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

귓속말에 어깨춤 추는 外交

상 상 2015. 9. 17. 17:18

출처: 조선일보, 입력 : 2015.09.17 03:20

 

중국을 한반도 통일의 友軍으로 만들려면 고도의 국가 전략 필요

그러나 번번이 중국이 건네는 달콤한 귓속말에 들썩이기 일쑤

이래서야 통일로 가는 멀고도 긴 험난한 여정 完走할 수 있겠나

 

 

중국은 '귓속말 외교'에 관한 한 세계 최고다. 비공개 회담이나 면담 자리에서 슬쩍 흘리는 중국의 말은 상대를 흥분시킨다. 마치 중국이 귀에 대고 속삭이듯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고 한다.

 

대한민국은 이런 중국의 귓속말 전략이 가장 잘 통하는 상대라 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 같다. 중국과 외교 무대에서 맞닥뜨린 경험이 있는 한국 대통령·장관·외교관들에게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는 공통점이 하나 있다. 중국과 나눈 비밀 대화를 다 털어놓을 수 없는 현실을 무척이나 갑갑해하는 것이다. 기자가 외교부를 출입하던 1992년 한·중 수교(修交) 때부터 그랬다. 당시에도 한국 관리들은 "언론이 생각하는 것보다 한·중 간에 더 깊은 대화가 오가고 있다"고 했고, 23년이 지난 요즘도 심심치 않게 비슷한 이야기를 듣곤 한다.

 

중국의 귓속말에 가장 솔깃해하는 대표적 사례로 한국 대통령들을 꼽고 싶다. 20132월 초 청와대에서 퇴임을 앞둔 이명박 대통령을 만났다. 조선일보와의 인터뷰 자리였다. 두 시간 넘게 진행된 인터뷰에서 이 전 대통령은 중국에 관한 질문이 나오자 기다렸다는 듯이 "있는 그대로 얘기할 수 없는 한계가 있다"고 운을 떼더니 "·중 관계는 언론에 보도된 것 이상으로 좋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 전 대통령은 "사석에서 (·중이) 통일에 관한 얘기를 할 수 있게 된 것은 상상할 수 없는 변화"라며 "이런 진지한 대화가 이뤄진 지 1년 정도 된다"고 털어놨다. 그전에는 '통일' 얘기만 나와도 말을 돌리던 중국의 태도가 변하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중국의 변화가 이명박 정부부터 시작된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절에도 정부 고위 관계자들로부터 똑같은 이야기를 들어왔기 때문이다.

 

박근혜 대통령 역시 이달 초 베이징에서 시진핑 중국 주석을 만난 뒤 적잖이 들뜬 기색이다. 박 대통령은 서울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중국과 당장에라도 통일 논의에 들어가기로 했다고 한·중 회담의 성과를 설명했다. 실제 한·중 정상회담 후 나온 공동 발표문에도 이례적으로 '한반도 통일에 대해 심도 있는 논의가 있었다'고 명기(明記)돼 있다. 그러나 바로 같은 발표문에 나온 한반도 통일에 대한 중국의 입장은 과거와 달라진 게 하나도 없다. '중국 측은 한반도가 장래에 한민족에 의해 평화적으로 통일되는 것을 지지했다'는 문구는 한·중이 1992824일 중국 베이징 조어대에서 수교 협정에 서명하면서 발표한 공동성명 때부터 줄곧 써온 표현이다.

 

한반도 통일을 이루기 위해선 중국을 우군(友軍)으로 만드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것은 5년 단임의 한 정권이 완수할 수 있는 과제는 아니다. 정권을 뛰어넘어 국가적 지혜를 모은 고도의 전략이 필요하다. 박 대통령이 한·중 간 통일 논의가 시작됐다고 밝힌 것이 이런 전략적 판단에서 나왔다고 보기는 어렵다. 무엇보다 중국의 귓속말에 우리 외교·안보팀 전체가 어깨춤이라도 출 듯한 들뜬 모습을 보인 것은 치명적 실책이다. 정부는 며칠 전 외교·안보 분야 자화자찬으로 가득한 홍보 책자를 발간했다. 이 자료에서 한·중 관계가 과거 경제만 열기가 있을 뿐 정치·안보는 차가웠던 '정랭경열(政冷經熱)'에서 정치와 경제가 함께 뜨거워진 '정열경열(政熱經熱)'로 접어들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중국은 한·중 국방부 사이에 비상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는 핫라인을 개통하자는 우리 측 요구를 7년 넘게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박 대통령도 취임 첫해 시 주석과의 첫 회담에서 조속한 시일 내에 핫라인을 설치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그러나 2년 넘게 감감무소식이다. ·중 국방 당국 간에 전화선 하나를 개통하는 일조차 이렇게 선뜻 풀리지 않는 마당에 우리만 '정열경열' 운운하며 들떠 있는 것은 아닌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지금의 중국은 북한과 혈맹(血盟) 운운하던 과거의 중국이 아니다. 중국도 한반도 문제의 축()이 남과 북 중 어느 쪽으로 기울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 북한 권력의 기행(奇行)과 퇴행 등을 감안하면 이런 추세는 시간이 흐를수록 더 강해질 수밖에 없다. 이 흐름을 어떻게 거스를 수 없는 대세로 만들 것이며, 그 시간을 얼마나 단축하느냐가 대()중국 외교의 핵심이다. 그러려면 우리가 중국 문제에 관한 한 세계 최고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실제 상황은 거꾸로다. 중국이 한국을 다루는 법을 더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중국 귓속말에 어깨가 들썩이는 우리의 모습을 유일한 동맹국인 미국은 또 어떻게 받아들이겠는가. 이래서야 통일에 이르는 길고도 험난한 길을 어떻게 완주할 수 있을지 걱정스럽다.

 

이 와중에 북한이 핵·미사일 시험 재개를 위협하고 나섰다. 북이 끝내 도발을 강행할 경우 이 정부가 역대 최상이라고 홍보해 온 한·미 동맹과 한·중 관계가 시험대에 오를 수밖에 없다. 진실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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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두식 논설위원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