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110, 신당서 신라전- 1

상 상 2015. 7. 20. 17:16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110, 신당서 신라전- 1

 

차례

 

. 관련 사료

1. 구당서 토번전()

2. 구당서 토번전()

3. 신당서 토번전

4. 구당서 돌궐전

5. 신당서 돌궐전

6. 구당서 측천본기

7. 신당서 측천본기

8. 구당서 거란전

9. 신당서 거란전

10. 구당서 발해전

11. 신당서 발해전

12. 구당서 숙종본기

13. 구당서 회홀전

14. 신당서 회골전

15. 구당서 남조전

16. 신당서 남조전

17. 구당서 신라전

18. 신당서 신라전

19. 삼국사기 신라본기

 

.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

1. 이진충의 난 이전

2. 이진충의 난

3. 돌궐족 묵철의 침공

4. 안사의 난

5. 토번의 침공

6. 토번의 침공 이후

7. 민란의 발생과 남조의 침공

8. 황소의 난

9. 절도사의 시대

10. 당의 멸망

 

. 통일신라와 당

1. 통일신라 이후의 당나라 약사

2. 신구당서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3.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4. 사료를 통합해서 본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

 

 

. 관련 사료

18. 신당서 신라전

 

18. 신당서 신라전의 출처:

1) 번역문: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통사/ 중국정사조선전/ 新唐書/ 東夷列傳/ 新羅

2) 원문: 新漢籍全文(http://hanchi.ihp.sinica.edu.tw/ihp/hanji.htm) /免費使用//正史/新唐書/列傳/ 卷二百二十/ 東夷/ 新羅

 

18. 신당서 동이열전 신라전(220)

11) 개요 원년(A.D.681)[법민(문무왕)] 죽고, 아들 ()정명(政明: 31대 신문왕)이 왕위를 이었다. 사자(使者)를 보내어 조근하고, 당례(唐禮)및 기타의 문사(文辭)를 요구하므로, [측천]무후는 길흉례(吉凶禮)와 함께 [이름난] 문장(文章) 50편을 내려 주었다. [정명이] 죽고, 아들 ()이홍(理洪: 32대 효소왕)이 왕위를 이었다. [이홍이] 죽고, 아우 ()흥광(興光:33대 성덕왕)이 왕위를 이었다.

 

원문) 開耀元年子政明襲王遣使者朝丐唐禮及它文辭武后賜吉凶禮幷文詞五十篇子理洪襲王弟興光襲王

12) 현종 개원 연간(713~741)에 수차례 입조를 하여 과하마· 조하주· 어아주· 해표피를 바쳤다. 또 두 명의 여자를 바쳤는데, ()현종은, “여자들은 모두 왕의 고모요 자매이다. 생소한 풍속에 부모· 친척과 떼어 놓는 것이니, 짐은 차마 머물게 하지 못하겠노라.” 하고, 많은 물품을 주어 돌려 보냈다. 또 자제들을 보내어 태학에 입학시켜 경술(經術)을 배우게 하였다. 현종이 이따금씩 ()흥광(33대 성덕왕)에게 서문금(瑞文錦오색라(五色羅자수문포(紫繡紋袍금은으로 정련한 기물을 주니, ()흥광(33대 성덕왕)도 이구마(異狗馬), 황금, 아름다운 가발 등의 여러 물품을 바쳤다. 애초에 발해말갈이 등주를 공략하니 ()흥광(33대 성덕왕)(그들을) 쳐서 달아나게 하여, 현종은 ()흥광(33대 성덕왕)을 영해군대사로 진급시켜 (김흥광으로) 하여금 말갈을 공격하게 하였다.

 

원문) 玄宗開元中數入朝獻果下馬朝霞紬魚牙紬海豹皮又獻二女帝曰:「女皆王姑姊妹違本俗別所親朕不忍留。」厚賜還之又遣子弟入太學學經術帝間賜興光瑞文錦五色羅紫繡紋袍金銀精器興光亦上異狗馬黃金美嵸諸物渤海靺鞨掠登州興光擊走之帝進興光寧海軍大使使攻靺鞨

