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195,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39), 안사의 난-8)

상 상 2016. 2. 19. 18:29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195,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39), 안사의 난-8)

 

차례

 

. 관련 사료

1. 구당서 토번전()

2. 구당서 토번전()

3. 신당서 토번전

4. 구당서 돌궐전

5. 신당서 돌궐전

6. 구당서 측천본기

7. 신당서 측천본기

8. 구당서 거란전

9. 신당서 거란전

10. 구당서 발해전

11. 신당서 발해전

12. 구당서 숙종본기

13. 구당서 회홀전

14. 신당서 회골전

15. 구당서 남조전

16. 신당서 남조전

17. 구당서 신라전

18. 신당서 신라전

19. 삼국사기 신라본기

 

.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

1. 이진충의 난 이전

2. 이진충의 난

3. 돌궐족 묵철의 침공

4. 안사의 난

5. 토번의 침공

6. 토번의 침공 이후

7. 민란의 발생과 남조의 침공

8. 황소의 난

9. 절도사의 시대

10. 당의 멸망

 

. 통일신라와 당

1. 통일신라 이후의 당나라 약사

2. 신구당서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3.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4. 사료를 통합해서 본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

 

 

.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

1. 이진충의 난 이전

2. 이진충의 난

3. 돌궐족 묵철의 침공

4. 안사의 난.

1) 연표

2) 분석 및 해설

3) 요약

 

 

2) 안사의 난, 분석 및 해설 - 2

 

태자라는 자는 도주를 계속하여 75679일 영무(, 영하 회족자치주 은천시 관내 영무시)에 도착한다.

그리고 712, 영무에서 황제에 올랐다. 이 사람이 바로 당 숙종이다.(7대 군주)

또하나의 나라를 세운 것이다. 이는 보통 때 같았으면 명백한 반역이다.

 

이때 당 숙종의 세력을 자치통감에서 보면 문무관원은 30명을 채우지 못하였는데 풀밭을 열어서 조정을 세우고 제도를 처음 만들자

무인들은 교만하였다.고 되어 있다.

 

문무관원이 30명 미만이면 문과 15명 미만, 무관 15명 미만이라는 말인데 그야말로 초라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다.

그리고 그들이 머물 곳도 없어서 풀밭에서 조정을 세웠다니 영무에는 당나라의 관아(官衙) 마저도 없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당 현종은 태자가 황제에 오른 줄도 모르고 715일 태자를 군사 총사령관(천하병마원수)으로 임명한다.

그리고 728일 당 현종은 성도(사천성 성도시)에 도착한다.

당 현종을 쫓아온 사람은 관리와 군대를 전부 합쳐 1,300명 뿐이었다.

 

태자였던 당 숙종 쪽의 초라한 행색은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문무관원이 30명 미만이었다.

그런데 7월 말 곽자의 등이 군사 5만을 거느리고 하북에서 영무에 도착하자 군대의 위세는 비로소 성대해졌다.

 

이에따라 당 숙종은 81일 곽자의를 병부상서로, 이광필을 호부상서로 삼으며 본격적인 조정의 모습을 보인다.

한편 당 현종의 조정에서는 816일 영무에서 태자가 황제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당 현종이 자기를 태상황으로 칭하게 하고 태자를 황제로 인정한다.

 

그리고 91일 당 숙종(7)은 맏아들 광평왕(훗날 당 대종-8)을 천하병마원수로 삼는다

또한 당 숙종은 빈왕(邠王) 이수례의 아들 이승채와 복고회은을 시켜 회홀에게 군사를 요청한다.

회홀 군대의 도움을 받아 반격을 하려는 것이다.

그와 동시에 후한 포상을 약속하며 발한나와 서역의 여러나라, 그리고 안서의 병사들을 불러 모았다.

이렇게 한 후 팽원에서 이들 군사를 기다리기로 하고 917일 당 숙종은 영무를 먼저 떠났다.

 

925일 당 숙종이 순화(감숙성 경양현)를 거쳐

103일 팽원에 도착하였다.

이때, 재상 방관이 장안과 낙양을 수복하겠다고 하자 당 숙종이 허락하고 초토서경겸방어포장양관병마절도등사의 벼슬을 주었다

 

1021일 방관은 3군을 만들어 함양에서 안록산군과 싸었으나 대패하여,

죽거나 다친 사람은 4만여명이고, 살아난 사람은 수천명 뿐이었다

1023일 방관이 스스로 남군을 가지고 싸웠으나 또 패배하고 말았다.

 

이즈음, 돈황왕 이승채가 회홀의 아장에 도착하자 화홀가한은 딸을 그에게 처로 삼게 하고 신하를 파견하여

이승채와 복고회은과 함께 와서 팽원에서 당 숙종을 만났다.

황상은 그 사자를 후하게 예우하여 돌려보내고 회홀가한의 딸에게 비가공주라는 호칭을 하사하였다.

 

그리고 118일 회홀군이 대한곡(내몽고 포두시)에 도착하여 곽자의 군대와 합쳤다.

회홀군이 드디어 출동한 것이다.

 

이러한 틈을 타서 12,

토번은 위융(청해성 문원현), 신위(청해성 해안현), 정융(청해성 황원현), 선위(청해성 대동현), 제승, 금천(청해성 공화현),

천성(감숙성 적석산현) 등의 군()과 석보성(청해성 황원현 서남), 백곡성(청해성 공화현 동남), 조과성(청해성 동인현)

함락시켰다.

 

그런데 해를 넘긴

 

757

15일경 안록산이 장남 안경서에게 피살당하는 일이 발생한다.

난을 일으킨 장본인이 죽은 것이다. 당과 회홀 연합군에게는 대단히 유리한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그리고 115일 안서도호부, 북정도호부, 발한나, 대식의 여러나라 군대가 양(감숙성 무위시), (청해성 악도현)에 도착하자

당 숙종은 보정(감숙성 경천현)에 행차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