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신라와 당의 관계-185,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29), 돌궐족 묵철의 침공-23)
차례
가. 관련 사료 1. 구당서 토번전(상) 2. 구당서 토번전(하) 3. 신당서 토번전 4. 구당서 돌궐전 5. 신당서 돌궐전 6. 구당서 측천본기 7. 신당서 측천본기 8. 구당서 거란전 9. 신당서 거란전 10. 구당서 발해전 11. 신당서 발해전 12. 구당서 숙종본기 13. 구당서 회홀전 14. 신당서 회골전 15. 구당서 남조전 16. 신당서 남조전 17. 구당서 신라전 18. 신당서 신라전 19. 삼국사기 신라본기
나.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 1. 이진충의 난 이전 2. 이진충의 난 3. 돌궐족 묵철의 침공 4. 안사의 난 5. 토번의 침공 6. 토번의 침공 이후 7. 민란의 발생과 남조의 침공 8. 황소의 난 9. 절도사의 시대 10. 당의 멸망
다. 통일신라와 당 1. 통일신라 이후의 당나라 약사 2. 신구당서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3.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4. 사료를 통합해서 본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
나.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 1. 이진충의 난 이전 2. 이진충의 난 3. 돌궐족 묵철의 침공 1) 연표 2) 연표 분석 및 해설 3) 요약
2) 연표 분석 및 해설: ⇒ 이진충의 난이 미친 파장 (1) 연도별 분석 및 해설(698년 ~ 755년) (2) 나라별 분석 및 해설
(2) 나라별 분석 및 해설-2
③ 거란
거란족 이진충의 난이 돌궐의 묵철에게 진압당한 후 묵철이 쇠락하자 거란족은 다시 돌궐의 속박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이틈을 타서 거란족이 당에 들어오자 공주를 주어 혼인동맹을 맺고 돌궐에 대항하는 체제를 갖춘다. 그 뒤 거란족이 내분을 일으키자 당의 지방관리가 이에 개입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후 어떤 사람이 거란의 군주가 되어도 공주를 시집보내 혼인동맹을 맺어 돌궐에 함께 대항하는 체제를 갖춘다. 그러나 거란족이 내분을 일으켜 돌궐에 항복하자 당은 거란을 공격하였다. 이에 거란족이 도망쳤다가 당을 공격하니 당이 패하고 이에 다시 당이 거란을 공격하는 한편 거란족을 매수하여 수장을 죽이게 하는 수작으로 거란을 제압한다. 그 다음 매수당한 거란의 꼭두각시를 군주로 내세워 기미정책(간접통치)를 하였으나 그는 거란족에게 살해당한다. 그 다음에 다른 거란족 추장이 당에 항복하자 다시 그를 군주로 삼고 공주를 시집보내 기미정책(간접통치)을 시행하였으나 그는 직접 당을 배반하고 반란을 일으키니 당은 안록산을 내세워 그를 토벌한다. 즉, 돌궐이 점차 약화되고 드디어 멸망하게 되자 쓸모가 없어진 거란을 당은 직접 없애려고 한 것이다. 그후 안록산은 거란의 추장이 배반한다고 거란에 쳐들어갔으나 패배하고 만다. 이로부터 안록산은 거란과 서로 침략하고 노략질하면서 안록산의 난을 맞이한다.
이를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697년 거란족 이진충의 난이 돌궐에게 진압당한 후 한동안 잠잠하더니
716년 돌궐의 묵철이 쇠락하자 이진충의 사촌동생 이실활이 당으로 들어오니 당현종은 종실의 외질녀(外姪女)인 양씨를 봉해 영락공주로 삼아 그에게 시집보냈다.
718년 이실활이 죽자 파고가 그 뒤를 이었으나 파고의 대신인 가돌우가 용맹하여 민심을 두루 얻게 되자 파고가 가돌우를 제거하려 하였다. 그러나 가돌우가 도리어 파고를 공격하자 파고는 영주로 달아났다. 영주도독 허흠담이 설태에게 명하여 파고와 해왕(奚王) 이대보와 함께가돌우를 토벌하게 하였으나 패하여 파고와 이대보는 모두 가돌우에게 살해되었고 설태는 생포되었다. 이렇게 되니 영주도독 허흠담이 영주 관아를 임유관으로 옮겼다. 한편, 가돌우는 파고의 종제 울우를 세워 군주로 삼았다.
722년 울우가 들어와 알현하고 혼인을 청하니, 당 현종이 또 종매부(從妹夫)인 모용가빈의 딸을 봉해 연군공주로 삼아 그에게 시집보냈다.
723년 울우가 병으로 죽자 동생인 토우(吐于)가 그 뒤를 잇고 다시 연군공주를 처로 삼았다. 그런데 토우는 가돌우와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래서
725년 토우가 공주를 데리고 당으로 도망쳐 오자 요양군왕이라 하고 숙위에 머무르게 하였다. 이에 가돌우가 이소고를 세워 군주로 삼으니, 당 현종이 이소고를 광화군왕이라 하며 또 황종외질녀 진씨를 봉해 동화공주로 삼아 그에게 시집보냈다.