13) [개원] 25(A.D.737)[김흥광(33대 성덕왕)] 죽으니, ()현종은 매우 슬퍼하며, 태자태보를 추증하였다. 형도를 홍려소경에 임명하여 [신라에 가서] 조문 제사(弔祭)하게 하고, 아들 ()승경(承慶: 34대 효성왕)이 왕위를 잇게 하였다. ()도에게, “신라는 군자의 나라로 불리며, 시경·서경을 안다. ()은 신실한 선비이기 때문에 부절(符節)을 주어 보내는 것이니, 마땅히 경전의 뜻을 잘 펴서 대국의 융성함을 알려 주도록 하라.” 는 조명을 내렸다. 또 그 나라 사람들이 바둑을 잘 둔다 하여 조서를 내려 솔부병조참군 양계응을 부사로 삼아 보냈다. 그 나라의 바둑은 수가 높다는 자도 ()계응보다는 한수 아래였다. 그리하여 사자(使者)에게 많은 금보(金寶)를 주어 보냈다. 얼마 안있어 그의 아내 박씨를 책립하여 왕비로 삼았다. ()승경(34대 효성왕)이 죽으니, 조서로 사자(使者)로 하여금 조상(弔喪)에 임하게 하고, 그의 아우 ()헌영(憲英: 35대 경덕왕)으로 왕을 잇게 하였다. 황제(당 현종)가 촉(:성도)에 있었을 때, 사신을 보내 [양자]강을 거슬러 올라 성도(成都) 조정에 도착한 것이 정월(1)이다.

 

원문) 二十五年死帝尤悼之贈太子太保命邢璹以鴻臚少卿弔祭子承慶襲王詔璹曰:「新羅號君子國知詩以卿惇儒故持節往宜演經誼使知大國之盛。」又以國人善棋詔率府兵曹參軍楊季鷹為副國高弈皆出其下於是厚遣使者金寶俄冊其妻朴為妃承慶死詔使者臨弔以其弟憲英嗣王帝在蜀遣使泝江至成都朝正月

14) 대력(766~779)초에 ()헌영(35대 경덕왕)이 죽고, 아들 ()건운(乾運: 36대 혜공왕)이 왕위에 올랐으나, 아직 어렸는데, 김은거를 보내 입조하여 책명을 기다렸다. 조서로 창부랑중 귀숭경을 (신라로) 가게하여 조문(弔問)을 하게하고, 감찰어사 육정과 고음을 부사로 삼아 책문()을 주었으며, 아울러 어머니 김씨를 태비로 삼았다. 이 무렵 그 나라의 재상들 사이에 권력 다툼이 일어나 서로 공격하여, 나라가 크게 어지러웠는데, 3년만에 비로소 안정되었다. 이에 이해에 내조하여 (공물을) 바쳤다. 건중 4(783)[김건운(36대 혜공왕)] 죽었다. 아들이 없자, 나라 사람들이 함께 재상 김양상(金良相: 37대 선덕왕)을 세워 [왕위를] 잇게 하였다.

 

원문) 大曆初憲英死子乾運立甫丱遣金隱居入朝待命詔倉部郎中歸崇敬往弔監察御史陸珽顧愔為副冊授之幷母金為太妃會其宰相爭權相攻國大亂三歲乃定於是歲朝獻建中四年死無子國人共立宰相金良相嗣

15) 정원 원년(785)에 호부낭중 개훈을 보내 부절을 가지고 책명하게 하였다. 이해에 [김양상(37대 선덕왕)] 죽으니, (그 나라 사람들이) ()양상의 종부제(從父弟)()경신(敬信: 39대 원성왕)을 세워 왕위를 잇도록 하였다.

[정원] 14(798)[김경신(39대 원성왕)] 죽었다. 아들이 없어, (그 나라 사람들이) 맏손자 ()준옹(俊邕: 39대 소성왕)[왕으로] 세웠다. 이듬해에 사봉랑중 위단을 보내며 책서를 가져가게 하였는데, 도착하기 전에 ()준옹(39대 소성왕)이 죽어, ()()이 그냥 돌아왔다. 아들 ()중흥(重興: 40대 애장왕)[왕위에] 오르니, 영정 원년(805)에 조서로 병부랑중 원계방에게 책명하게 하였다.

3년 뒤에 사자 김력기가 와서 사례를 하고 말하기를, “몇 해 전에 죽은 임금 ()준옹(39대 소성왕)으로 왕을 삼고, 어머니 신씨로 태비를 삼으며, 아내 숙씨로 ()비를 삼으셨는데, ()준옹(39대 소성왕)이 죽어 그 책문이 지금 [중서]성 안에 있으니 신이 바라옵건대 [그 책문을] 받아 돌아가게 하여 주십시오.” 하였다. 또 재상 김언승· 김중공과 왕의 아우 소금첨명(蘇金添明)의 문극(門㦸)을 요청하므로, 조서로 다 허락하였다. 그리고 재차 조공하였다.

 

원문) 貞元元年遣戶部郎中蓋塤持節命之是年死立良相從父弟敬信襲王十四年無子立嫡孫俊邕明年遣司封郎中韋丹持冊未至俊邕死丹還子重興立永貞元年詔兵部郎中元季方冊命後三年使者金力奇來謝且言:「往歲冊故主俊邕為王母申太妃妻叔妃而俊邕不幸冊今留省中臣請授以歸。」又為其宰相金彥昇金仲恭王之弟蘇金添明丐門戟詔皆可凡再朝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