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104, 신당서 남조전- 9

상 상 2015. 7. 6. 18:04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104, 신당서 남조전- 9

 

차례

 

. 관련 사료

1. 구당서 토번전()

2. 구당서 토번전()

3. 신당서 토번전

4. 구당서 돌궐전

5. 신당서 돌궐전

6. 구당서 측천본기

7. 신당서 측천본기

8. 구당서 거란전

9. 신당서 거란전

10. 구당서 발해전

11. 신당서 발해전

12. 구당서 숙종본기

13. 구당서 회홀전

14. 신당서 회골전

15. 구당서 남조전

16. 신당서 남조전

17. 구당서 신라전

18. 신당서 신라전

19. 삼국사기 신라본기

 

.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

1. 이진충의 난 이전

2. 이진충의 난

3. 돌궐족 묵철의 침공

4. 안사의 난

5. 토번의 침공

6. 토번의 침공 이후

7. 민란의 발생과 남조의 침공

8. 황소의 난

9. 절도사의 시대

10. 당의 멸망

 

. 통일신라와 당

1. 통일신라 이후의 당나라 약사

2. 신구당서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3.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4. 사료를 통합해서 본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

 

 

. 관련 사료

16. 신당서 남조전

 

16. 신당서 남조전의 출처:

1) 번역문: 동북아역사넷/ 도서/ 중국정사 외국전/ 唐書 222/ 남만전(南蠻傳) 上 中

2) 원문: 新漢籍全文(http://hanchi.ihp.sinica.edu.tw/ihp/hanji.htm) /免費使用//正史/唐書/ 列傳/ 卷二百二十二 中/ 南蠻 中, 南詔

 

16. 신당서 남조전(222 , 남만 중, 남조 하)

번 역 문

원 문

47) 지상(支詳)이 첩자를 보내 만과 더불어 우호를 약속하고 또 노탐에게 말하기를 적을 많이 죽이는 일이 없게 하여 만과의 강화를 서두르라고 하였다. 이때 원군이 온다는 말이 전해지자, 성안에서는 모두 기뻐 떠들며 문을 열었다. 병사들이 다투어 원군을 맞으러 나갔으나, 남조는 힘껏 싸우며 흐트러지지 않았다. 해가 진 뒤 판관 정극유(程克裕)가 북문의 병사 2천을 거느리고 여기에 가세하니, 만군이 결국 달아났다. 그런데 노탐은 오히려 만에게 서한을 보내 부득이하게 교전하게 된 것을 사과하고 또 강화를 청하였다. 병사들이 갑옷을 벗고 지상을 맞으니, 지상이 가져온 물건들을 늘어놓았는데, 깃발 두 개를 꽂아 운남에 하사하는 폐물이라 써 놓았다. [지상이] 만의 사자에게 말하기를, “천자가 남조와 화해한다는 조를 내렸는데도, 군대가 여전히 성도를 핍박하니 어찌된 일인가? 30리 밖으로 물러가 방비를 거둔 뒤에, 수호(修好)의 조약을 맺자고 하였다. 어떤 사람이 지상에게 권하기를, “만은 속임수가 많으니, 사지(死地)에 들어가지 마십시오라고 하니 지상이 가지 않았다. 만들이 다시 성도를 포위하고 밤에 서북쪽 모퉁이에 땅굴을 팠는데, 동틀 무렵에 이를 발견하여 즉시 빈 구멍에다 건초를 떨어뜨리고 불을 놓으니, 만들이 굴 안에서 모두 죽었다. 철끈으로 운붕(雲輣: 운제로 공성용 사다리를 말한다)을 끌어당겨 넘어뜨리고 불을 놓았는데, 잠깐 사이에 다 타버렸으며, 더욱 수비를 굳게 하였다.

支詳遣諜與約好且謂耽毋多殺以速蠻和是時傳言救師至城中合譟開門士爭出迎軍南詔搏戰不解日入判官程克裕以北門兵二千乘之蠻乃走耽猶遺之書謝不得已交兵且請和士脫鎧迎支詳詳陳所齎植二旗署曰賜雲南幣物」。謂蠻使者曰:「天子詔雲南和解而兵薄成都奈何請退舍撤警以脩好。」或勸詳:「蠻多詐毋入死地。」詳不行蠻復圍成都夜穿西北隅犂旦乃覺即頹茭火于壖蠻皆死穴中以鐵絙曳雲輣仆之燎作少選盡益固守

