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신라와 당의 관계-110, 신당서 신라전- 1 차례 가. 관련 사료 1. 구당서 토번전(상) 2. 구당서 토번전(하) 3. 신당서 토번전 4. 구당서 돌궐전 5. 신당서 돌궐전 6. 구당서 측천본기 7. 신당서 측천본기 8. 구당서 거란전 9. 신당서 거란전 10. 구당서 발해전 11. 신당서 발해전 12. 구당서 숙종본기 13. 구당서 회홀전 14. 신당서 회골전 15. 구당서 남조전 16. 신당서 남조전 17. 구당서 신라전 18. 신당서 신라전 19. 삼국사기 신라본기 나.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 1. 이진충의 난 이전 2. 이진충의 난 3. 돌궐족 묵철의 침공 4. 안사의 난 5. 토번의 침공 6. 토번의 침공 이후 7. 민란의 발생과 남조의 침공 8. 황소의 난 9. 절도사의 시대 10. 당의 멸망 다. 통일신라와 당 1. 통일신라 이후의 당나라 약사 2. 신구당서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3.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4. 사료를 통합해서 본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 가. 관련 사료 18. 신당서 신라전 ※ 18. 신당서 신라전의 출처: 1) 번역문: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통사/ 중국정사조선전/ 新唐書/ 東夷列傳/ 新羅 2) 원문: 新漢籍全文(http://hanchi.ihp.sinica.edu.tw/ihp/hanji.htm) /免費使用/史/正史/新唐書/列傳/ 卷二百二十/ 東夷/ 新羅 18. 신당서 동이열전 신라전(권220) 11) ○ 개요 원년(A.D.681)에 [법민(문무왕)이] 죽고, 아들 (김)정명(政明: 제31대 신문왕)이 왕위를 이었다. 사자(使者)를 보내어 조근하고, 『당례(唐禮)』및 기타의 문사(文辭)를 요구하므로, [측천]무후는 『길흉례(吉凶禮)』와 함께 [이름난] 문장(文章) 50편을 내려 주었다. [정명이] 죽고, 아들 (김)이홍(理洪: 제32대 효소왕)이 왕위를 이었다. [이홍이] 죽고, 아우 (김)흥광(興光:제33대 성덕왕)이 왕위를 이었다. 원문) 開耀元年,死,子政明襲王。遣使者朝,丐唐禮及它文辭,武后賜吉凶禮幷文詞五十篇。死,子理洪襲王。死,弟興光襲王。 | 12) ○ 현종 개원 연간(713~741)에 수차례 입조를 하여 과하마· 조하주· 어아주· 해표피를 바쳤다. 또 두 명의 여자를 바쳤는데, (당)현종은, “여자들은 모두 왕의 고모요 자매이다. 생소한 풍속에 부모· 친척과 떼어 놓는 것이니, 짐은 차마 머물게 하지 못하겠노라.” 하고, 많은 물품을 주어 돌려 보냈다. 또 자제들을 보내어 태학에 입학시켜 경술(經術)을 배우게 하였다. 현종이 이따금씩 (김)흥광(제33대 성덕왕)에게 서문금(瑞文錦)·오색라(五色羅)· 자수문포(紫繡紋袍)· 금은으로 정련한 기물을 주니, (김)흥광(제33대 성덕왕)도 이구마(異狗馬), 황금, 아름다운 가발 등의 여러 물품을 바쳤다. 애초에 발해말갈이 등주를 공략하니 (김)흥광(제33대 성덕왕)이 (그들을) 쳐서 달아나게 하여, 현종은 (김)흥광(제33대 성덕왕)을 영해군대사로 진급시켜 (김흥광으로) 하여금 말갈을 공격하게 하였다. 원문) 玄宗開元中,數入朝,獻果下馬、朝霞紬、魚牙紬、海豹皮。又獻二女,帝曰:「女皆王姑姊妹,違本俗,別所親,朕不忍留。」厚賜還之。又遣子弟入太學學經術。帝間賜興光瑞文錦、五色羅、紫繡紋袍、金銀精器,興光亦上異狗馬、黃金、美嵸諸物。初,渤海靺鞨掠登州,興光擊走之,帝進興光寧海軍大使,使攻靺鞨。 | 13) ○ [개원] 25년(A.D.737)에 [김흥광(제33대 성덕왕)이] 죽으니, (당)현종은 매우 슬퍼하며, 태자태보를 추증하였다. 형도를 홍려소경에 임명하여 [신라에 가서] 조문 제사(弔祭)하게 하고, 아들 (김)승경(承慶: 제34대 효성왕)이 왕위를 잇게 하였다. (형)도에게, “신라는 군자의 나라로 불리며, 『시경』·『서경』을 안다. 