730년 가돌우가 이소고를 죽이고 해(奚)의 무리를 위협해 돌궐에 항복하자 동화공주는 도망쳐 평로군(平盧軍)에 의탁했다. 이에 당 현종은 충왕 이준을 하북도행군원수로 삼아 그들을 토벌하게 했으나 군대는 끝내 가지 않았다. 그러자,
732년 신안왕 이의(李禕)를 행군부대총관으로 삼아 거란을 공격하게 하여 물리쳤다. 이에 가돌우는 그의 휘하를 거느리고 멀리 도망쳤고 해(奚)의 무리도 모두 항복하였다. 당이 이진충의 난 이후 거란을 처음 공격한 것이다. 그러나
733년 가돌우가 또다시 와서 약탈하니 유주장사 설초옥이 부장 곽영걸· 오극근· 오지의· 나수충을 보내 정예기병으로 가돌우를 추격하였으나 당나라군이 크게 패하였다. 이때 오지의와 나수충은 도망쳐 왔으나 곽영걸과 오극근은 진(陣)에서 죽었고, 그 휘하 6천여 명은 모두 적에게 살해당했다.
이리하여 장수규로 하여금 가돌우를 경략하게 하니, 가돌우는 거짓으로 항복하였다. 그러다가 가돌우가 다시 무리을 이끌고 돌궐로 가려 하였다. 이때 장규수의 부하 왕회가 가돌우의 부하 이과절을 구워삶아서 가돌우 등을 죽였다.
735년 당 현종은 이과절을 북평군왕으로 삼았으나 이과절은 가돌우의 남은 무리인 니예에게 살해당했다.
745년 거란의 대추장 이회수가 항복하자 숭순왕에 봉하고 종실 출신의 여자인 독고씨를 정락공주로 삼아 그에게 시집보낸다. 그러나 이회수가 공주를 죽이고 반란을 일으키자 안록산이 그를 토벌하고 물리친다.
751년 안록산은 거란의 추장이 배반하려 한다고 무고하고 병사를 들어 그들을 토벌할 것을 청하고 뒤이어 8월, 수만 명을 이끌고 황수(潢水) 남쪽 거란의 본영으로 가서 거란과 전투를 벌였으나 패하고 돌아갔다. 이로부터 안록산은 거란과 서로 침략하고 노략질하여 포위를 풀지 않았는데 안록산이 반란을 일으키고서야 그만두었다.
④ 발해
698년 대조영이 진국왕(振國王)에 올라 발해를 건국하여 고구려의 엣 영토를 되찾은 뒤 대조영은 돌궐과 통교하고 당나라와는 국교를 맺지 않았다. 그런데 무측천의 주나라(당)가 돌궐의 묵철에게 군사적으로 심하게 당하니 폐위시켰던 당 중종을 황태자로 다시 삼았는데 늙어 힘이 없게 되자 옛 당의 신하들이 황태자를 제위에 올리기로 하고 무측천을 쫓아내 당 중종이 다시 황제에 복위하자 돌궐을 물리치기 위한 동맹국으로 발해를 찾아갔으나 이때는 동맹을 못 맺었다.(705년) 그 다음으로 제위에 오른 당 예종이 다시 사신을 보내 발해와 동맹을 맺는다.(713년) 이는 당이 토번과 처참한 혼인동맹을 맺은 후 자기들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두 번째로 맺은 소중한 동맹이다. 그런데도 그 표현을 보면 마치 종속국의 왕을 대하듯이 책봉 운운하고 있으니 개가 웃을 노릇이다. 당이 자기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맺은 동맹국의 왕에게 아래 사람 대하듯 할수 있겠는가? 있을 수도 없고 있지도 않은 소설을 쓴 것이다. 처참한 자기들의 현실을 글자로나마 화장 해보겠다는 얄팍한 수작으로 참으로 개가 웃을 일을 한 것이다.
그런 얄팍한 수작인 글 장난은 719년 대조영이 죽자 그 아들 대무예도 발해왕으로 책봉하였다는 식으로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개수작이 거짓이라는 것이 금방 탄로난다. 726년에 흑수말갈이 당에 내조한 것을 기화로 발해를 앞뒤에서 공격하여 와해시키려는 공작이 탄로나자 그 보복으로 발해는 당을 공격한다. 명령을 받는 종속국이 어떻게 감히 종주국을 공격할 수 있는가? 발해가 종속국이 아니니까 당을 공격하는 것이고 당은 이에 변변한 반격도 못하고 말았다. 발해와 당의 군사적 충돌은 이것이 처음이자 마자막이다. 이로서 발해가 당의 속국이 아님이 증명된다. 이것이 발해와 당의 관계이다. 따라서 왕으로 책봉하였다느니 홀한주도독으로 삼았다느니 하는 것은 또한번 글자로 친 장난이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이후인 737년 발해 제2대 무왕(대무예)이 죽어 그 아들 대흠무가 왕위에 오르자 사신을 보내 발해군왕으로 책봉했다는 이야기도 그 연장선에 있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737년 이후에는 767년(대력2년)에서 775년(대력10년) 기록으로 뛰어 안사의 난 이후가 되므로 여기서는 생략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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