48) 이때 황제가 동천절도사 안경복을 대도하제치(大渡河制置) 검남절도사로 삼아 보냈다. 원병이 신도(新都: 사천성 신도현)에 이르렀고, 박야(博野: 하북성 여현 일대)의 장수 증원유가 만(: 남조)의 군대를 깨뜨리고 2천 급을 베었다. 남조의 기병 수만이 새벽에 관군을 압박하고 활개를 쳤는데, 대장 송위가 충무병(忠武兵)을 이끌고 싸워 5천을 참수하고 말 4백 마리를 노획하였다. 남조가 물러나 성숙산(星宿山: 사천성 성도시 북부에 위치한 양자산)에 주둔하자, 송위가 진격을 하여 타강(沱江)에 진영을 설치하였다. 추룡이 추망(酋望)을 지상이 있는 곳에 보내 강화를 요청하자, 지상이 말하기를, “지금 늘어선 성들이 굳게 지키고, 북에서 온 군대가 전공을 바라고 있으니 [그대는] 그대의 군주에게 돌아가 스스로 살 방도를 살펴보라고 하라라고 하였다. 노탐이 정예장수들을 보내니, (: 남조)의 방벽에 이르러 공격용 도구들을 불사르고 2천인을 죽였으나, 남조에게 뒤를 밟혀서 퇴각하다가 궤멸하였다. (: 남조)이 봉상(鳳翔)과 산남(山南)의 군대가 또 온다는 소식을 듣고, 이에 비교(毗橋)에서 맞아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였고, 타강(沱江)쪽으로 가다가 복병의 공격을 받아 또 패하였다. 성안에서 돌장(突將)을 내보내, 밤에 만의 진영에 불을 놓게 하니, 추룡과 탄작이 몸소 전투를 독려하였다. 3일 뒤에 조정의 군사 승천량(昇遷梁)을 탈취하니 만(: 남조)이 크게 패하였다. [만이] 밤을 틈타 정()과 역()에 불을 놓고 불길이 향하는 곳을 따라 조정의 군사에게 화살을 비 오듯 쏘아댔다. 송위는 군대를 나누어 가도록 하고 화살이 발사되는 곳을 향하여 집중 사격하게 하였다. 양군이 결판을 내지 못하자, 각자 진영을 해산하고 가버렸다. 추룡이 대적할 수 없음을 알고, 밤에 진영을 거두어 남쪽으로 달아났다. 쌍류(雙流)에 이르렀는데, 강에 다리가 없었다. 대책이 없게 되어 장차 물에 뛰어 들어 죽으려 하였는데, 어떤 사람이 말리며 말하기를, “지금 북군이 성도의 군대와 합류하였습니다. 만약 추격하여 온다면, 우리는 대적할 방법이 없습니다. 거짓으로 강화를 하여 위급한 상황을 완화시키는 것만 못하니 그렇게 하지 못할 때 죽어도 늦지 않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사자가] 와서 [강화를] 청하였다. 3일이 지나 다리가 완성되자 [강을] 건넜고, 그 즉시 다리를 끊었다. 그리고 대오를 정돈하여 천천히 행군하였다. [이때] 여주(黎州)자사 엄사본(嚴師本)이 흩어진 병졸을 모아 공주(邛州)를 지키고 있었는데 추룡은 이를 두려워하여 이틀 동안 포위를 했다가 떠났다. (: 남조)들이 한인을 사로잡으면, 반드시 귀와 코를 베고 놓아주었다. 이미 거주민 가운데 나무를 깎아서 귀와 코를 만들어 붙인 자가 열에 여덟은 되었다.

是時帝遣東川節度使顏慶復為大度河制置劍南應接使兵次新都博野將曾元裕敗蠻兵斬二千級南詔騎數萬晨壓官軍以騁大將宋威以忠武兵戰斬首五千獲馬四百尾南詔退屯星宿山威進戍沱江酋龍遣酋望至支詳所請和詳曰:「今列城固守北軍望功歸語而主審自度。」耽遣銳將趣蠻壁燒攻具殺二千人為南詔所躡卻而潰蠻聞鳳翔山南軍且來乃迎戰毗橋不勝趨沱江為伏士所擊又敗城中出突將夜火蠻營酋龍坦綽身督戰後三日王師奪昇遷梁蠻大敗夜燒亭傳乘火所向雨矢射王師威疏軍行嚮矢所發叢射之兩軍不能決各解去酋龍知不敵夜徹營南奔至雙流江無梁計窮將赴水死或止之曰:「今北軍與成都兵合若來追我無類矣不如偽和以紓急不然死未晚。」乃來請三日梁成而濟即斷梁按隊緩驅黎州刺史嚴師本收散卒保邛州酋龍懼圍二日去蠻俘華民必劓耳鼻已縱之既而居人刻木為耳鼻者什八

49) 안경복이 [성도에] 이르자, 사람들은 동생 ()경사(慶師)가 만(: 남조)에게 죽임을 당하였기 때문에 반드시 결심이 대단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안경복은] 성도(成都)[적에게] 떨어지지 않게 되자, 자신의 공이 가볍다고 생각하여 광계(廣溪)에 주둔 한 채, 남은 적을 내버려두니, 사람마다 분하여 이를 갈았다. 처음에 성도에는 해자와 참호가 없었다. 이에 노탐(盧耽)으로 하여금 해자를 준설하게 하였는데, 넓이가 3()이었다. 또 성벽의 담장에는 방어용 건물을 만들었다. 그리고 좌우에 둔영(屯營)을 늘어놓았는데, ()5개의 구()로 나누어 구마다 50인의 병졸을 배치하였다. 해자를 끼고 쥐엄나무를 심었는데, 3년이 지나자 둘레가 한 아름이나 되었다. 또한 큰 투석기와 연발식 쇠뇌[連弩]도 구비하였다. 이때부터 남조가 이를 두려워하였다.

慶復之來眾以其弟慶師死于蠻必甘心及成都不破以己功輕乃按軍廣溪縱殘寇人人切齒成都無隍塹乃教耽濬隍廣三丈作戰棚于埤列左右屯營營別五區區卒五十蒔皂莢夾壕後三年合拱又為大旝連弩自是南詔憚之

 

50) 추룡은 어렸을 때부터 살육을 좋아하여 친척 가운데 자신과 뜻을 달리하는 자는 모조리 죽였고, 군대를 출정시키느라 평안한 해가 없어, 여러 나라들이 번갈아가면서 원수로 여기고 원한을 품게 했으며, 여러 차례 백성들을 궁지로 몰아넣으니 나라의 재정이 소모되어 텅 비게 되었다. 촉을 공격한 전쟁에는 남자의 경우 [아래로] 15세까지 모두 징발하였고, 부녀자가 밭을 갈아 군량을 대게 하였다.

酋龍年少嗜殺戮親戚異己者皆斬兵出無寧歲諸國更讎忿屢覆眾國耗虛蜀之役男子十五以下悉發婦耕以餉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