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신라와 당의 관계-68, 구당서 발해전-2) 차례 가. 관련 사료 1. 구당서 토번전(상) 2. 구당서 토번전(하) 3. 신당서 토번전 4. 구당서 돌궐전 5. 신당서 돌궐전 6. 구당서 측천본기 7. 신당서 측천본기 8. 구당서 거란전 9. 신당서 거란전 10. 구당서 발해전 11. 신당서 발해전 12. 구당서 숙종본기 13. 구당서 회홀전 14. 신당서 회홀전 15. 구당서 남조전 16. 신당서 남조전 17. 구당서 신라전 18. 신당서 신라전 19. 삼국사기 신라본기 나.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 1. 이진충의 난 이전 2. 이진충의 난 3. 돌궐족 묵철의 침공 4. 안사의 난 5. 토번의 침공 6. 토번의 침공 이후 7. 민란의 발생과 남조의 침공 8. 황소의 난 9. 절도사의 시대 10. 당의 멸망 다. 통일신라와 당 1. 통일신라 이후의 당나라 약사 2. 신구당서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3.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4. 사료를 통합해서 본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 가. 관련 사료 10. 구당서 발해전 ※ 구당서 발해전 출처: 1) 번역문: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통사/ 중국정사조선전/ 舊唐書/ 北狄列傳/ 渤海靺鞨 2) 원문: 新漢籍全文(http://hanchi.ihp.sinica.edu.tw/ihp/hanji.htm) /免費使用/史/正史/舊唐書/列傳/ 卷一百九十九下/ 北狄/ 渤海靺鞨 번 역 문 | 원 문 | 5)○(개원) 20년(732년) (대)무예가 그의 장수 장문휴를 보내어 해적을 거느리고 등주자사 위준을 공격하였다. (당 현종은) (대)문예를 파견하여 유주에 가서 군사를 징발하여 토벌케 하고 태복원외경 김사란으로 하여금 신라에 가서 군사를 일으켜 발해의 남쪽 경계를 공격하도록 명하였다.(詔遣門藝往幽州徵兵以討之,仍令太僕員外卿金思蘭往新羅發兵以攻其南境) 마침 산이 험하고 날씨가 추운 데다 눈이 한길이나 내려서 병사들이 태반이나 얼어 죽으니, 전공을 거두지 못한 채 돌아왔다. (대)무예가 원한을 풀지 못하여 몰래 동도(낙양)에 사자(使者)를 보내어 자객을 빌어 천진교 남쪽에서 (대)문예를 저격케 하였으나, (대)문예는 자객들을 물리쳐서 죽지 않았다. (당현종은) 하남부에 명하여 그 적(賊)들을 모두 잡아다 죽였다. | 二十年,武藝遣其將張文休率海賊攻登州刺史韋俊。詔遣門藝往幽州徵兵以討之,仍令太僕員外卿金思蘭往新羅發兵以攻其南境。屬山阻塞凍,雪深丈餘,兵士死者過半,竟無功而還。武藝懷怨不已,密遣使至東都,假刺客刺門藝於天津橋南,門藝格之,不死。詔河南府捕獲其賊,盡殺之。 | 6)○(개원) 25년(737년) (대)무예가 병으로 죽으니, 그의 아들 (대)흠무가 왕위에 올랐다. (당현종은) 내시 단수간을 보내어 (대)흠무를 책봉하여 발해군왕으로 삼는 동시에 그의 아버지를 뒤이어 좌효위대장군 홀한주도독으로 삼았다. (대)흠무는 조명(詔命)을 받들고 경내에 사면령을 내리는 한편, (단)수간의 편에 사신을 보내어 입조하고 공헌(貢獻)하였다. 대력2년(767년)에서 10년(775년)에 이르기까지 혹은 자주 사신을 보내와 조공하고, 혹은 해를 걸러 오기도 하였으며, 한해에 두 세번 오기도 하였다. (대력) 12년(777년) 1월에 사신을 보내어 일본국의 무녀 11명 및 지방물건을 바쳤다.4월과 12월에 사신이 다시 왔다. 건중 3년(782년) 5월과 정원 7년(791년) 1월에도 모두 사신을 보내와 내조하니, 그 사신 대상정을 위위경동정에 제수하여 본국으로 돌려 보냈다. 8월에 그의 왕자 대정한이 내조하여 숙위할 것을 청하였다. (정원) 10년(794년) 1월에 내조한 왕자 대청윤을 우위장군 동정으로 삼고, 그 아래 30여명에게도 차등을 두어 벼슬을 주었다. | 二十五年,武藝病卒,其子欽茂嗣立。詔遣內侍段守簡往冊欽茂為渤海郡王,仍嗣其父為左驍衛大將軍、忽汗州都督。欽茂承詔赦其境內,遣使隨守簡入朝貢獻。大曆二年至十年,或頻遣使來朝,或間歲而至,或歲內二三至者。十二年正月,遣使獻日本國舞女一十一人及方物。四月、十二月,使復來。建中三年五月、貞元七年正月,皆遣使來朝,授其使大常靖為衛尉卿同正,令還蕃。八月,其王子大貞翰來朝,請備宿衛。十年正月,以來朝王子大清允為右衛將軍同正,其下三十餘人,拜官有差。 | 7)○ (정원) 11년(795년) 2월에 내상시 은지섬을 보내어 대숭린을 책봉하여 발해군왕으로 삼았다. (정원) 14년(798년) 은청광록대부 검교사공을 가수(加授)하고, 발해국왕으로 진봉(進封)하였다. (대)숭린의 아버지 (대)흠무는 개원 연간(713~741년)에 아버지의 지위(位)를 세습하여 군왕(郡王) 및 좌금오대장군이 되고, 천보 연간(742~755년)에는 누차에 걸쳐 특진 태자첨사 빈객이 가수(加授)되었으며, 보응 원년(762년)에 국왕에 진봉(進封)되고, 대력 연간(766~779년)에는 계속하여 사공 태위를 더 제배(除拜)하였다. (대)숭린이 습위(襲位)할 적에 다만 군왕(郡王)과 장군만을 제수하자, (대)숭린이 사신을 보내어 도리상 [그럴 수 없음을] 피력하므로, 다시 책명(冊命)을 더 내렸다. 11월에 왕의 조카 대능신을 좌효위중랑장 노후(虜侯) 누번장으로 삼고, 도독 여부구를 우무위장군으로 삼아 방환(放還)하였다. | 十一年二月,遣內常侍殷志贍冊大嵩璘為渤海郡王。十四年,加銀青光祿大夫、檢校司空,進封渤海國王。嵩璘父欽茂,開元中,襲父位為郡王左金吾大將軍,天寶中,累加特進、太子詹事、賓客,寶應元年,進封國王,大曆中,累加拜司空、太尉;及嵩璘襲位,但授其郡王、將軍而巳,嵩璘遣使敍理,故再加冊命。十一月,以王姪大能信為左驍衛中郎將、虞候、婁蕃長,都督茹富仇為右武衛將軍,放還。 |
|