’라고 하셨다.”

 

5. 凡我僚舊.爰及邦人.咸以君生而玉質.至美也.幼若老成.至慧也.孝友因心.至行也.富貴不驕.至謙也.君以此終.亦以此始.烏可廢而不錄.

使來者無聞焉.迺相與採石名山.樹碑墓道.

 

우리들 모두 동료들과 친구들이며 또 나라 사람들이 모두 생각하기를, 군(君)은 나면서 옥(玉)과 같은 기질이 지극히 아름답고

어려서부터 노숙(老熟)하게 이른 지혜(智慧)로 왔으며 효도와 우애를 진심으로 지극한 선행이었고 부귀(富貴)하나 교만(驕慢)하지

않고 지극히 겸손(謙遜)하였다. 군(君)이 이제 사망하였으나 이는 또한 시작(始作)이라 하겠으니 어찌 버려두고 기록하지 않아서

후세 사람으로 하여금 전해들을 수 없게 하겠는가? 이에 서로 힘을 모아 명산(名山)에서 돌을 구해 묘도(墓道)에 비석(碑石)을 세웠다.

 

6. 其詞曰.厥緖皇□.□□□□.堯咨四嶽.周命呂望.惟高惟國.世有龍光.自玆作氏.不霣其芳.於鑠光祿.饗玆戩穀.赫矣安東.純瑕斯屬.

或女或妹.匪娀伊僕.陟彼昭陽.光我邦族.山川降祉.餘慶不已.敬公之孫.莊公之子.如琇如瑩.爲山伊始.人知其進.莫見其止.古人有言.

膏粱難正.於乎我君.終和且令.牧已謙謙.與物無競.孝友因心.能久能敬.爰始來儀.濯纓鱗沼.翽羽儲扃.其容皎皎.方摶九霄.載飛載矯.

天道如何.是乂是夭.生榮死哀.禮有加數.曷用寵終.英英旂輅.其人雖往.其風可慕.玄石一刊.淸徽永鑄.

 

그 사(詞)에 말하기를, “그 조상은 황족(皇族)이니 □□□□하여 요(堯)임금은 사악(四嶽)에 자문(諮問) 하였고, 주(周)나라에서는 여망(呂望)에게 명하여 고매(高邁)하게 나라를 경영(經營)하였고, 세세(世世)로 임금의 은총이 있어 이로부터 성씨(姓氏)를 정한

후에도 그 방명(芳名)을 떨어뜨리지 않았다. 아름답게도 광록대부(光祿大夫)인 경공(敬公)은 복록(福祿)을 흠향하였고 빛나는

안동장군(安東將軍)인 장공(莊公)은 대복이 있어서 혹은 딸이 혹은 누이동생이 저 제곡(帝嚳)의 비인 융(娀)이 임금을 섬기듯이

황후(皇后)의 자리에 올라 우리나라 와 문족(門族)을 빛 내였으니, 산천(山川)이 복을 내려 여경(餘慶)이 그치지 않았다.

경공(敬公)의 손자며 장공(莊公)의 아들인 고정(高貞)은 아름다운 보석과 같이 높이 되기로부터 시작하였으니 사람들이 그 나감을

알되 정지함을 보지 못했다. 옛 사람의 말에 부귀한 가문은 바르기가 어렵다고 말하였으나 고정(高貞)은 끝내 온화하고 영리하여

자기를 수양(修養)함에 겸허하여서 타인들과 다툼이 없고 효도(孝道)와 우애(友愛)가 진심으로 기인하여 능히 오래도록

공경(恭敬)하였다. 이에 비로소 기린각(麒麟閣: 漢時功臣閣)과 석거각(石渠閣: 漢時藏書閣)에 진출하고 동궁(東宮)에서 태자세마(太子洗馬)가 되니 그의 용모가 빛나고 밝아서 구천(九天)을 후려칠 듯 날아다녔다. 천도(天道: 하늘)는 어찌하여 이 같은 어진 사람을 이 같이 요절(夭折)하게 했는가? 살아서 영화(榮華)를 누리고 죽어서 애통(哀痛)함에 예법에 약간의 관작(官爵)을 더하는 법이

있거늘 어찌 은총(恩寵)으로 끝마치지 않는가? 아름다운 깃발과 큰 수레로 장사를 지내니 그 사람은 비록 갔을지라도 긔의

풍모(風貌)는 가히 사모(思慕)할만 하였다. 현석(玄石)에 새겨 그의 조촐한 기품을 영원히 남기는 바이다.

 

大代正光四年.歲次癸卯.月管黃鐘.六月丙□朔.□□□□.

대대(大代: 後魏) 정광(正光) 4년 계묘(癸卯) 월관(月管)은 황종(黃鐘)이니 6월 병□삭(丙□朔)에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