경(卿)은 신실한 선비이기 때문에 부절(符節)을 주어 보내는 것이니, 마땅히 경전의 뜻을 잘 펴서 대국의 융성함을 알려 주도록 하라.” 는 조명을 내렸다. 또 그 나라 사람들이 바둑을 잘 둔다 하여 조서를 내려 솔부병조참군 양계응을 부사로 삼아 보냈다. 그 나라의 바둑은 수가 높다는 자도 (양)계응보다는 한수 아래였다. 그리하여 사자(使者)에게 많은 금보(金寶)를 주어 보냈다. 얼마 안있어 그의 아내 박씨를 책립하여 왕비로 삼았다. (김)승경(제34대 효성왕)이 죽으니, 조서로 사자(使者)로 하여금 조상(弔喪)에 임하게 하고, 그의 아우 (김)헌영(憲英: 제35대 경덕왕)으로 왕을 잇게 하였다. 황제(당 현종)가 촉(蜀:성도)에 있었을 때, 사신을 보내 [양자]강을 거슬러 올라 성도(成都) 조정에 도착한 것이 정월(1월)이다. 원문) 二十五年死,帝尤悼之,贈太子太保,命邢璹以鴻臚少卿弔祭,子承慶襲王,詔璹曰:「新羅號君子國,知詩、書。以卿惇儒,故持節往,宜演經誼,使知大國之盛。」又以國人善棋,詔率府兵曹參軍楊季鷹為副。國高弈皆出其下,於是厚遣使者金寶。俄冊其妻朴為妃。承慶死,詔使者臨弔,以其弟憲英嗣王。帝在蜀,遣使泝江至成都朝正月。 | 14) ○ 대력(766~779년)초에 (김)헌영(제35대 경덕왕)이 죽고, 아들 (김)건운(乾運: 제36대 혜공왕)이 왕위에 올랐으나, 아직 어렸는데, 김은거를 보내 입조하여 책명을 기다렸다. 조서로 창부랑중 귀숭경을 (신라로) 가게하여 조문(弔問)을 하게하고, 감찰어사 육정과 고음을 부사로 삼아 책문(冊)을 주었으며, 아울러 어머니 김씨를 태비로 삼았다. 이 무렵 그 나라의 재상들 사이에 권력 다툼이 일어나 서로 공격하여, 나라가 크게 어지러웠는데, 3년만에 비로소 안정되었다. 이에 이해에 내조하여 (공물을) 바쳤다. 건중 4년(783년)에 [김건운(제36대 혜공왕)이] 죽었다. 아들이 없자, 나라 사람들이 함께 재상 김양상(金良相: 제37대 선덕왕)을 세워 [왕위를] 잇게 하였다. 원문) 大曆初,憲英死,子乾運立,甫丱,遣金隱居入朝待命。詔倉部郎中歸崇敬往弔,監察御史陸珽、顧愔為副冊授之,幷母金為太妃。會其宰相爭權相攻,國大亂,三歲乃定。於是,歲朝獻。建中四年死,無子,國人共立宰相金良相嗣。 | 15) ○ 정원 원년(785년)에 호부낭중 개훈을 보내 부절을 가지고 책명하게 하였다. 이해에 [김양상(제37대 선덕왕)이] 죽으니, (그 나라 사람들이) (김)양상의 종부제(從父弟)인 (김)경신(敬信: 제39대 원성왕)을 세워 왕위를 잇도록 하였다. [정원] 14년(798년)에 [김경신(제39대 원성왕)이] 죽었다. 아들이 없어, (그 나라 사람들이) 맏손자 (김)준옹(俊邕: 제39대 소성왕)을 [왕으로] 세웠다. 이듬해에 사봉랑중 위단을 보내며 책서를 가져가게 하였는데, 도착하기 전에 (김)준옹(제39대 소성왕)이 죽어, (위)단(丹)이 그냥 돌아왔다. 아들 (김)중흥(重興: 제40대 애장왕)이 [왕위에] 오르니, 영정 원년(805년)에 조서로 병부랑중 원계방에게 책명하게 하였다. 그 3년 뒤에 사자 김력기가 와서 사례를 하고 말하기를, “몇 해 전에 죽은 임금 (김)준옹(제39대 소성왕)으로 왕을 삼고, 어머니 신씨로 태비를 삼으며, 아내 숙씨로 (왕)비를 삼으셨는데, (김)준옹(제39대 소성왕)이 죽어 그 책문이 지금 [중서]성 안에 있으니 신이 바라옵건대 [그 책문을] 받아 돌아가게 하여 주십시오.” 하였다. 또 재상 김언승· 김중공과 왕의 아우 소금첨명(蘇金添明)의 문극(門㦸)을 요청하므로, 조서로 다 허락하였다. 그리고 재차 조공하였다. 원문) 貞元元年,遣戶部郎中蓋塤持節命之。是年死,立良相從父弟敬信襲王。十四年,死,無子,立嫡孫俊邕。明年,遣司封郎中韋丹持冊,未至,俊邕死,丹還。子重興立,永貞元年,詔兵部郎中元季方冊命。後三年,使者金力奇來謝,且言:「往歲冊故主俊邕為王,母申太妃,妻叔妃,而俊邕不幸,冊今留省中,臣請授以歸。」又為其宰相金彥昇、金仲恭、王之弟蘇金添明丐門戟,詔皆可。凡再朝貢。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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