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신라와 당의 관계-163,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7), 돌궐족 묵철의 침공-1)
차례
가. 관련 사료
1. 구당서 토번전(상)
2. 구당서 토번전(하)
3. 신당서 토번전
4. 구당서 돌궐전
5. 신당서 돌궐전
6. 구당서 측천본기
7. 신당서 측천본기
8. 구당서 거란전
9. 신당서 거란전
10. 구당서 발해전
11. 신당서 발해전
12. 구당서 숙종본기
13. 구당서 회홀전
14. 신당서 회골전
15. 구당서 남조전
16. 신당서 남조전
17. 구당서 신라전
18. 신당서 신라전
19. 삼국사기 신라본기
나.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
1. 이진충의 난 이전
2. 이진충의 난
3. 돌궐족 묵철의 침공
4. 안사의 난
5. 토번의 침공
6. 토번의 침공 이후
7. 민란의 발생과 남조의 침공
8. 황소의 난
9. 절도사의 시대
10. 당의 멸망
다. 통일신라와 당
1. 통일신라 이후의 당나라 약사
2. 신구당서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3.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4. 사료를 통합해서 본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
나.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
1. 이진충의 난 이전
2. 이진충의 난
3. 돌궐족 묵철의 침공
1) 연표
2) 연표 분석 및 해설
3) 요약
1) 연표(698년~755년)
※ 이 연표는 이제까지 올린 신구당서 측천황후 본기, 돌궐전, 발해전, 토번전 거란전 등의 관련 사료를 연도순으로 작성한 것임.
< 연표: 돌궐족 묵철의 침공(698년~69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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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 |
기 사 |
698 |
성력 원년(698년) 여름 5월,돌궐의 묵철이 딸이 있다고 말하며 화친을 청하였다.
<구당서 측천황후 본기>
성력원년(698년),묵철이 표를 올려 (무)측천에게 아들이 되겠다고 청하고,
아울러 딸이 있다고 말하며,화친을 청하였다.
애초에,함형 연간(670~673년)에,돌궐 여러 부락의 투항해 귀부한 자들이,대부분 풍주、승주、영주、하주、삭주、대주 등 6주 여러 곳에 살았는데,(이들을) 항호(降戶)라고 말하였다.
묵철이 이때가 되자 또 이 항호와 선우도호부의 땅을 원하면서,아울러 농기구와 종자를 청하니,(무)측천이 처음에는 불허하였다.
묵철이 크게 원망하고 노여워하여,언사가 심히 거만하며,우리 사신 사빈경 전귀도를 구속하고,장차 해치려고 하였다. 당시 조정은 그 군사의 위세를 두려워하여,납언 요숙과 난대시랑 양재사가 건의하여 그 화친을 허락할 것을 청하니,마침내 6주의 항호 수천 장(帳: 세대, 가구)을 다 몰고 갔으며,아울러 종자(種子) 4만여석과 농기구 3천사를 함께 주니,묵철이 이 이유로 점차로 강성하게 되었다.
<이상 구당서 돌궐전>
(대)조영이 굳세고 용맹스러우며 용병을 잘 하자, 말갈의 무리 및 고구려의 여당(餘黨)이 점점 모여 들었다. 성력 연간(698~699년)에 스스로 진국왕(振國王)에 올라 돌궐에 사신을 보내어 통교하였다. 그 땅은 영주(營州) 동쪽 2천리 밖에 있으며, 남쪽은 신라와 서로 접하고 있다. 월희말갈에서 동북으로는 흑수말갈에 이르는데, 사방이 2천리이며, 편호(編戶)는 10여만이고 승병(勝兵)은 수만명이다. 풍속은 고구려 및 거란과 같고, 문자(文字) 및 전적(典籍)도 상당히 있다.
<구당서 북적열전 발해말갈전> |
성력 원년(698년) 가을 7월,회양왕 무연수에게 명하여 돌궐에 가서,묵철의 딸을 받아들여 왕비로 삼게 하였다. 우표도위대장군 염지미에게 춘관상서를 겸임하게 하고 보내,오랑캐(돌궐)의 궁정에 (금과 비단을) 송부하였다.
