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128, 삼국사기 신라 본기 -17 (37대 선덕왕 본기)

상 상 2015. 9. 2. 17:20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128, 삼국사기 신라 본기 -17 (37대 선덕왕 본기)

 

차례

 

. 관련 사료

1. 구당서 토번전()

2. 구당서 토번전()

3. 신당서 토번전

4. 구당서 돌궐전

5. 신당서 돌궐전

6. 구당서 측천본기

7. 신당서 측천본기

8. 구당서 거란전

9. 신당서 거란전

10. 구당서 발해전

11. 신당서 발해전

12. 구당서 숙종본기

13. 구당서 회홀전

14. 신당서 회골전

15. 구당서 남조전

16. 신당서 남조전

17. 구당서 신라전

18. 신당서 신라전

19. 삼국사기 신라본기

 

.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

1. 이진충의 난 이전

2. 이진충의 난

3. 돌궐족 묵철의 침공

4. 안사의 난

5. 토번의 침공

6. 토번의 침공 이후

7. 민란의 발생과 남조의 침공

8. 황소의 난

9. 절도사의 시대

10. 당의 멸망

 

. 통일신라와 당

1. 통일신라 이후의 당나라 약사

2. 신구당서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3.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4. 사료를 통합해서 본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

 

 

. 관련 사료

19. 삼국사기 신라본기

 

19. 삼국사기 신라 본기의 출처:

1) 원 출처는 네이트(nate). 그러나 현재 네이트에 있는 삼국사기는 폐쇄되어 찾아볼 수 없음

2) 지금 삼국사기를 볼 수 있는 싸이트는 네이버로 원문과 함께 읽는 삼국사기

싸이트 주소( http://terms.naver.com/list.nhn?cid=49615&categoryId=49615 )

 

< 삼국사기 신라 37대 선덕왕 본기 >

선덕왕

 

0 (AD 780) : 선덕왕이 왕위에 올랐다.

[번역문]

선덕왕(宣德王)이 왕위에 올랐다. 성은 김씨이고 이름은 양상(良相)이다.

나물왕(奈勿王)10대손으로, 아버지는 해찬(海湌) 효방(孝芳)이다.

어머니는 김씨 사소부인(四炤夫人)으로 성덕왕(聖德王)의 딸이다.

왕비는 구족부인(具足夫人)으로 각간 양품(良品)의 딸이다.<또는 아찬 의공(義恭)의 딸이라고도 하였다.>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아버지를 개성대왕(開聖大王)으로 추봉하고 어머니 김씨를 정의태후(貞懿太后)로 추존(追尊)하였으며 처를 왕비로 삼았다. 이찬 경신(敬信)을 상대등으로 삼고 아찬 의공(義恭)을 시중으로 삼았다. 어룡성(御龍省)의 봉어(奉御)를 경()으로 고쳤다가, 다시 경을 감()으로 고쳤다.

 

[원문]

宣德王立 姓金氏 諱良相 奈勿王十世孫也 父海湌孝芳 母金氏 四炤夫人 聖德王之女也 妃具足夫人 角干良品之女也 一云義恭阿湌之女 大赦 追封父爲開聖大王 尊母金氏爲貞懿太[주석1]后 妻爲王妃 拜伊湌敬信爲上大等 阿湌義恭爲侍中 改御龍省奉御爲卿 又改卿爲監

 

 

2 (AD 781) : 2월에 몸소 신궁에 제사지냈다.

[번역문]

2(781) 2월에 몸소 신궁에 제사지냈다.

가을 7월에 사자를 보내 패강(浿江) 남쪽의 주와 군을 위로하였다.

 

[원문]

[주석2]年 春二月 親祀神宮 秋七月 發使安撫浿江南州郡

 

3 (AD 782) : 봄 윤 정월에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

[번역문]

3(782) 봄 윤 정월에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2월에 왕이 한산주를 두루 돌며 살펴보고 백성들을 패강진(浿江鎭)으로 옮겼다.

가을 7월에 시림(始林)의 벌판에서 군사를 크게 사열하였다.

 

[원문]

三年 春閏正月 遣使入唐朝貢 二月 王巡幸漢山州 移民戶於浿江鎭 秋七月 大閱於始林之原

 

4 (AD 783) : 아찬 체신을 대곡진 군주(軍主)로 삼았다

[번역문]

4(783) 봄 정월에 아찬 체신(體信)을 대곡진(大谷鎭) 군주(軍主)로 삼았다.

2월에 서울에 눈이 세 자나 내렸다.

 

[원문]

四年 春正月 以阿湌體信爲大谷鎭軍主 二月 京都雪三尺

 

5 (AD 784) : 여름 4월에 왕이 왕위를 양보하려 하였으나

[번역문]

5(784) 여름 4월에 왕이 왕위를 양보하려 하였으나 여러 신하들이 세 번이나 글을 올려 말렸으므로 그만두었다.

 

[원문]

五年 夏四月 王欲遜位 群臣三上表諫 乃止

 

6 (AD 785) : 당나라 덕종이 호부랑중 개훈을 보내

[번역문]

6(785) 봄 정월에 당나라 덕종(德宗)이 호부랑중(戶部郞中) 개훈(蓋塤)을 보내 부절을 가지고 왕을 책명하여 검교태위(檢校大尉) 계림주자사(雞林州刺史) 영해군사(寧海軍使) 신라왕(新羅王)으로 삼았다.

이 달에 왕이 병으로 자리에 누워 오랫동안 낫지 않았으므로 조서를 내려 말하였다.

과인은 본래 재주와 덕이 없어 왕위에 마음이 없었으나 추대함을 피하기 어려워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왕위에 있는 동안 농사가 잘 되지 않고 백성들의 살림이 곤궁하여졌으니, 이는 모두 나의 덕이 백성들의 소망에 맞지 아니하고 정치가 하늘의 뜻에 합치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늘 왕위를 물려주고 밖에 물러나와 살고자 하였으나, 많은 관리와 신하들이 매양 지성으로 말렸기 때문에 뜻대로 하지 못하고 지금까지 주저하고 있다가 갑자기 병에 걸려 다시는 일어날 수 없게 되었다. 죽고 사는 것은 하늘에 달려 있으니, 돌이켜 보건대 무슨 여한이 있겠는가? 나 죽은 뒤에는 불교 법식에 따라 [시신을] 불태워 뼈를 동해에 뿌려라.13일에 이르러 죽으니 시호를 선덕(宣德)이라 하였다.

삼국사기 권 제9

 

[원문]

六年 春正月 唐德宗遣戶部郞中蓋塤 持節冊命王爲檢校太[주석3]尉雞林州刺史寧海軍使新羅王 是月 王寢疾彌留 乃下詔曰 寡人本惟菲薄 無心大寶 難逃推戴 作其卽位 居位以來 年不順成 民用窮困 此皆德不符民望 政未合天[주석4]心 常欲禪讓 退居于外 群官百辟 每以誠止 未果如意 因循至今 忽遘疾疹 不寤不興 死生有命 顧復何恨 死後 依佛制燒火 散骨東海至十三日薨 諡曰宣德

三國史記 卷 第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