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279,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124, 6. 토번의 침공 이후-24)

상 상 2016. 9. 26. 21:45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279,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124, 6. 토번의 침공 이후-24)

 

차례

 

. 관련 사료

1. 구당서 토번전()

2. 구당서 토번전()

3. 신당서 토번전

4. 구당서 돌궐전

5. 신당서 돌궐전

6. 구당서 측천본기

7. 신당서 측천본기

8. 구당서 거란전

9. 신당서 거란전

10. 구당서 발해전

11. 신당서 발해전

12. 구당서 숙종본기

13. 구당서 회홀전

14. 신당서 회골전

15. 구당서 남조전

16. 신당서 남조전

17. 구당서 신라전

18. 신당서 신라전

19. 삼국사기 신라본기

 

.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

1. 이진충의 난 이전

2. 이진충의 난

3. 돌궐족 묵철의 침공

4. 안사의 난

5. 토번의 침공

6. 토번의 침공 이후

7. 민란의 발생과 남조의 침공

8. 황소의 난

9. 절도사의 시대

10. 당의 멸망

 

. 통일신라와 당

1. 통일신라 이후의 당나라 약사

2. 신구당서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3.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4. 사료를 통합해서 본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

 

 

.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

6. 토번의 침공 이후

1) 연표

2) 해설

3) 간추린 해설

4) 요약

 

 

2) 해설(토번의 침입 이후) - (9)

다시 소의절도에서는

기병 5백과 보병 15백을 진무절도로 옮기게 하자 반란을 일으켜,

소의절도사 노균은 노성으로 달아났다(7)

이에 소의 반란군이 이문구를 우두머리를 내세우자 이문구가 노성에 있는 노균에게 사과하니.

소의절도사 노균이 상당(산서성 장치시)에 들어가 그들을 다시 진무에 파견하며 뒤쫓아가

태평역(太平驛)에서 다 죽였다(8)

 

이렇게 하여 소의절도의 반란을 진압하였다.

한편,

당 무종은 방사가 만든 금단(金丹)을 복용하여, 성격이 조급해지고 화를 내고 기뻐하는 것이 일정하지 않았다(9)

 

다시 붕당정치가 계속되니,

이덕유가 권력을 잡은지 오래되어 모함하는 사람이 나타나고 이덕유가 이를 지적하여 그들의 관직이 깎이니(10) 그 무리들의 분노는 더욱 심해졌다.(12)

 

또한

당 무종 마침내 병을 얻었다(12)

 

다시 토번에서는...

토번의 논공열이 다시 여러부족을 규합하여 상비비를 쳤으나 대패하여 달아났다.

상비비가 격문을보내 논공열의 죄를 말하니 여러부족들은 논공열로부터 조금씩 떠났다.(자치통감)

 

845년 찬보 즉위 후 3년 만에 토번 사람들이 찬보의 계위가 옳지 못하다고 하여 모두 반발하자,

상공열은 병사 20만으로 상비비를 공격하고, 상비비가 화의를 청니, 상공열(논공열)이 이를 받아들여 대하천(大夏川)으로 퇴각하여 주둔하였는데 상비비가 상공열(논공열)을 하주(河州)의 남쪽에서 공격하게 하면서, 상공열을 분노케 하니, 상공열(논공열)이 매우 노해, 대병을 이끌고 출전하였지만 매복한 병사에 걸려 공격을 당하였는데다가, 큰 비바람으로 강물에 익사한 자가 매우 많게 되자, 상공열(논공열)은 단기(單騎)로 도주하였다.

(신구당서 토번전)

또한,

당항이 침입하여 도둑질을 그치지 않고 빈주(), ·영주(), 염주(鹽州) 경계에 있는 성과 보루를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비리채(叱利寨)에 주둔하니 당무종은 그들을 토벌하기로 결정하였다.

 

846

당 무종 사망, 당 선종 즉위

당 무종은 병이 낫지 않자 이름을 '이염'으로 고쳤다(3).

(여기서 당 무종이 결국 죽게 되어 황제가 바뀌는데 여기서 당황실의 세계-계통을 잠깐 알아야 한다.)

 

애초에 당 헌종은 이기의 첩 정씨를 받아들여 광왕 이이를 낳았는데 슬기롭지 못하며 말을 꺼내지 않았다. 당 문종은 이이가 말을 하도록 유도하는 것을 좋아하며 장난하고 웃음거리로 삼았다.

 

당 무종이 위독해져 10일간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러자 환관들이 조서를 만들어 무종의 숙부 광왕 이이를 황태숙으로 삼고

이름을 '이침'으로 바꾸게 하였다.(320)

환관들이 만만한 바보를 황제로 만들려고 한 것이다.

그리고 33세 당 무종이 사망하고(323) 이덕유를 섭총재로 삼으며 37세 선종(이침)이 즉위한다.(326)

 

그런데 당 선종은 평소 이덕유가 전횡하는 것을 미워하였다.

그래서 당 선종은 이덕유를 형남절도사로 좌천시키고 그의 패거리 역시 지방으로 좌천시켜 버렸다(42)

이래서 이덕유의 붕당은 붕괴하고 만다.

 

한편 멸불(滅佛) 사업은 후퇴하여

장안과 낙양에 각기 8개 사찰 늘려 설치한다(55)

 

73일에는 회남절도사 이신이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