<구당서 측천황후 본기>
그해(698년),(무)측천이 위왕 무승사의 아들 회양왕 (무)연수에게 명하여 그 딸을 받아들여 왕비로 삼도록 하고,우표도위대장군 염지미를 임시 춘관상서로, 우무위위랑장 양제장을 임시 사빈경으로 (삼아 함께) 보내며,금과 비단을 많이 주어,오랑캐(돌궐)의 궁정에 송부하였다.
<구당서 돌궐전> |
성력 원년(698년) 8월,돌궐의 묵철이 (무)연수가 당 황실의 제왕(諸王)이 아니므로,별도의 장소에 가두며,(돌궐)무리와 염지미를 거느리고 규주와 단주 등의 주(州)에 들어와 침략하였다. 사속경 고평왕 (무)중규、우무위위대장군 사타충의、유주도독 장인단、우우림위대장군 이다조 등에게 병사 20만을 거느리고 역격(逆擊: 반격)하도록 명하니,이에 (무)연수를 풀어주어 돌아왔다. 기축일,묵철이 정주(定州)를 공격하여 함락하고,자사 손언고를 죽였으며,백성들의 오두막집을 불태우고,살해당한 자가 수천명이었다.
<구당서 측천황후 본기>
(당나라 사신) 일행이 흑사의 남쪽 궁정에 도착하자,묵철이 (염)지미 등에게 일러 말했다.:「내 딸을 이씨 가문인 천자의 아들에게 시집보내는 줄 알았는데,너희가 지금 무씨 가문의 아들을 데리고 오니,이 아이는 천자의 아들인가 아닌가? 우리 돌궐은 누대 이래로,이씨 가문에 항복하여 귀부하였는데,지금 들으니 이씨 가문 천자의 종자가 끝이나 전부 없어지고,오직 두 아이만 남아있다고 하니,내가 지금 병사들을 거느리고 (두 아이를 황제로) 옹립하는 것을 도울 것이다.」
마침내 (무)연수 등을 체포하여,별도의 장소에 구속하고,가짜로 (염)지미를 가한으로 삼아,함께 무리 10여만을 통솔하여,우리의 정난군(靜難軍)과 평적군(平狄軍)、청이군(淸夷軍) 등에 있는 군대를 습격하니,정난군사 좌옥검위장군 모용현즉이 병사 5천명을 들어 항복하였다. 잠시 후 규주、단주 등의 주(州)로 진격하여 침구하니,(무)측천이 사속경 무중규를 천병 중도대총관으로 삼고,우무위위장군 사타충의를 천병 서도전군총관으로 삼고,유주도독 장인단을 천병 동도총관으로 삼아,병사 30만을 통솔하여 치도록 명하였다. 우우림위대장군 염경용을 천병 서도후군총관으로 삼아,병사 15만을 거느리고 후원하도록 하였다. 묵철이 또 긍악도로부터 나와,울주를 침구하고,비호현을 함락하였다. 잠시 후 정주(定州)로 진격하여 공격해서,자사 손언고를 죽이며,백성들의 오두막과 집을 불 태우고,남녀를 노략질하여 사로잡아,나이가 어리고 많고 없이 모두 죽였다.
<구당서 돌궐전> |
9월,묵철이 조주를 공격하여 함락하고,자사 고예를 살해 하였다. 병자일,여릉왕 (이)철을 황태자로 삼고,옛 이름 현을 허락한다는 영을 내리며 천하에 대사면령을 내리고 큰 잔치 5일을 하사하였다. 납언 적인걸을 하북도행군원수로 삼는다는 영을 내렸다. 신사일, 황태자가 태묘에 배알하였다. 계미일,묵철이 약탈한 조주와 정주의 남녀 만여명을 다 죽이고,오회도를 따라 가면서,도착하는 곳마다 잔인하게 학살하니,(그 숫자를) 모두 기록할 수 없을 정도였다.
