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154, 삼국사기 신라 본기 -43 (54대 경명왕 본기)

상 상 2015. 11. 6. 17:48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154, 삼국사기 신라 본기 -43 (54대 경명왕 본기)

 

차례

 

. 관련 사료

1. 구당서 토번전()

2. 구당서 토번전()

3. 신당서 토번전

4. 구당서 돌궐전

5. 신당서 돌궐전

6. 구당서 측천본기

7. 신당서 측천본기

8. 구당서 거란전

9. 신당서 거란전

10. 구당서 발해전

11. 신당서 발해전

12. 구당서 숙종본기

13. 구당서 회홀전

14. 신당서 회골전

15. 구당서 남조전

16. 신당서 남조전

17. 구당서 신라전

18. 신당서 신라전

19. 삼국사기 신라본기

 

.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

1. 이진충의 난 이전

2. 이진충의 난

3. 돌궐족 묵철의 침공

4. 안사의 난

5. 토번의 침공

6. 토번의 침공 이후

7. 민란의 발생과 남조의 침공

8. 황소의 난

9. 절도사의 시대

10. 당의 멸망

 

. 통일신라와 당

1. 통일신라 이후의 당나라 약사

2. 신구당서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3.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4. 사료를 통합해서 본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

 

 

. 관련 사료

19. 삼국사기 신라본기

 

19. 삼국사기 신라 본기의 출처:

1) 원 출처는 네이트(nate). 그러나 현재 네이트에 있는 삼국사기는 폐쇄되어 찾아볼 수 없음

2) 지금 삼국사기를 볼 수 있는 싸이트는 네이버로 원문과 함께 읽는 삼국사기

싸이트 주소( http://terms.naver.com/list.nhn?cid=49615&categoryId=49615 )

 

 

< 삼국사기 신라 54대 경명왕 본기 >

0 (AD 917) : 경명왕이 왕위에 올랐다.

[번역문]

경명왕(景明王)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승영(昇英)이고 신덕왕의 태자로,

어머니는 의성왕후(義成王后)이다.

1 (AD 917) : 왕동생 이찬 위응을 상대등으로 삼고,

[번역문]

원년(917) 8월에 왕의 동생 이찬 위응(魏膺)을 상대등으로 삼고, 대아찬 유렴(裕廉)

시중으로 삼았다.

2 (AD 918) : 현승이 반역하다가 죽임을 당하였다.

[번역문]

2(918) 2월에 일길찬 현승(玄昇)이 반역하다가 목베여 죽임을 당하였다.

여름 6월에 궁예 휘하에 있던 사람들의 마음이 갑자기 변하여 태조(太祖)를 추대하였으므로 궁예가 달아나다가 아랫사람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태조가 즉위하여 원년을 일컬었다.

가을 7월에 상주(尙州)의 도적 우두머리 아자개(阿玆盖)가 사자를 보내 태조에게 항복하였다.

3 (AD 919) : 사천왕사의 상이 쥐고 있던 활시위가 끊어지고

[번역문]

3(919) 사천왕사(四天王寺)의 흙으로 만든 상()이 쥐고 있던 활시위가 저절로 끊어지고, 벽에 그려진 개가 마치 개짖는 것과 같은 소리를 내었다. 상대등 김성(金成)을 각찬(角湌)으로 삼고 시중 언옹(彦邕)을 사찬으로 삼았다. 우리[고려] 태조가 송악군으로 도읍을 옮겼다.

4 (AD 920) : 왕과 태조가 서로 우호를 맺었다.

[번역문]

4(920) 봄 정월에 왕과 태조가 서로 사람을 보내 우호를 맺었다.

2월에 강주장군(康州將軍) 윤웅(閏雄)이 태조에게 항복하였다.

겨울 10월에 후백제 왕 견훤이 보병과 기병 1만 명을 거느리고 대야성(大耶城)을 쳐서

함락시키고 진례(進禮)에까지 진군하였으므로, 왕이 아찬 김률(金律)을 보내 태조에게

구원을 청하였다. 태조는 장군에게 명하여 군사를 내어 구원하게 하니 견훤이 듣고서

돌아갔다.

5 (AD 921) : 봄 정월에 김률이 왕에게 아뢰었다.

[번역문]

5(921) 봄 정월에 김률이 왕에게 아뢰었다. “제가 지난해 고려에 사신으로 갔을 때

고려 왕이 저에게 묻기를 듣건대 신라에는 세 가지 보물[三寶]이 있다고 하는데,

이른바 장륙존상(丈六尊像)과 구층탑(九層塔) 그리고 성대(聖帶)가 그것이라고 한다.

