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신라와 당의 관계-363,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208, 8. 황소의 난-34)
차례
가. 관련 사료
1. 구당서 토번전(상)
2. 구당서 토번전(하)
3. 신당서 토번전
4. 구당서 돌궐전
5. 신당서 돌궐전
6. 구당서 측천본기
7. 신당서 측천본기
8. 구당서 거란전
9. 신당서 거란전
10. 구당서 발해전
11. 신당서 발해전
12. 구당서 숙종본기
13. 구당서 회홀전
14. 신당서 회골전
15. 구당서 남조전
16. 신당서 남조전
17. 구당서 신라전
18. 신당서 신라전
19. 삼국사기 신라본기
나.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
1. 이진충의 난 이전
2. 이진충의 난
3. 돌궐족 묵철의 침공
4. 안사의 난
5. 토번의 침공
6. 토번의 침공 이후
7. 민란의 발생과 남조의 침공
8. 황소의 난
9. 절도사의 시대
10. 당의 멸망
다. 통일신라와 당
1. 통일신라 이후의 당나라 약사
2. 신구당서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3.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4. 사료를 통합해서 본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
나.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
8. 황소의 난
1) 연표(자치통감 요약을 기초로 작성)
2) 해설
2) 해설 – 14
한편,
회남절도사 고병은 진해(절서)절도사 주보와 대립하였다(9월6일)
다시 황소쪽에서는.......
.
봉상절도사 정전은 행군사마 이창언이 반란하자 전권을 넘겨주었다.(10월)
황소군의 맹해와 주온(주전충)이 부평에서 하수절도사 탁발사공과 부연절도사 이효창을 격파하였다.(11월1일)
봉상절도사 정전이 봉주에 이르러 누차 자리를 사양하자 이창언을 봉상절도사로 삼았다.
< 882년 >
당은 고병을 도통(군 사령관)과 관직에서 파직하였다.(1월8일)
황소쪽에서는..................
황소는 주온(주전충)을 동주자사로 삼아 동주를 빼앗도록 하였다(1월)
동주자사 미성이 하중으로 달아나고 주온(주전충)이 그곳을 점거하였다(2월)
주온(주전충)이 하중을 노략질 하니 하중절도사 왕중영이 그를 쳐서 패배시켰다.(2월)
다시 이극용쪽에서는.......
사타족 이극용이 울주를 약탈하였다(2월)
그리고 대동방어사 혁련탁과 노룡절도사 이가거가 이극용에게 패하였다.(4월)
⇒ 이극용 부자는 원래 노룡절도사 이가거에게 패하여 달단으로 도주한 일이 있었는데
이로써 이극용이 완전히 살아난 것이다.
고병쪽에서는 ........
회남절도의 요망한 방사 여용지. 절도사 고병 속여 전횡을 일삼아 '좌우막야' 2만군(軍)을 만들어 농단하였다.
황소쪽에서는..........
제도행영도통 왕탁이 서천과 동천, 흥원의 군사들을 거느리고 영감사에 주둔하고,
경원군(軍)은 장안 서쪽에, 의무군과 하중군(軍)은 위수 북쪽에, 빈녕과 봉상군(軍)은 흥평에,
보대와 정난군(軍)은 위교에, 충무군(軍)은 무공에 주둔하여, 당군이 사방에서 모였다.
이에 황소의 세력은 동주와 화주를 벗어나지 못했다. 이리하여 장안성 안에서 쌀 1말 값이 30민이었다.
황소군은 사람을 관군(당군)에게 팔아서 양식으로 삼게 하였는데 관군(당나라군)은 백성을 붙잡게 되면 그것을 죽 끓여 먹으니
사람의 값은 수백 민이었고 살찐지 마른지로 값을 매겼다.(4월)
다시 고병쪽에서는....
회남절도사 고병은 당의 병권과 이권에서 해직되자 소매를 떨치고 크게 욕을 하고서
그의 막료인 고운을 파견하여 표문의 초안을 잡아서 스스로의 입장을 호소하게 하였는데 그 말씨가 겸손하지 아니하였다
⇒ 여기에 고운(顧雲)이 나옵니다. 그런데 최치원의 자는 고운(孤雲)으로 ‘고’자가 다르나
최치원이 신라로 와서 顧(고)를 孤(고)로 고쳤을 가능성도 있고
자치통감이 孤(고)를 잘못알고 顧(고)로 썼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최치원이 885년에 신라로 돌아왔는데
이 당시인 882년 4월에는 최치원(고운)이 고병의 휘하에 있었으므로
여기에 나오는 고운(顧雲)이 최치원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고병은 이로부터 당 조정에 공부(貢賦.조세)를 바치는 것을 끊어버렸다.
다시 황소쪽에서는........
황소가 흥평을 공격하니, 빈녕과 봉상군(軍)이 봉천으로 후퇴하였다.(5월)
고병쪽에서........
종전을 강서관찰사로 삼았는데 이는 고병의 요구였다.(7월29일)
종전은 무주를 떠났는데 남성사람 위전풍이 다시 무주 점거하고, 또 동생 위자창 보내 신주를 점거하였다.(7월29일)
다시 황소쪽에서는..........
상양이 의군채를 공격하였는데, 폭설로 황소군의 동사자가 2~3할이었다.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365,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210, 8. 황소의 난-36) (0) | 2017.11.10 |
---|---|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364,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209, 8. 황소의 난-35) (0) | 2017.11.06 |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362,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207, 8. 황소의 난-33) (0) | 2017.11.01 |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361,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206, 8. 황소의 난-32) (0) | 2017.10.30 |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360,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205, 8. 황소의 난-31) (0) | 2017.10.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