<구당서 측천황후 본기>
☆ 무측천. 여릉왕 이현(당 중종)을 다시 태자로 책봉(9月15日)
(무)측천이 대노하여,묵철을 목베는 자는 왕에 봉한다는 상을 내걸었으며,묵철의 칭호를 고쳐 참철로 하였다. 얼마 안되어 또 조주를 포위하여 핍박하니,장사 당파약이 도리어 성(을 가지고) 호응하려고 하였는데,자사 고예가 항거해 절개(를 지켜) 따르지 않았으나,마침내 살해 당하였다. (무)측천 이에 여릉왕을 황태자로 세우고,하북도행군대원수를 맏도록 명령하였으나,군대가 아직 출발하기도 전에 묵철이 조(주)、정(주) 등의 주(州)에 있는 남녀 8~9만명을 모두 강탈하여,오회도를 따라 가면서,통과하는 곳마다 잔인하게 학살하니,(그 숫자를) 모두 기록할 수 없을 정도였다. 사타충의와 후군총관 이다조 등이 모두 중요한 병사를 가졌으나,적과 서로 바라볼 뿐,감히 싸우려 하지 않았다. 하북도원수 납언 적인걸만이 병사 10만을 거느리고 추격하였으나,미치지 못하였다.
<구당서 돌궐전> |
겨울 10월,이달에,염지미가 (당을)배반하고 돌궐로 갔으므로,그 족속들을 (다)죽였다.
<구당서 측천황후 본기> |
699 |
(성력)2년(699년),묵철은 그 아우 돌실복을 좌상찰로 세우고,골돌록의 아들 묵구를 우상찰로 세웠는데,각기 병마 2만여명을 관장하게 하였다. 또 그 아들 복구를 작은 가한으로 세웠는데,그 지위는 양찰(좌우 상찰)의 위에 있었으며,처목곤 등 10성(姓)의 병마 4만여명을 관장하게 하고,또 호칭을 척서가한이라고 하였고,이로부터 해마다 변경을 침구하였다.
<구당서 돌궐전>
묵철이 승리에 취해 중국을 가볍게 여기며 교만한 뜻을 갖게 되었고, [이 무렵 돌궐은] 대체적으로 병력이 힐리[가한]시기와 거의 비슷했으며 땅이 늘어진 넓이가 만 리나 되자 여러 족속들이 모두 와서 명령을 받들었다. 다시 돌실복을 좌찰(左察) 로 삼고, 골돌록의 아들 묵구를 우찰(右察)로 삼아 모두 병력을 2만 명씩 통솔하게 했고, 아들 복구는 소가한으로 삼아 두 찰의 위에 두어 처목곤 등 10성(十姓: 서돌궐을 구성하는 10개 족속, 또는 10개 부락) 병력 4만을 통솔하게 해 척서가한이라고 불렀다.
<신당서 돌궐전>
성력 2년(699) 찬보 기노실롱이 점차 장성함에 대신 논암(論岩) 등과 더불어 은밀히 그들을 제거하고자 했다. 당시 (논)흠릉이 밖에 있었는데, 찬보가 거짓으로 사냥한다고 하고 병사를 모아, (논)흠릉의 수하 2천여 명을 잡아 죽였다. 사신을 보내 (논)흠릉, 찬파 등을 불렀으나, (논)흠릉은 병사를 일으켜 부름에 응하지 않으니, 찬보가 스스로 군대를 이끌고 이를 토벌하여, (논)흠릉은 싸우기도 전에 괴멸되어 드디어 자살하였고, 그 친속과 수하 중에 같은 날 자살한 사람이 백여 명에 달하였다. 찬파 휘하의 천여 명과 형의 아들 망포지 등이 함께 와서 항복하니, 측천(則天)은 우림, 비기를 보내 교외에서 이들을 영접하고, 찬파에게 보국대장군과 행우위대장군을 제수하고, 귀덕군왕에 봉하였으니, 우대함이 매우 두터웠다. 이윽고 찬파로 하여금 그의 부중을 이끌고 홍원곡에서 싸우게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죽자, 특진 겸 안서대도호에 추증하였다.<구당서 토번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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