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토번의 내란 한편 이때 토번의 내란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842년 12월) 달마 찬보가 죽었는데 아들이 없자 달마찬보 비(妃)인 침씨의 오라비 상연력의 아들인 걸리호를 찬보로 삼았는데 겨우 3살이어서 아첨하는 재상과 비(妃)가 함께 나라를 다스렸다. 재상의 우두머리 결도나가 그 부당함을 말하고 칼을 뽑아 얼굴을 긁고 통곡하며 나오자 아첨하는 재상이 그와 그 가족을 죽이니 나라 사람들이 화를 냈다. 이에 낙천문 토격사 논공열이 세 부락에게 유세하여 1만 기병을 얻어 청해절도사와 동맹하여 군사를 일으키고 스스로 국상이라고 칭하였다. 위주에 도착하여 국상 상사라와 만나 박한산에 주둔하였으나 논공열이 상사라를 공격하자 상사라는 서쪽 송주로 달아나서 소비, 토욕혼, 양동 등의 병사 8만을 징발하여 도수를 사이에 두고 논공열과 말을 하는 것을 본 소비 등이 의심하고 싸우지 않자 논공열이 공격하니 소비 등이 다 항복하고 상사라가 서쪽으로 달아났지만 쫓아가 잡아 죽였다. 논공열의 무리가 10여만이 되었다. 위주로부터 송주에 이르기까지 잔인하게 죽이니 시체가 넘쳤다.(12월: 자치통감) 842년 찬보가 또 죽었는데 이때 토번에서 3살 되는 어린 아이가 찬보가 되자 마침내 토번에서는 내분에 휩싸이게 된다. 그해(842년) 별장 상공열이 선주절도사 상비비(尙婢婢)를 치고, 상여사라를 쳐서 조하(洮河)를 건너니, 이에 여러 부가 먼저 항복하였고, 그 무리를 아울러 십여 만에 이르렀다. (신구당서 토번전) 당나라로서는 회골의 내분과 토번의 내분이라는 행운이 2개나 겹친 것이었다. 843년 ◎ 주야적심의 등장 다시 회골쪽에서는 오개가한이 진무절도에 침입하자 하동절도사 유면이 인주자사 석웅과 도지병마사 왕봉을 파견하여 사타의 주야적심, 글필, 탁발의 3천 기병을 인솔하고 오개가한의 아장을 기습토록하며 유면은 대군을 가지고 그 뒤를 이었다. 석웅이 오개가한의 아장을 공격하니 오개가한이 달아나 석웅이 뒤를 쫓았다.(1월) ☆ 여기에 나오는 사타의 주야적심은 뒤에 방훈의 난을 진압하여 당 의종으로부터 '이국창' 이라는 이름을 얻는다. 이국창의 아들이 이극용인데 이 사람은 황소의 난을 최종적으로 진압하였으며 이후 주전충의 후량과 싸우다가 죽고 그의 아들 이존욱이 후량을 무너뜨리고 후당을 세운다. 석웅이 회골을 살호산에서 대파하여 가한은 상처를 입고 달아나니 석웅은 태화공주를 영접하여 돌아왔다 머리를 벤 것이 1만여급이고 2만여명을 항복시켰다.(1월11일) 오개가한이 달아나 흑차자족(黑車子族)을 지켰는데 그들의 무너졌던 병사들은 대부분 유주에 가서 항복 하였다.(1월21일) 마침내 회골을 완전히 깬 것이다. 이렇게 되자 이사충(올몰사)의 귀의군(歸義軍) 철폐하고, 그 병사들을 여러 도(道)의 기병으로 분산시킨다(2월) 당나라가 토사구팽의 전형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때 당 무종이 조번으로 하여금 할힐사로 가서 안서와 북정을 요구하게 하니 이덕유 등이 안서는 장안에서 7천여리, 북정은 5천여리이니 그곳을 얻는다해도 군사와 식량 등으로 경비를 써서 헛된 이름을 바꾸는 것이니 좋은 계책이 아니라고 하자 그만 두었다. 이 말은 당나라가 안서도호부와 북정도호부를 토번에게 잃은 것이 790년인데 그 이후 843년까지 안서와 북정이 당의 영토가 아니었음은 물론 그 이후에도 당의 영토가 아니었음을 말하고 있다. 하동절도사 유면이 “귀의군에 속한 회골 3천여명과 추장 43명을 여러 도에 예속시키자 호타하를 점거하고 명령에 좆지않아 그들을 죽였습니다. 회골사람 가운데 유주에 항복한 사람은 전후로 3만명인데 모두 분산시켜 여러 도에 예속시켰습니다”라고 보고하였다.(3월) 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를 삶아먹는다는 말이 있듯이 회골의 오개가한을 깨자 이사충(올몰사)의 귀의군(歸義軍)에게 해산을 명령하고 그 말을 듣지 않자 죽여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분산시켜버린다. 힘을 못쓰게... 이렇게 외적을 막아내니 또다시 당나라에 내란이 일어난다. 소의절도사 유진의 난이 일어난 것이다.(843年4月~844年8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