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입력 2015.05.06 00:15 / 수정 2015.05.06 00:36
박근혜 대통령이 최근 라틴아메리카를 순방했다. 비즈니스 방문이었다. 글자 그대로 지구 반대편에 있는 나라들이다. 하지만 요즘은 전 세계가 한국에 무한한 기회의 땅이다. 125개 회사의 기업인 500명이 대통령과 동행했다. 박 대통령은 78개 양해각서(MOU)에 서명했다. 기업인들은 6억4600만 달러에 달하는 계약을 성사시켰다.
비즈니스는 비즈니스다. 하지만 정치는 ‘개인적’인 것이기도 하다. 박 대통령에겐 개인적인 매력이 있다. 그는 외국 지도자들과 만나 대화하는 데 소질이 있다. 남미 정상들을 만났을 때 어떤 생각이 들었는지 박 대통령이 공개할 가능성은 없다. 하지만 정상들은 박 대통령에게 깊이 생각할 거리를 주었을 것이다. 나는 이렇게 추측한다.
이념적으로 보면 이번에 만난 정상 중에서 콜롬비아의 후안 마누엘 산토스 대통령만이 뿌리가 같은 보수주의다. 나머지 셋은 급진 좌파 출신이다. 최고 권력자가 된 뒤의 현실이 그들을 온건하게 만들었을지는 모르지만.
페루의 오얀타 우말라 대통령은 2000년대 초반 한국에서 무관으로 근무한 적이 있다. 그 전에 그는 쿠데타를 시도했다 실패한 육군 장교였다. 양국 대통령은 요즘 총리 발굴이 얼마나 힘든지 동병상련의 감정을 공유했을지 모른다. 박 대통령은 세 번째 총리를 찾고 있다. 세상에는 ‘나보다 처지가 더 딱한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우말라 대통령은 최근 여섯 번째 총리를 잃었다.
가장 흥미로운 조우의 대상은 두 여성 대통령이었다. 미첼 바첼레트 칠레 대통령, 지우마 호세프 브라질 대통령이다. 양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다. ‘마초주의(machismo)’라는 신조어가 생긴 남존여비적인 남미 대륙에서 말이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두 여성 대통령의 탄생은 남미에서 새로운 정치발전이었다.
하지만 두 라틴아메리카 지도자는 순전히 자력으로 정상의 자리에 올랐다. 아시아는 다르다. 한국뿐 아니라 방글라데시·인도·인도네시아·파키스탄·필리핀·스리랑카·태국의 여성 정상들은 아버지나 남편이나 형제가 전에 권력을 쥐고 있었다. 미래에는 물론 예외적인 사례가 나올 것이다.
같은 여성이라는 점 외에도 연령대가 엇비슷하다. 박근혜·바첼레트·호세프 대통령은 모두 60대다. 하지만 차이점의 목록이 더 길다. 전기(傳記)상의 차이가 크지만 헌법적인 배경도 다르다. 바첼레트·호세프 대통령은 두 번째 임기를 수행 중이다. 박 대통령에게는 두 번째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브라질과 칠레는 군사 쿠데타를 겪었다. 이로 인해 브라질(1964~85년)과 칠레(1973~90년)는 민주주의 복원 전까지 혹독한 독재를 경험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서거 후 98년 국회의원으로 당선되기 전까지 20여 년 동안 정치를 떠났다.
대조적으로 바첼레트와 호세프는 둘 다 바리케이드의 반대편에서 싸웠다. 호세프의 경우에는 문자 그대로다. 그는 도시 게릴라였다. 70년 체포돼 극심한 고문을 당했다. 바첼레트도 고문을 당한 것은 마찬가지다. 바첼레트의 아버지는 민주적으로 선출된 마르크스주의자 대통령인 살바도르 아옌데에게 충성을 다한 공군 장군이었다. 그는 아우구스토 피노체트의 군사 쿠데타에 저항했다. 동료들과 함께 장기적으로 고문을 받다가 사망했다. 박 대통령과 바첼레트 대통령은 서로 아버지 얘기는 꺼내지 않았을 것이라고 나는 감히 추측한다.
가족 상황도 대조적이다. 세 대통령은 모두 싱글이다. 하지만 두 남미 대통령은 결혼했던 어머니다. 바첼레트의 첫째 아들은 동독에서 태어났다. 바첼레트는 4년 동안 독일에서 망명생활을 했다. 호주에서도 잠시 머물렀다. 호세프는 망명을 떠나지는 않았지만 호세프나 바첼레트나 장군들이 쫓겨나기까지 요주의 인물 목록에 올라 있었던 것은 마찬가지다.
세 대통령에게는 불청객 같은 공통점이 있다. 정치적인 측근이나 가족이 연루된 부패 스캔들이다. 바첼레트는 아들의 비리 혐의로 지지율이 31%로 떨어졌다. 지난 4월 29일 바첼레트 대통령은 기업들의 정당 기부금을 금지하는 계획을 발표했다. 정치자금을 국가가 관리하게 만드는 것이다.
호세프의 처지가 더 딱해 보인다. 측근들의 검은돈 거래뿐 아니라 호세프의 경제 운영이 광범위한 비판의 대상이다. 3월의 대규모 시위 사태 이후 영국 이코노미스트지는 그에 대해 “실권한 현직 대통령”이라는 표현을 썼다. 문제는 임기가 아직 4년 가까이 남았다는 점이다. 탄핵 얘기까지 나오고 있다.
박 대통령은 브라질을 떠나며 한국의 상황은 덜 나쁘다는 생각을 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는 새로운 총리를 찾아야 한다. 또 박 대통령은 경제 활력을 찾는 데도 다시 집중해야 한다.
지난 4월 29일 보선에서 새누리당은 의회 내 과반수 입지를 강화했다. 주로 한국 ‘리버럴들(liberals)’의 내분과 무능 덕분이다. 지지도가 39%로 오른 박 대통령에게 거의 3년의 임기가 남아 있다. 어쩌면 박 대통령은 남미에서 큰 교훈을 추출해야 할 것이다.
에이단 포스터-카터 영국 리드대 명예 선임연구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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