장륙존상과 구층탑은 아직도 있으나 성대는 지금도 있는지 모르겠다.’고 하였으므로

제가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왕이 그것을 듣고 여러 신하들에게 물었다.

성대(聖帶)라는 것이 어떤 보물인가?” 그러나 알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때 황룡사에 나이가 90세 넘은 사람이 있어 말하였다.

제가 일찍이 그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보배로운 띠는 곧 진평대왕이 착용하던 것인데, 대대로 전해져 남쪽 창고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왕이 마침내 창고를 열도록 하였으나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다른 날에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고 제사를 지낸 다음에야 그것을 보게 되었는데, 그 띠는 금과 옥으로 장식된 것으로 매우 길어서 보통 사람이 맬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사론(史論): 옛날에 명당(明堂)에 앉아서 나라에 전해져 오는 임금의 인장(印章)을 쥐고 구정(九鼎)을 진열해 놓는 것을 마치 제왕의 장한 일인 것처럼 하였다. 그러나 한공(韓公)은 그것을 다음과 같이 논하였다. 하늘과 사람의 마음을 돌아오게 하고 태평한 터전을 일으키는 것은 결코 세 가지 기물[三器]이 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세 가지의 기물을 세워 놓고 소중히 여기는 것은 그것을 과시하는 사람의 말이 아닐까?

 

하물며 이 신라의 이른바 세 가지 보물이라는 것도 역시 인위적인 사치에서 나왔을 따름이니, 나라를 다스림에 어찌 이것이 필수적이겠는가? 맹자에 이르기를 제후의 보배는 세 가지가 있는데, 토지·인민·정사(政事)가 그것이다.라 하였으며, 초서(楚書)에 이르기를 초나라는 보배로 여기는 것이 없고, 오직 선()을 보배로 여긴다.라고 하였다. 만약 이것을 나라 안에서 행한다면 한 나라를 착하게 하기에 충분하고, 그것을 밖으로 옮긴다면 온 천하를 윤택하도록 하기에 충분하니 또 그 밖에 무슨 물건을 말할 것인가? 태조는 신라 사람들의 말을 듣고 그것을 물어보았을 따름이지 숭상할 만하다고 여긴 것은 아닐 것이다.

 

2월에 말갈 별부(別部) 달고(達姑)의 무리가 북쪽 변경에 와서 노략질하였다.

그때 태조의 장군 견권(堅權)이 삭주(朔州)를 지키고 있었는데, 기병을 이끌고 공격하여 그들을 크게 깨뜨려 한 필의 말도 돌아가지 못하였다. 왕이 기뻐하여 사신을 보내 글을 전하여 태조에게 감사하였다. 여름 4월에 서울에 큰 바람이 불어 나무가 뽑혔다.

가을 8월에 누리의 재해가 있었고 가물었다.

6 (AD 922) : 장군 원봉과 순식이 태조에게 항복하였다.

[번역문]

6(922) 봄 정월에 하지성(下枝城) 장군 원봉(元逢)과 명주(溟州) 장군 순식(順式)

태조에게 항복하였다. 태조가 그들의 귀순을 생각하여 원봉의 본래 성()을 순주(順州)로 삼고, 순식(順式)에게는 성()을 내려 왕씨(王氏)라 하였다. 이 달에 진보(眞寶) 장군 홍술(洪述)이 태조에게 항복하였다.

7 (AD 923) : 장군 성달 양문 등이 태조에게 항복하였다.

[번역문]

7(923) 가을 7월에 명지성(命旨城) 장군 성달(城達)과 경산부(京山府) 장군 양문(良文) 등이 태조에게 항복하였다. 왕이 창부시랑(倉部侍郞) 김락(金樂)과 녹사참군(錄事參軍) 김유경(金幼卿)을 후당(後唐)에 보내 조회하고 토산물을 바치니, 장종(莊宗)이 물품을 차등있게 내려 주었다.

8 (AD 924) : 왕이 죽었다. 시호를 경명이라 하고

[번역문]

8(924) 봄 정월에 후당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천주절도사(泉州節度使) 왕봉규(王逢規) 역시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여름 6월에 조산대부(朝散大夫) 창부시랑 김악(金岳)을 후당에 보내 조공하니,

장종이 조의대부(朝議大夫) 시위위경(試衛尉卿)의 관작을 주었다.

가을 8월에 왕이 죽었다. 시호를 경명(景明)이라 하고 황복사(黃福寺) 북쪽에 장사지냈다. 태조가 사신을 보내 조문하고 제사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