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입력 2015.09.14 00:54 / 수정 2015.09.14 01:00
평화통일로 향한 전진은 분단체제를 제도화하는 길밖에 없다고 한다면 어불성설(語不成說)이라고 일축할 것이다. 그러나 지난 한 달 긴박했던 국내외 정황을 돌아볼 때 이를 가볍게 간과해버릴 수만은 없다. 휴전선에서의 지뢰 매설이 우리 군에 중상자를 내면서 촉발된 남북 간 긴장상태가 급기야는 북의 준전시상태 선포에까지 이르면서 한반도에선 다시 한번 전쟁과 평화 사이의 간격이 위험수위를 넘을 정도로 좁혀졌었다. 다행히도 남과 북은 8·25합의에 이르러 급한 불을 끄는 데 일단은 성공했다. 그러나 준전시상태, 즉 전쟁 발발의 가능성을 이렇게 일상화한 사건처럼 유유히 대처해 나가는 남북한 정부나 주민의 자세는 한반도 분단 현황의 특수성과 예외성을 반영하고 있으며 평화통일의 전망이 극도로 불투명함을 보여주고 있다.
평화통일이란 목표는 누구나 쉽게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나 평화와 통일은 시간적 차원에서나 규범적 차원에서 우선순위를 달리하는 선택의 대상이다. 시간적 차원에서의 평화는 당장 필요한 반면 통일은 미래를 내다보며 달성해야 할 목표다. 한편 규범적 차원에서 선택에 직면한다면 평화가 통일에 우선한다고, 즉 전쟁을 통한 통일보다는 분단 상태에서의 평화를 원하는 사람이 훨씬 많다고 추정된다. 한걸음 나아가서 분단체제만이 현존하는 국가체제의 유지를 보장한다는 전제에 따라 통일, 특히 흡수통일에 대한 공포와 내부분열을 촉발하는 평화와 개방에 대한 거부감이 작동할 수도 있다.
이렇듯 분단 상황에 내재하는 평화와 통일에 대한 구조적 공포와 거부감을 중화시키기 위해 냉전의 끝자락인 1989년 9월 민주화의 흥분 속에서 여야 합의로 확정한 민족공동체통일방안은 한반도에서 두 국가체제가 상당 기간 공존·협력하는 제도화를 처방한 것이었다. 이 한국판 양국체제해결안(two states solution)에 따라 91년 남북기본합의서, 유엔 동시가입, 비핵화공동선언이 이뤄졌다. 만약 그 시기에 유일 초강대국이었던 미국이 주도해 남북 간 합의된 양국체제해결안에 대한 국제적 보장의 틀을 지체 없이 마련했더라면 한반도의 평화통일로의 진입이 가능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은 아직도 남아 있다.
무력충돌의 가능성을 일단 진정시킨 8·25합의의 충실한 이행을 남북이 다짐하는 가운데 9월 3일 중국의 전승기념행사에 참석한 박근혜 대통령은 시진핑 국가주석과의 정상회담을 통해 한반도 평화통일의 제반 여건을 성숙시켜가는 데 양국이 적극 협조할 것을 약속했다. 무엇보다도 평화를 위협하고 긴장을 고조시키는 어떠한 행동도 예방하고 유엔헌장의 정신과 원칙을 수호하는 데 진력하겠다는 중국은 비핵화를 비롯한 한반도 평화 촉진을 위해 6자회담 재개를 포함한 보다 적극적인 외교를 추진할 것으로 기대된다.
이렇듯 박 대통령과 한국의 위상이 베이징에서 부각된 결과는 양면성을 지니고 있음에 유의해야 한다. 예컨대 한·중 정상회담이 있던 날 파이낸셜타임스 마틴 월프의 칼럼에서는 ‘중국이 한국만큼 부자가 된다면 중국 경제는 미국과 유럽 경제를 합친 것보다도 커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중국의 굴기를 극적으로 묘사한 것이겠지만 북한으로선 듣기 거북한 대목임에 틀림없다. 이렇게 국제사회가 그 실력을 높이 평가하는 한국, 그리고 공동의 외교노선을 조정해가는 듯 보이는 중국과 미국을 상대로 어떻게 스스로의 위치를 지탱해갈 것이냐 하는 결코 쉽지 않은 외교적 과제와 선택의 계절을 북한은 맞고 있다.
이런 가운데 다음주에는 워싱턴에서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시진핑 국가주석의 정상회담이 예정돼 있다. 21세기의 아시아·태평양 지역, 그리고 지구촌의 평화와 발전은 미국과 중국이 군사적 차원 못지않게 외교적 차원에서 초강대국임을 함께 보여줄 때 가능한 것이다. 이를 위한 실제적이고 상징적 출발점은 한반도 분단의 제도화를 통한 평화통일로의 획기적 전환과 전진이란 외교적 돌파구를 여는 데 있다. 하나의 민족공동체를 함께 지향하는 두 개의 국가체제가 평화롭게 공존하는, 그리고 미국과 중국, 러시아와 일본이 이를 조약으로 보장하고 지원하는 합의는 세계사의 소명에 부응하며, 국제사회와 남북한이 함께 수용할 수 있고 성공 가능성이 높은 평화로의 획기적 실험이 될 수 있을 것이다.
20년 전 아깝게 놓쳐버렸던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의 기회를 되살리게 된다면 남북한은 물론 미국과 중국을 비롯한 관계국의 지도자들은 지구촌의 평화시대를 여는 역사적 유산을 남기게 될 것이다. 10월 16일에 있을 한·미 정상회담에 거는 우리의 기대가 남다른 것도 바로 그러한 평화통일로 향한 민족적 집념이 살아 숨 쉬고 있기 때문이다.
이홍구 중앙일보 고문·전 국무총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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